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사문난적(2)
95화 사문난적(2)
북상하던 수천의 신라군은 발목이 잡혔다. 전쟁을 치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겪기 때문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고, 손목이 잡힐 수도 있다.
그런데 귀가 아픈 건 또 처음이었다.
“일찍이 추모왕께서 약탈의 법도를 이르셨다!”
추모왕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다.
약탈도 궁금하지 않고, 법도는 치웠으면 좋겠다.
“이를 성현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대체 어느 집 아들이 쓸데없이 가르침이나 내리고 다녔다는 말인가.
특히
“분명 신라는 가르침을 받았는데 어겼으니 사문난적이다!”
사문난적이라는 해괴한 단어는 정말 처음 들었다.
아니, 애초에 전해 들은 적도 없다.
추모왕이 누군지, 성현과 무슨 관계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지금 중요한 건
“사문난적에게 죽음을!”
“오직 죽음을!”
눈앞에서 도끼를 휘둘러대는 저들이 너무나도 징그럽다는 것이었다.
“하하하! 유학이란 이토록 즐거운 것이다!”
“하하하! 추모왕께서는 성현이시다!”
“우리는 성현의 전사이니라!”
피칠갑한 몰골로 웃으며 도끼를 휘두르는 저들은 필시 미친 게 분명했다.
창을 휘둘러야 했다.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다가오며 휘둘러지는 건 오직 적의 도끼였다.
훈련의 강도, 병력의 수······.
보편적인 규칙은 찾을 수도 없었다.
오직 기세, 아니 광기가 모든 걸 사로잡았다.
“사문난적은 죽어라!”
고구려의 부월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3천 기병까지 감당할 정신은 아예 없었다.
그때였다.
“물러서는 자! 내 손에 죽으리라!”
쩌렁쩌렁한 외침이었다.
누군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그러나 신라군의 장수라는 건 자명했다.
칼칼하게 갈려지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모두 똑바로 새기도록 하라! 우리의 강산을 저들이 침략하여 폐하께서 친히 오셨노라! 한데, 무도한 무리의 계책으로 위기에 빠지셨거늘 여기서 물러난다면 어찌 살아갈 것인가!”
뼈와 피가 난무하는 전장이었기에 그의 말은 거칠었고, 정제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한 신라군은 없었다.
“우리의 재물을 강도의 무리가 우리의 왕까지 범하고자 하는데 어찌 물러설 수 있겠는가!”
지당하였다.
고구려군이 먼저 약탈했고, 왕이 직접 달려왔다.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 상기됐다. 이는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신라군의 심장을 뜨겁게 했다.
“아직!”
그의 외침이 울렸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 싸움! 우리의 생존이자 내일이다!”
그 순간 신라군의 물러섬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나아갔다.
“만일 기어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우리의 것을 탐하는 강도의 무리를 죽이는 게 옳지 않겠는가! 우리의 창칼에는 오직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신라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기어이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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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신라군을 도륙하던 온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승기를 완벽하게 잡았건만 순식간에 백중세가 되었다.
“지독하군.”
그의 입에서 헛웃음까지 새어 나왔다.
온달의 눈에 보인 신라군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물러서면 죽음이다!”
“죽음이 곧 물러섬이다!”
“우리는 지킨다!”
“옆 사람을 믿고 무조건 휘둘러라!”
악전고투란 바로 이런 것일까.
두려움에 눈동자가 흔들리고, 손이 덜덜 떨리면서도 창을 놓지 않고 휘둘렀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옆 사람과 보조를 맞췄다.
기어이 죽음의 공포를 잊고자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괴성까지 지르며 창을 휘둘러댔다.
그들은 모습은 그야말로 절규였으며, 발악이었다.
그리고 강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라.’
말 그대로 지킴을 위한 쟁투였기에 신라군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친히 대군을 이끌고 달려온 왕을 구하기 위한 저들의 움직임은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재물은 원래 나누는 것이거늘!”
“하하하! 과연 사문난적들이 지독하구나!”
“옆 사람을 믿으면 옆 사람부터 죽이면 되는 것이로다!”
“네 목숨이나 지키거라!”
고구려군의 기세는 이미 정상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개마를 탄 부월수를 중심으로 몰아치는 기병대의 공세는 신라군을 짓밟았다.
그러나 온달의 감각은 이상징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유려하고 위력적으로 창을 휘두르면서도 전황을 살피는 그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아군이 여전히 유리하다. 그러나 신라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면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
현재 전투는 작전과 계책이 없는 피 터지는 백병전이었다. 애초 기선을 제압한 뒤 물러서는 격멸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는 이미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신라는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지금도 울리는 신라군 장수들의 외침은 묘할 정도로 신라군을 잘 통제하고 있었다.
이는 신라군의 위계와 신뢰의 강도가 대단하다는 걸 의미했다. 지난날,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쳤던 상황과는 달랐다. 애초 산책하듯 나온 적을 기습하여 적장의 수급을 취하는 것과 결사로 버티는 적을 제압하는 건 결의 다른 문제였다.
귀하디귀한 친위대와 부월수다.
피해가 커지는 건 내키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창을 휘두르던 온달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 즉시 말 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아니! 사문난적을 두고 등을 돌려야 한다니요!”
“이런 법도가 어디 있습니까?!”
부월수들의 볼멘소리가 터졌다.
그러나
“거! 시끄럽네!”
“부마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 건데!”
“쟁기질도 해본 적 없는 유학자들이 왜 그렇게 말이 많나?”
“자네 몇 살인가?”
친위대가 눈을 부라리며 따졌다.
양측의 위계를 따질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원래 다 이웃이었던 백성이었기에 벗이었다.
부월수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저들 중 고을 형님도 있고 뭐 그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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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은 전장의 흐름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부마가 직접 선봉에 서서 돌격했건만 신라군은 기어이 버텨냈다. 적장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는 걸 고려하면 신라군의 악전고투가 실로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작전을 수립하자고 했건만.”
애석하게도 지금 취할 신묘한 계책이라는 건 없었다. 이미 온달은 물러서고, 신라군은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피해는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 이 흐름을 차단해야 한다.
을지문덕은 한숨을 쉬며 오른손을 들었다.
지금부터 행할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화살을 쏘며 적을 원거리 공세로 압살하겠다.”
고구려 경기병의 자랑, 배사법이었다.
“절대로 백병전은 피하라. 지금 적은······.”
을지문덕은 정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성주신의 결의를 보이고 있으니까.”
지키고자 싸우는 적의 행보는 곧, 배수진이다. 굳이 충돌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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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물리쳤으나 시간은 짧았다. 어느 순간 다가온 고구려의 경기병이 귀신도 놀랄 기마술을 보이며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피해가 커졌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말을 타고 물러서면서 상반신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배사법이었다.
그런데
“!!!”
신라군 장수의 눈이 커졌다.
애초 기세에 밀린 듯 물러나던 온달의 중장기병과 부월수가 을지문덕의 공세로 전열이 무너진 틈을 보더니
“이, 이 무슨······.”
일제히 상반신을 뒤로 돌려 활을 쐈다.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앙!
그의 눈에는 수백, 수천 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외쳤다.
“죽음이 곧 물러섬이며······!”
그리고
-퍼어어억!
심장을 화살이 관통했다.
그는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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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이었다.
뭐라고 입을 댈 수도 없을 정도의 대승이었다.
사실상의 전투가 끝난 뒤 일방적인 학살이 있을 때 당도한 아회씨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슬쩍 부관을 쳐다봤다.
“자네 혹시 사문난적이 뭔지 아나?”
“모릅니다.”
“음.”
“실은 소인도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대관절 사문난적이 무엇이기에 고구려 부월수들이 저토록 경멸하는 겁니까.”
그들의 눈에 보인 고구려 부월수들은 악귀였다.
아무리 전열이 무너진 신라군이었으나 핏발 선 눈으로 저항하는 신라군을 아예 짓밟아버렸다. 학살이 아니라 아예 짓밟은 것이다.
“그렇지.”
아회씨는 슬쩍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나는 온달이 200명인 줄 알았다.”
“실은 소인도 그렇습니다.”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이백 부월수는 일기당천 그 자체였다. 오직 도끼로 신라군의 사지를 찍어버리는 모습은 아직도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저들이 유학자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한데, 서토의 유학자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그렇지. 유학은 몰라도 유학자는 알지. 오늘 보니 고구려의 유학은 확실히 특별한 것이 있네.
“어쩌실 생각입니까.”
“못 봤나? 고구려 부월수의 능력을.”
부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대인. 소인이 뒤늦게 전장에 결합하여 들어보니 어떤 특별한 가르침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그 가르침은 필시 고구려의 정수일 것이네.”
“하면······.”
아회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은 확실하게 처세해야 할 때였다.
“하하하! 과연 고구려군입니다! 소인이 크게 감탄했습니다.”
이미 온달과는 안면이 있었기에 편히 말을 보탤 수 있었다.
온달은 모처럼 만나도 변함이 없이 호탕한 아회씨를 보며 싱긋 웃었다.
“허. 막리지께서 어찌 그럽니까.”
“막리지라고 할지라도 어찌 부마께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전에도 느꼈지만 참으로 처세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온달은 이 모습이 싫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저 정겨웠다. 어쩌면 전장에서 함께 호탕하게 웃으며 약탈을 즐겼던 기억이 남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그냥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었다.
“실은 긴히 청이 하나 있습니다.”
“허. 청이라니. 음. 그래요. 무엇입니까.”
“혹시 고구려 유학을 소인들도 익힐 수 있습니까?”
“허. 우리 유학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온달이 크게 난처해하자 아회씨는 진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역시 섣불리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러하다면 괜한 말로 부마 온달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이다. 완벽한 오판이었다.
그리고
“막리지. 혹시 부월수를 바라보는 겁니까?”
온달은 참으로 예리했다.
과연 고구려의 부마다운 정치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대를 앞에 두고 이 시국에 괜한 말을 하여 상대의 불신을 키우는 건 우매한 짓이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음.”
온달은 갈수록 더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큰일이군. 아는 게 전혀 없는데.’
이왕이면 도움이 되고 싶었던 온달로서는 참으로 난감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려니 이것도 어려웠다. 위치가 부마이기에 그러했다.
“음.”
“송구합니다. 소인이 괜한 말로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아. 그런 게 아닙니다. 휴. 솔직히 말해야겠군요. 내가 잘 모릅니다.”
아회씨는 크게 감격했다.
‘이토록 스스로를 낮추다니. 백 승의 무장이 어찌 이리 겸손하다는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인이 계속 송구합니다.”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