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대개간의 시대(1) >
84화 대개간의 시대(1)
모처럼 찾아온 연자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바라봤을 때 그가 이리 나오는 건 상당한 성과를 가져왔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잔뜩 기대하며 말했다.
“밥 한 끼 해야지?”
“하하하! 먹고 왔습니다.”
“허. 정말인가?”
이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성과를 가져왔는데 밥을 먹었다는 건 참으로 기묘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살짝 미심쩍기도 했으나 사람을 의심하는 건 나쁜 습관이기에 집어넣었다.
“일단 들어보겠네.”
“하하하. 그냥 보십시오.”
연자유가 자신만만하게 내민 문서는 흔히 만주라고 부르는 지역의 기후였다. 상당히 아니,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권역별로 나눈 수준이었다.
놀라서 쳐다봤다.
“대단하군.”
“요동은 최전선이기에 상대적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농업이 시급한지는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평양 도성이나 국내성 주변을 더 빨리 파악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나의 지식은 연자유가 정리한 문서에서 풍요로운 황금물결을 도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만주에서 가장 농사에 적합한 곳은 요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요동은 벼농사에 아주 적합한 곳일세. 우리는 이곳의 생산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야 하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네. 길어야 3년.”
최대치를 3년으로 보았다.
그러면 1년 내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우선 파악한 바에 의하면 요동은 벼의 생육에 적합한 기후 조건이었다. 다만, 가을철 벼의 성숙기에 기온이 급강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요동은 날이 더운 계절 특히 3달간 강우가 집중되네.”
다시 문서를 가리켰다.
볼수록 완벽한 내용이었다.
마치 현대의 문서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늦봄에서 초여름 한발의 피해로 흉년이 발생하기도 한다네. 또, 강우가 집중될 때는 하천이 범람하여 수해를 입고.”
“방책이 있습니까.”
“관개수로는 당연한 일이네. 그러나 마른 논에 볍씨를 파종한 후 여름에 물을 확보한 뒤 수전으로 전환하는 건답법을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일세.”
“건답법이라······.”
연자유는 곱씹었으나 크게 고려하지는 않았다. 흘려들은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세세한 농법을 토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문진이 해야 할 일이었다.
“관개용수를 확보하고 건답법과 같은 농업을 적극적으로 보급한다면 요동 농사의 어려움은 크게 해결될 것이네.”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십니까.”
“만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면 요동의 농업 생산력은 기존 고구려 전체의 그것과 비등해질 것이네.”
요동의 생산력만으로 종래 고구려의 생산력과 비교한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과장이 아닐세. 현재 고구려 국고에 쌓인 비축곡이 어떠한가.”
“음. 50만 석 정도입니다.”
일국의 비축곡치고는 터무니없이 적은 수량이었다. 물론,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귀족이 총단결하기에 늘어나긴 하겠지만 말이다.
“요동 아니 개모성.”
손끝으로 개모성을 가리키며 확신을 담아 말했다.
“개모성 일대의 황무지만 제대로 경작하면 30만 석에 육박하는 쌀을 생산할 수 있네.”
콩이 아니다.
쌀이었다.
연자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부터 천년을 앞지른 요동 대 개간 정책을 입안할 것이다.
“현재 요동은 전통적인 한전 경작이 대부분일세. 그러하니 나머지 지역은 방치된 상태가 아닌가.”
한전 경작도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기존 경작지를 어찌하려는 것보다는 허허벌판에 인력을 투입하는 게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음. 우선 저지나 습지는 배수가 불량합니다.”
배수시설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할 때 1년 농사가 한 번에 망해버린다. 물론, 저지나 습지도 접근해야 하겠으나 먼저 할 곳은 따로 있다.
“그렇지. 그러니 그 전에 접근할 곳이 있네.”
“어딥니까.”
“요동처럼 1년간 내리는 비가 적고, 증발이 심하고, 하천의 수량이 안정적이지 못한 곳은 결국 관개용수가 모든 걸 판가름할 것이네. 그러니 수해와 침수의 위험이 적으면서 수원이 안정적이기에 한발의 피해를 적게 받는 지형을 찾아야겠지.”
“구릉 지역에 있는 밭을 논으로 바꾸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기본은 구릉 지역이었다. 밭이 있더라도 논으로 변경할 수 있다면 그리해야 한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압록강을 가리켰다.
“강의 하류는 물이 풍부하기에 잘 활용하면 빠르게 수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네.”
압록강 하류의 계곡분지는 구릉의 계수를 이용할 수 있기에 빠르고 안전하게 논농사를 도모할 수 있다.
압록강을 가리키던 손가락은 북상했다. 멈춘 곳은 비류수(혼강)이었다.
“동시에 집중해야 할 곳은 비류수일세.”
“구도인 국내성 일대군요.”
“그렇다네.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이곳을 넘어······.”
나는 만주를 내 손에 품었다.
“모두 경작할 수 있네.”
끝으로 내 손가락은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지역을 가리켰다.
“음.”
왼손으로 문서를 넘기며 세세하게 살폈다.
다시 봐도 느껴지지만 정말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바쁘니까 이곳은 넘어가지.”
“그렇습니까······?”
“훗날 경작하긴 하겠으나 지금은 소모적이네.”
연자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결국, 핵심은 관개수로군요.”
“그렇지.”
세세하게는 결국, 건답직파법, 이앙법, 이앙혼재재배방식 등 여러 농법이 있으나 역시 이문진과 상의할 부분이었다. 아니 집행해야 할 부분이다.
“경작에 성공한다면······.”
연자유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나 또한 웃으며 화답했다.
“해당 지역에서 확보할 조세만 100만 석이 넘을 것이네.”
“······.”
“물론, 최소치일세.”
연자유는 기분 좋게 웃었다.
“해내야지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에게 이르길 논농사는 조세를 수확량의 4할, 밭농사는 5할을 거둔다고 하면 선택할 것이네.”
“자발적으로 달려가는 백성은 그러하겠지요. 한데, 그렇게만 해서 어찌 경작이 속도를 내겠습니까.”
“시작부터 이리했으면 오죽 좋았겠나.”
다시 생각해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사실 현재 고구려가 농업 개혁에 전면적으로 결합하게 된 이유는 오직 단 한 가지였다.
이미 우리는 천하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상태다. 만일, 농업 개혁으로 내실을 다지지 못하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그전부터 시작하긴 했으나 지금처럼 총력전 수준으로 개간을 준비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말했다.
“문제가 있겠나? 그러자고 거란족, 말갈족, 고막해족을 불러온 것일세. 그들이 남쪽을 방비할 동안 평양 도성과 요동성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경작을 진행하게나.”
“물론입니다. 우리가 이러자고 그들을 불러온 것이지요.”
병력은 그대로 둔다. 그러나 경작할 백성은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또한, 포로로 잡아 온 수나라인들은 모두 요역에 동원한다. 이것이 지금의 계획이었다.
“평양 도성 인근의 미개간지는 말갈국에 맡겨도 될 것 같네만.”
“그렇지요. 한성을 내어주긴 했으나 귀족들의 농지를 준 게 아니니 말갈국도 고민이 많을 겁니다.”
말이 말갈이다.
거란과 고막해도 지금부터 서서히 먹고 살 준비를 해야 한다. 한강 유역을 점령하는 일이 당장 내일부터 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10만 명 이상의 농부라. 이건 축복이군.”
말이 10만 명이다.
우리가 미처 경작하지 못한 황무지를 모두 책임지고 담당해낼 것이다.
훗날, 그들이 한강 유역으로 떠날 때는 고스란히 고구려의 경작지로 귀속될 것이다.
왜? 지금 우리는 땅을 내어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귀족들에게 적용하듯 똑같은 조세를 받을 것이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명백하게 우리 땅이니 말이다.
“남은 건 한가지군요.”
“관리지.”
“공주께서 중앙집권의 계책을 내셨습니다.”
“진행해야지. 당장 폐하께 왕명을 청해야겠지. 그러나 그 또한 시간이 필요하니 어찌 마냥 기다릴 수 있겠나.”
“바로 시행하자는 겁니까?”
“미흡하겠지. 그런데 해야지. 다 완비한 뒤 움직이는 건 곤란하네. 문제가 발생하고, 실수가 있더라도 추진해야 하는 것이네. 아니, 과거 시험을 치른 뒤 자격을 갖추더라도 같은 문제는 생길 것이니 당장 집행하는 게 옳아.”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 내일부터 고구려는 성 밖의 세상을 통치할 것이네. 백성도 성 밖에서 살게 될 것이니 말일세.”
“서둘러야지요.”
“유학자 출신의 농학자가 있네. 그들은 모두 요동을 보내서 경작지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기겠네.”
“녹봉도 적당하게 책정하겠습니다.”
시범적으로 관료제를 곧장 도입한다.
어떻게든 성과를 낸다면 고구려의 정치 체계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탄력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자고로 모든 개혁은 정치 체계에서 비롯하는 법이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수천 아니 수만의 백성이 성 밖에서 삶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난세였다.
“그 많은 백성은 불안할 것이네. 그러니 어찌해야겠는가. 귀족에게 일러 사병을 수시로 훈련하라고 하게. 백성이 보고 안전하다고 여길 수 있게 말일세.”
“물론입니다. 우리 백성은 늘 평안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조정에 책임져야 할 일이지요.”
요동의 개간은 이렇게 시작한다.
큰 틀은 모두 이뤄졌다.
“그런데 이대로 되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음. 문진을 출사시키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농법은 형님의 사가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아닙니다. 조정이 전 고구려를 상대로 강력하게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문진은 출사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고작 평양 도성 일대를 개간하는 것과 고구려 전역을 손보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니 말이다.
더욱이 내가 이 모든 걸 관장할 수도 없다. 그러면 전문적인 부서가 필요했다.
“어차피 농학자를 관리로 임명하여 요동에 보냅니다. 그들을 책임질 조정의 부서도 필요하지요.”
“그러하지. 이는 자네의 뜻대로 하게나.”
“농업부로 하겠습니다.”
명료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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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람은 참으로 드물었다.
어쩌면 고구려에서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드물었다. 바로 가서일의 눈동자를 실제로 본 사람이 그랬다. 그만큼 그의 눈동자는 가늘었다.
그런데 오늘 그의 눈동자가 만인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굉장한 크기였다. 정확하게는 남들과 비슷한 크기였다.
놀라운 장면을 봤기에 남들만큼 눈동자가 커진 게 아니다. 그의 입가에 환하게 걸린 미소를 보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외쳤다.
“문진!”
양팔을 벌리며 다시 외쳤다.
“나는 자네가 기어이 이뤄낼 수 있다고 여겼네. 한반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네.”
그는 벗, 이문진의 출사를
“진심으로 감축하네.”
진심으로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