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명분 중심의 외교
93화 명분 중심의 외교
치열했던 외교 담판을 마무리하긴 했다. 지금부터는 신라가 알아서 결과를 가져와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현재 우리는 정주민족의 남한산성을 포위한 기마민족처럼 마냥 세월을 보낼 수는 없었다.
우선 칠중성을 포위한 주체는 번국이었다. 여기에 고구려의 병력을 보태면 좋겠지만, 주지했듯 우리는 상당히 바빴다. 농사지어야 했다.
물론, 동원하자면 못할 것도 없으나 핵심이 따로 있었다.
“군량 아깝사옵니다.”
나는 진심으로 단호했다.
“신라 따위나 상대하고자 거센 반대를 뿌리치고, 밤낮을 지새우며, 끼니도 굶어가며, 험난한 농업 개혁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옵니다. 고작 이 꼴을 보려고 한 게 아니었단 말이옵니다.”
“······.”
“이러자고 쌀을 확보하였나 자괴감까지 들고 있사옵니다.”
정말이었다.
지금 우리는 대륙을 향해서 강렬한 러브콜을 날리고 있지 않던가. 그러한데 신라 따위 때문에 차질이 생길 수는 없지 않나?
아니, 내가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 진짜다. 돌궐 흡수 계획을 집행하는 와중에 신라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와서 이러고 있다는 말인가.
정말 길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지,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음. 뭐. 막리지의 말을 다 이해하오. 한데, 신라가 버티면 어쩔 수 없이 공세를 진행해야 하오. 이 또한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아니겠소?”
다시 본론이었다.
나도 알고 고양성도 알고 있는 문제는 간단했다. 그러니까 신라가 버티면 버틸수록 곤란해진다는 것이었다.
이번 사안은 굉장히 복잡한 정치 외교적 사안이었다.
1. 현재 대 신라 전선은 모두 번국이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약탈이 아니다.
2. 번국에게 공성전까지 명할 수는 없다. 일단 포위까지는 했는데 신라가 미친 척하고 성문 열고 나오면 치열한 혈전이 발생하게 된다.
3. 또, 남쪽 전선도 아회씨가 전담하고 있다.
그러니까 약탈이 아니라 전쟁을 번국이 하고 있다. 그러한데 고구려군은 아예 참전도 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편안하게 약탈할 수 있다길래 이사했는데 했더니 전쟁이 터졌다? 이건 무슨 말을 해도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 사과하고 배상도 해줘야 한다. 우리는 신의가 있는 나라니까.
더욱이 북방의 소문은 하루에도 천 리를 간다. 우리가 고작 신라 따위와 투덕거렸다는 사실은 돌궐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디 이뿐이겠는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 판에 진나라 사신단이 불구경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동방의 패권을 확실하게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개망신이나 당할 게 뻔했다.
그러니까 이번 사안은 고구려 외교사의 중요한 분수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주 엄중하게 바라봐야 한다.
“한데, 막리지의 말에는 모순이 있네.”
고흘이었다.
현재 전선이 형성된 상황이었기에 고구려 최고의 무장인 그의 말 한마디는 천금보다 무거울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시선이 집중됐다.
“이것저것 다 아까운 건 알겠네. 한데, 감행하였을 때 우리가 취할 결과물은 신라의 왕일세. 하면, 생각을 달리해볼 수도 있지 않나?”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이렇게도 없단 말인가.
나는 꽉 찬 답답함을 호소했다.
“신라 왕을 잡으면 좋다는 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음······.”
“허. 설마 신라 왕을 잡을 수 있는데도 아깝다는 건가?”
“실은 그렇습니다. 그 시간과 인력 모두 말입니다.
나의 강경한 원칙론에 고흘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면서 나를 탓했다.
“자네 생각은 잘 알겠네만 그래도 왕인데 너무 인색하지 않나?”
“장군. 왕이긴 한데 신라왕이라서 이럽니다. 만일, 백제왕만 됐어도 이러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필이면 신라왕이라니.”
“음. 너무 맞는 말만 하니 내가 더 할 말이 없군. 내가 왕에만 집중했네. 신라왕이라는 걸 인지하니 아깝긴 아까워.”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정말 아까운 건 사실이었다.
논의가 막히자 내가 다시 정리하듯 말했다.
“고구려 군을 동원하여 신라군을 압박하는 건 명분, 그냥 무시하는 게 실리입니다.”
늘 그렇듯 명분과 실리는 치열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장군.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심각한 겁니다. 보십시오. 신라 왕을 이대로 보내주면 다들 우리를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명분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요.”
“끙. 이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네. 그렇다고 명분을 포기할 수는 없고. 실리를 따지자니 체면도 깎이고. 하. 나는 모르겠네. 나는 전장에서 적을 도륙 낼 줄이나 알지 이런 정치와 외교는 너무 복잡하네.”
그때
“이리하는 건 어떻습니까.”
대 돌궐 외교 전문가 고식이 나섰다.
나는 크게 반색하며 말했다.
“오. 자네 혹시 신라 외교도 정통하였나?”
“허. 대형. 신라 따위와 외교 하는 데 정통하기까지 해야 합니까? 신라 외교는 분석이 필요 없고, 독자적으로 정립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신라는 수시로 구걸하고 등만 보이며 칼을 꽂는 나라가 아닙니까. 그러니 신라 외교라는 건 그냥 상황에 맞게 기분에 따라 하는 겁니다. 백년대계를 수립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나라이니 말입니다.”
사실 고구려에는 대 신라 외교가 전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고식의 말대로 공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상황에 맞춰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게 전부였다. 근데 이게 가장 원칙적이긴 했다. 신라를 상대하는 일은 말이다.
“신라 외교에 성과를 낸다는 건 결국, 임기응변이 뛰어다니는 것이며, 신라 외교의 전문가라는 건 임기응변만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데, 대 돌궐 외교의 선구자인 나에게 신라의 외교를 언급하는 건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래. 내가 사과하겠네. 그래서 자네의 의견은 무엇인가.”
“퇴로를 열어주는 겁니다.”
“퇴로?”
“진나라 사신단이 왔습니다. 그들을 신라 왕과 만나게 하면 어떻습니까.”
“아. 마치 진나라 황제의 중재로 물러나는 것이라며 마음이라도 편히 가질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신라인들이 정신이라도 승리하게 해주자는 것입니다. 음. 아닙니다. 됐습니다. 그냥 말이 안 됩니다.”
“응?”
고식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그냥 조금 아까워도 병력 동원해서 공격하면 안 되겠습니까?”
“허.”
“대형. 때로는 실리보다는 명분을 찾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아니, 애초에 신라 외교에 너무 많은 이가 몰려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고식의 말대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야말로 고구려의 중추라고 할 수 있었다.
고양성, 고정의, 고식, 고흘, 연자유 그리고 나까지.
우리가 결정하면 그게 바로 고구려의 길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중에 신라 전문가는 없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막리지. 내가 생각해도 사안을 간단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르시옵소서. 폐하.”
“애초 약탈하다가 생긴 일이오. 한데, 약탈은 원래 우리의 전통이었소. 하늘 아래 우리 고구려보다 약탈에 능한 세력이 있을 수 없소.”
백 마디보다 강하고, 정확하며,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나는 가끔 실리보다는 명분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오. 뭐. 체면도 살려야 하니 말이외다.”
그래.
맞다.
아까워도 어쩌겠는가.
더는 반대할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고구려가 전면적으로 약탈에 나서는 것이옵니다.”
이런 정세라면 ‘과연 약탈이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옵고, 체면을 이르셨사옵니다.”
“번국이 놀라야 할 것이오.”
“물론이옵니다.”
현재 번국은 5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상국이자 대국인 고구려가 부족하면 곤란하다. 아니, 단지 규모만 그러해서도 아니 될 일이었다.
약탈의 본고장답게 모든 것을 압도하는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수군을 동원하여 해안으로 진군하고, 기병과 보병을 동원하여 칠중성을 포위할 것이며, 기병을 남하하여 적의 영토를 교란하는 게 옳사옵니다.”
수륙양면으로 약탈하는 것이다.
“좋소. 하지만, 약탈답게 공성전은 피해야 할 것이외다.”
“응당 그리해야 하옵니다.”
“그리하면 칠중성을 포위하는 병력은 자유로워지겠구려.”
“그러하옵니다. 가장 귀찮은 일이니, 대국이 솔선수범해야지요. 저들은 약조대로 약탈에 전념하면 되는 것이옵니다.”
우리는 신의가 있는 나라였기에 약조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훗날 대대적으로 남진하면 그때 참전을 권하면 되는 것이다.
“칠중성 포위는 내가 책임지겠소.”
고정의였다.
정말 매사 시원해서 좋다.
“5만이면 될 것 같소. 음. 농사에 차질이 생기긴 하겠으나 나중에 신라 왕에게 책임지라면 되는 거 아니겠소?”
판돈도 정말 시원했다.
이러면 나라고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면, 이쪽에서도 수군을 최대한 꾸려서 압박하리다.”
“설마 수군만 동원할 생각이오?”
“사정을 좀 봐주시오. 한성의 일로 평양 귀족들의 입이 하늘까지 뻗었소. 한데, 농사까지 문제가 생기면 내 입장이 참으로 난처하오.”
“아. 좋소. 그건 내가 인정해야지요. 그래서 몇 명이오?”
“음. 군선 200척이외다.”
“대략 1만 5천~2만 명이구려.”
“2만 명이라고 해주시오. 나도 입장이라는 게 있소.”
“하하하. 좋소.”
군선 200척, 수군 2만여 명.
보병과 기병 5만 명.
거란, 말갈, 고막해 5만 명.
총 12만 명.
한반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약탈이 선언되었다.
-----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적이 포위했으나 교전 자체가 없었다. 차라리 공격해오면 대차게 싸우기라도 할 건데 아예 움직임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요격하러 나가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현재로서 칠중성의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은 남쪽에서 원군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소?”
“······.”
김후직은 쉽사리 답변하지 못하였다. 김백정은 한숨만 쉬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근왕군이 북상할지라도 의미가 없다. 칠중성의 군량이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해보려고 하기에는 적은 너무나도 강군이었다.
“하! 대체 말갈의 군왕기를 보고 태왕이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 꼴은 당하지 않았소!”
탓을 잘 하지 않는 김백정이었으나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칠중성 성주의 안색은 파리해졌다.
그랬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바로 군왕기였다.
다소 싸늘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였다.
“폐하. 진나라 사신단이 왔습니다.”
고구려와 호형호제하던 진나라 사신단이 왔다고 한다. 김백정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나
“성대히 맞이하라.”
지금은 누구라도 만나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