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신라를 위한 변명(1)
96화 신라를 위한 변명(1)
신라는 늘 고구려와 백제의 손을 빌렸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홀로 서토의 나라와 만나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동방에서 가장 동방에 위치하며, 국력이 열세인 신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크게 불편한 건 없었다.
동방에서 또 다른 세계와 반드시 만나는 건 국력의 성장과 직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라의 세계에서 천하는 고구려와 백제가 전부였기에 굳이 무리하여 멀고 잘 알지도 못하는 서토의 나라와 가까워지고자 노력할 이유는 없었다.
부족한 것도 없었다.
고구려와 손잡고 다니다가 뿌리치고, 백제와 손잡았다가 잘랐다. 이러다 보니 넘치도록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그저 살았는데 양손에 잡힌 손이 없었다.
이때 신라는 새로운 세상에 보게 되었다. 그저 따라다니며 만나고 가끔 말이나 섞었던 서토의 나라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참으로 광활한 영토였다.
셀 수도 없는 엄청난 수의 백성이었다.
아예 새로운 세계였다.
신라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하늘은 동방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아니, 동방의 하늘은 너무나도 좁았다는 걸.
신라는 흥분했다.
그리고 침착했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그들의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하늘 아래 두려울 게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들을 향해서 최선을 다해 노래하고 춤을 췄다.
손을 내밀었더니 손끝에 무언가자 잡혔다.
드디어 잡아준 것일까?
결과, 신라는 좁은 동방의 일부를 탐하게 되었다.
오직 고구려의 태왕만 취하였던 ‘동방교위’로 책봉되었을 때 신라는 동방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오만해졌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수백 년간 동방의 하늘로 버텨온 고구려를 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아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미친 듯 간절하게 갈망하게 되었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맛을 본 것이다.
동방의 패자로 인정받은 그 순간의 희열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라는 꾀하였다.
동방의 주인으로 되기로 당찬 포부를 품은 것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서토와 부지런히 소통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고구려를 멸해달라고 청할 것이었다. 하여, 무주공산이 된 동방의 주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남들이 비웃어도 좋다.
강탈이라도 해도 좋았다.
손가락질해도 무관했다.
그때의 희열을 다시 취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다. 사실 이는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이 모든 단서는 오직 당항성이었다.
좁다고 비웃었던 동방을 신라가 맛볼 수 있었던 건 오직 당항성이 있기에 비롯한 것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서토를 향한 강렬한 춤사위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허.”
당항성이 불타고 있었다.
“아니······.”
강이식은 볼을 긁적였다.
그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
정말로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성을 점령할 목적이 아니었기에 약탈을 감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소수의 병력만 지키던 작은 성, 당항성이 무주공산의 수준이었다.
이는 십시일반 병력을 꾸려 왕을 구하고자 출병한 게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성을 이렇게 점령해도 되는 건가.”
강이식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라고 하여 당항성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 일의 여파가 안학궁에서 어찌 판단할지 걱정될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었다.
“성을 점령했으니 내어줄 수는 없지. 심지어 당항성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강이식의 행보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는 약탈이 아니라 농성이 주된 역할이었다. 도성에서 새로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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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과 아회씨의 병력은 철저하게 야전(野戰)을 펼치며 신라군의 북상을 차단했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공성전은 신라군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이 방법이 만사형통은 아니었다.
“다 좋은데 완벽한 건 아닐세.”
고흘이 문제를 제기했다.
군무에 관하여 그의 의견은 천금과도 같기에 경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을 점령하지 않았다는 건 언제라도 배후에서 적이 공격할 수 있다는 걸세. 비록 규모가 소수라고 할지라도 위협이 될 수밖에 없네.”
한 마디로 마음껏 뛰어다니는 건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번국이 약탈할 때는 성을 사수하며 원군을 기다리는 게 중요했기에 이 악물고 버텼으니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왕이 포위되었으니 어떻게든 북상할 것이네.”
“그렇긴 하지요. 갈수록 교전 횟수가 늘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신라군은 어떻게든 병력을 규합하여 군사적 움직임을 감행했다. 다만, 지금까지 온돌과 아회씨의 맹활약으로 의미 있는 행보로 이어지지 못했을 뿐이었다.
“다른 문제도 있네. 칠중성의 신라군이 아직도 여전히 1만 명이라는 걸세.”
“음.”
“군량의 부족으로 버티는 게 어렵겠지만, 이 악물고 뛰어나오면 어찌 될지 가늠할 수 없네.”
고흘은 지도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유려하게 움직였다.
“보게. 부마의 교전 지역은 모두 칠중성으로부터 이어지는 교통로의 인근일세. 이는 단지 신라군이 이동하다가 교전이 발생했다고는 볼 수 없네.”
“하면, 장군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을 때 칠중성의 성문이 열릴 것이네.”
“······.”
“신라군을 악을 쓰고 왕을 탈출시키겠지.”
“······하면, 최대한 길을 열어내고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이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여태껏 신라군이 백 명, 천 명씩 모아낸다고 여겼다. 하지만, 고흘의 말은 아예 달랐다.
신라라는 나라의 심리가 고구려 막리지 왕고덕이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서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허. 어떻게든 대군을 규합하여 우리의 외곽을 흔드는 게 아니라는 겁니까?”
“그건 보편적인 방법일세. 음. 백제라면 그리했을 것이네. 1천, 1만의 근왕군을 모아내어 북상했을 것일세. 한데, 신라는 아니지. 그 나라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무리와는 결이 다르지 않은가.”
“······.”
“우리 고구려군이 웃으며 나갈 때 신라군은 이를 악물고 나아간다네. 우리가 낭만이라면 그들은 처절한 생존이지.”
다소 원론과도 같은 말이었으나 작금의 정세와 맞물려 비교할 때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1만을 뒤로하고 왕은 탈출을 감행할 것이네. 끝내 도주한 신라왕은 소수의 병력이 산발적으로 전투를 일으키는 전선을 지나 아차산성까지 당도하지 않겠나?”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움직였다.
“아차산성까지 도주한 신라 왕은 쉬지도 물 한 모금 마시고 한수 이남으로 도주할 것이네.”
“······왕도에서 근왕군이 당도하겠군요.”
“그렇지. 우리로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일세. 거기까지 쫓아가서 싸울 수는 없으니 말일세.”
한강 이남으로 도주한다면 어찌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도 의문은 남았다.
“정말 가능한 방책입니까? 쉽사리 상상하기 어렵습니다만.”
“그거 아는가? 신라라는 나라는 나약하네. 그런데 신라군은 생각보다 지독하다는 거. 의외로 잘 물러서지 않아.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물러섬도 두려워한다네.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일일세.”
그래.
임전무퇴의 나라가 신라였지.
상기할 때 신라는 통일 전쟁을 치를 때는 당나라에 기생했다. 하지만, 최후의 생존을 결정지어야 할 때는 과감하게 당나라와 싸웠다.
늘 바닥을 기다가 칼끝이 목 끝으로 다가오면 기어이 싸우는 나라가 신라였다.
되돌아보면 이것도 참으로 희한했다.
최후의 순간 평소 기풍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는 게 말이다. 늘 하던 행동만 바라보면 머리를 숙이며 살려만 달라고 구걸해야 할 것만 같은 나라가 국운을 걸고 기어이 싸운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러서느니 죽겠다는 게 그들의 각오라면 무조건 이해가 됐다.
그래도 의문이 남았다.
“아차산성 이북이 초토화될 겁니다.”
“그렇지. 그런데 이 악물고 덤빌 1만의 신라군과 싸운 우리도 피해가 크겠지. 게다가 신라의 산성은 일제히 성문을 닫고 버틸 것이네. 우리는 이때 선택해야 하네.”
별로 좋지 않은 선택지가 보였다.
“전쟁을 선포하여 기어이 한수 이북을 취할 건지 아니면 약탈의 성공을 선언하며 물러날 건지 말일세.”
“허.”
우리는 지금 신라와 총력전을 벌일 시기가 아니었다. 북방의 시곗바늘이 바쁘게 움직이는데 이런 곳에 국력을 투입한다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거란, 고막해, 말갈이 온 힘을 다해서 뛰어들었다. 제국을 지향하게 된 고구려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판이 너무 거대해진 것이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요.”
고흘은 첨예한 외교와 정치를 말하지 않았다. 단지, 신라군의 행보를 예상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동방의 안정과 지대한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휴. 장군. 이 싸움, 우리가 무조건 가져와야 합니다. 단지 전투가 아니라 신라 왕을 사로잡아야만 동방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러지 못하면 두고두고 우리의 발목이 잡힐 겁니다.”
“그렇지. 자네의 말에 동의하는 바일세.”
“해서, 여쭙지요. 방책이 없겠습니까.”
사실 신라군 1만 명이 칠중성의 포위를 뚫고 김백정의 도주로를 확보한다는 상상부터 치워버리면 되긴 했다. 그런데 이게 너무 현실적인 분석이기에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바라는 건 무엇인가. 전투의 승리인가?”
“아닙니다. 저들의 항복이지요.”
“어렵군.”
정말 어려운 일이다.
결국, 저항 의지를 박탈하고, 희망을 아예 말살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죽기로 덤비는 게 전부인 상대로 이를 해낸다는 건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기도 했다.
고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지도를 바라봤다.
그의 번뇌가 느껴졌다.
그때였다.
황당함으로 범벅이 된 표정을 한 연자유가 들어왔다. 계속 눈만 껌뻑이는 모습을 고려할 때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한 게 분명했다.
“왜 그러나?”
“아니······.”
그가 계속 버벅거렸다.
너무 궁금해졌다.
“말해게. 무슨 일인가.”
“강이식의 수군이 신라의 당항성을 점령했습니다.”
“뭐······?”
“왜인지는 묻지 마십시오. 강이식도 눈을 껌뻑이고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아니······.”
나도 황당했다.
그리고
“이거 이러면 상황이 달라지는군.”
고흘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막리지. 당항성까지 확보했네. 이러면 신라 왕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옳은 말이었다.
당항성은 신라가 망상을 꾸는 근거였으니 말이다.
“어떤가. 결단을 내려주겠는가?”
“좋습니다.”
어쩔 수 없다.
판돈을 더 올려야 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가겠네.”
고흘이 나섰다.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장군의 패배는 곧 고구려의 후퇴입니다. 이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하하! 자네 지금 누구에게 패배를 언급하나?”
그랬다.
대륙과 싸워 이긴 무장의 자신감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