98화 신라를 위한 변명(3)
98화 신라를 위한 변명(3)
적지에서 항복을 권하는데도 을지문덕은 작은 흔들림도 없었다. 반면, 그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그러니까 이곳에 오기 전 온달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가게 됐네. 왕 막리지께서 자네가 적격이라고 하더군.
-아니, 가는 게 어려운 건 아닙니다. 한데, 소제가 언제부터 사대부가 되었고, 부월수의 수장이 되었습니까.
-나도 모른다네. 아마 지금부터가 아니겠는가?
-그······솔직히 부월수들은 대형과 어울립니다. 소제와는 전혀 결이 다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그리 전해졌네.
-······.
사대부.
영광스러운 명칭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부월수.
장차 고구려의 기둥이 될 위대한 석 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내키지 않았다.
다 떠나서 부월수의 전투 방식이 아예 맞지 않은 것이다. 한 번을 싸워도 백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며 움직이는 그였다. 그러한데 도끼를 들고 일단 돌격하여 적을 도륙하는 데 영혼을 끌어올리는 부월수의 방식이 적합할 리가 없었다.
그러했다.
이는 진심이었다.
물론, 김백정을 쳐다보는 그의 표정은 그의 표정은 실로 엄숙했다. 날카로운 눈빛은 작은 허점조차 파악할 수 없게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곤란할 것이외다. 빠를수록 신라가 잃는 게 적을 것이니 말이오.”
을지문덕은 참으로 오만했다.
결국, 분기탱천한 김후직이 나섰다.
“이보시오. 어찌 일국의 왕을 향한 언행이 이토록 불순하오?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것이오?”
“예의? 불순함? 하. 공이 할 말이오?”
“뭐요?”
“불쾌하기는 우리 태왕 폐하께서 더 불쾌하시오. 어찌 감히 번국의 왕을 지엄하신 우리 폐하라고 착각할 수가 있소? 동방의 천하에서 이보다 불순한 행위가 어디 있소?”
“하!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노발대발한 김후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대꾸도 하지 않고 김백정을 바라봤다.
“바로 그때였소. 귀국의 책략에 본국이 경악하기 시작한 게 말이외다. 그렇게 일국의 왕이 제 발로 여기까지 왔으니 진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
“음. 그런데 이제는 더 놀라게 하지 말아주시오. 이만하면 충분하오.”
“감히······.”
끝없이 이어지는 을지문덕의 조롱에 김백정은 도무지 노기를 숨길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었다.
조롱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빛이었다.
을지문덕의 눈빛은 너무나도 오만했다.
일개 장수가 일국의 군왕을 아래로 내려보는 눈빛이 심장을 찢어질 듯 따갑게 만들었다.
그래서 노여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또, 지금도 을지문덕의 말은 이어졌다.
“상황을 다시 전하겠소. 남쪽의 신라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당항성도 아군이 점령했소. 한데, 더 싸우겠다는 것이오? 허. 대체 얼마나 더 놀라게 하려는 것이오?”
“너의 무례함과 오만함을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귀국이 본국보다 강성해질 때까지. 하여, 영원히 참아야 할 것이외다.”
“네 놈의 목을 칠 것이다.”
노기로 범벅된 김백정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핏발 선 눈으로 을지문덕을 노려봤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김백정의 말이 실현될 가능성은 전무하니 말이다.
오히려 한 걸음 다가갔다.
심지어 김백정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해보시오. 진지하게 잘 생각해보시오.”
“······.”
“우리가 백제에 사신을 파견했을지 안 했을지.”
“뭐······?”
격하게 흔들리는 김백정의 눈동자가 참으로 보기 좋았는지 을지문덕은 싱그럽게 웃었다.
“어디 잘 한번 생각해보시오.”
그리고
“만일, 보냈다면 왜 보냈을 것 같소?”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그런 뒤
“난 이만 물러가겠소.”
대화의 종결을 선언했다.
“감히! 대체 마음대로 간다는 말인가!”
“그러면 죽이셔도 좋소.”
을지문덕은 조소를 날리며 몸을 돌렸다.
물론, 그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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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김후직은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기 때문이었다.
‘저, 정말 고구려가 백제로 사신을 파견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견원지간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양국의 사이는 험악하지 않은가. 냉정하게 따질 때 이 땅에서 진행된 쟁투의 역사는 8할이 고구려와 백제의 것이었다. 신라는 뒤늦게 결합하여 한수를 차지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찌 사신을 보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로 보냈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당항성이 빼앗긴 상황이었다. 이러할 때 고구려와 백제가 공세를 진행하면 신라는 파멸이나 다름이 없다.
을지문덕이 사라지기 전 던진 말이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왕 막리지께서 전하라고 하셨소. 귀국의 영토는 줘도 안 가진다고 말이외다. 백제가 참으로 좋아하지 않겠소?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 반이라도 사실이라면······?
어지러웠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폐하.”
“병부령······.”
“신이 간곡하게 청하옵니다. 서둘러······.”
“어찌 일개 무장에게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오?”
김후직은 아찔했다.
긴박한 정세였기에 잠시 잊었으나 을지문덕의 언행은 너무나도 불순했다. 군왕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수모였을 것이다. 심지어 상대는 무명의 무장에 불과했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내가!”
결국, 김백정의 화가 폭발했다.
“내가 신라의 왕이외다! 한데, 어찌 을지문덕 따위가 이토록 조롱할 수가 있소? 그에게 겁박이나 당해야 하오?”
노기와 수치심이 범벅된 상태였다.
왕의 상태를 확인한 김후직은 너무나도 암담했다.
“병부령.”
“폐하. 고정하셔야 하옵니다.”
“본국이 말이외다. 우리 신라가 기어이 한수까지 도모했소. 백제의 왕도 죽였소. 고구려의 턱밑까지 칼을 겨누었소. 연전연승했소. 하여,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국세를 이루었소. 한데······.”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노기에 폭발한 것이다.
“저들은 아직도 우리를 이렇게 무시하며 짓밟소.”
급기야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고구려가 대체 무엇이오?”
“······.”
“대관절 그 나라가 무엇이오?”
“······.”
“대체 우리는 어찌해야 개돼지보다 못한 이런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오?”
“······.”
“어찌해야 신라의 왕이 저들에게 최소한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것이오!”
격앙된 군왕의 모습에 김후직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당장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화를 가라앉히기보다는 분출하여 제거하는 게 옳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우리도! 이 나라 신라도!”
피를 토하듯 외쳤다.
“동방의 패권을 거머쥘 수 있는 자격을 얻었소이다! 한데, 어찌 저들은 이토록 오만할 수가 있소?!”
만일 을지문덕이 아니라 왕고덕이었다면 이토록 분노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무명의 무장에게 조롱당한 일은 김백정에게 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을지문덕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현실이 너무나도 참담한 것이었다.
그래서 죽을 것만 같았다.
“병부령.”
“예. 폐하.”
“준비하시오.”
“······.”
“나는 이겨야겠소.”
“폐하.”
“이길 것이오.”
“폐하.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대체 무엇이 천부당만부당이라는 것이오?”
“적은 아군보다 10배가 많사옵니다. 농성전을 펼쳐져도 감당하기 어렵사옵니다. 하온데, 어찌 야전을 치르고자 하시옵니까.”
“이겨야 하오. 이겨야만······.”
“폐하.”
김후직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잊으셨사옵니까? 신라는 이겨야 하는 게 아니라 이기고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옵니다. 기어이 이겨야만 한다면 이 나라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사옵니다. 그러나 이기고 있는 길을 걸었기에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김백정은 멍하게 김후직을 바라만 봤다.
“한데, 어찌 함부로 거동하고자 하시옵니까.”
“병부령은 을지문덕의 오만함을 잊으셨소?”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어찌 잊겠사옵니까. 죽을 때까지 새길 것이옵니다. 하온데, 폐하께서도 잊으셨사옵니까? 신라의 대왕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책무가 무엇인지 진정 잊으셨사옵니까?”
“······.”
“허. 잊으신 듯하여 신이 읊조리겠사옵니다.”
김후직의 표정은 참으로 싸늘했다.
눈빛도 날카롭기 이를 데가 없었다.
“생존.”
간결했으나 정확한 의미를 담은 두 음절이었다.
“예. 바로 생존이옵니다.”
“······.”
“신라의 대왕이라면 누구도 이 사명에서 벗어날 수 없사옵니다. 하온데, 폐하께서 순간의 호승심으로 이를 어기려는 것이옵니까.”
김백정은 아무런 답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김후직의 말이 원칙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폐하.”
“······.”
“신라가 하루아침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옵니다. 이를 잊으셨사옵니까.”
“······.”
김후직은 오욕으로 가득했던 신라사를 꺼냈다.
“폐하. 외부의 말을 신경 썼다면 신라는 진작에 자멸했사옵니다. 잊지 마소서. 신라의 역사는 늘 누군가의 조소가 묻어 있사옵니다. 이를 감내하지 못한다면 신라의 대왕이실 수 없사옵니다.”
“······.”
“타국의 평가와 누구의 말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어쨌거나 최후의 승자가 되면 되는 게 아니옵니까?”
옳다.
누가 감히 예상이나 하였겠는가.
신라가 동방에서 패권을 다툴 수 있는 나라로 성장할지 감히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러기에 옳았다.
그리고 냉정했다.
“을지문덕의 말이 불쾌하시옵니까?”
“······.”
“과거 신라의 왕도에는 고구려의 병력까지 주둔했사옵니다. 그들의 패악질이 신라의 왕실을 걷어찼사옵니다. 하오나 모두 참아내고 기어이 여기까지 왔사옵니다.”
김후직은 이를 악물었다.
“신라는 백 만의 피로 군왕의 생존이 담보된다면 기어이 그리해야 하는 나라이옵니다.”
“······.”
“신라의 병사에게 물러섬이 곧 죽음이며, 죽음이 곧 물러섬이라는 가치가 어찌하여 태어났습니까.”
신라는 지금껏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단 하루도 물러나지 않았다.
달리지 못하면 걸었고,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앞으로 향하여 나아갔다.
감당할 수 없다면 빌었고, 다리를 부여잡았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신라의 역사는 이토록 처절한 생존과 직결됐다.
신라는 그 역사의 중심에서 이 모든 걸 수행한 이들을 거서간이라고 하였고, 때로는 이사금이라고 불렀으며, 마립간이었으며, 왕이라고 하였다.
김후직은 말했다.
“싸워도 신이 싸우고, 죽어도 신이 죽을 것이옵니다.”
그는 핏발선 눈으로 역사의 정면에 섰다.
“폐하께서는 기어이 살아서 왕도로 가셔야 하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라의 왕이 취해야 할 최고의 정도이자 법도이옵니다.”
결사.
죽음을 각오하여 결심을 이룬다.
신라에서 이 두 글자는 오직 왕은 빗겨나갔다.
신라의 역사는 이러했다.
하여, 신라의 역사는 왕의 생존이었다.
그러하니
“폐하. 오직 감내하시옵소서.”
왕은 살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