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대개간의 시대(2) >
85화 대개간의 시대(2)
가서일의 기쁨에는 가식이 없었다.
비록 자신은 아직 식객에 불과한 처지였으나 진심으로 이문진의 출사를 축하했다.
그는 벗이기에 그러했다.
“관복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군.”
전통적인 고구려 귀족들은 관복과는 달랐다. 특유의 화려함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모르는 이가 보면 관복이라고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이는 개인적으로는 화려함과 사치를 선호하지 않는 이문진의 성품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체계화된 관복의 규정이 없는 고구려의 사정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가 되면 모든 관리가 자네와 같은 관복을 입어야겠지. 나는 오늘이 그 시작이라고 여기고 있네. 해서, 너무나도 훌륭하네.”
이문진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네. 자네의 축하가 그 무엇보다 기쁘네.”
벗을 두고 홀로 출사했기에 어찌 미안한 마음이 없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말하기에는 두 사람의 믿음과 우정이 너무나도 두터웠다.
“대형과 문덕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참으로 좋았을 것인데.”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머지않아 당도하실 것이네.”
“허. 그런가? 이런. 내가 세상 소식이 이렇게 느리다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역사에 길이 남을 그림 한 폭을 위해서 세상만사에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은 가서일이었다. 그러한데 온달과 을지문덕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최근 맡은 관개수로 역사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이문진은 벗의 말을 들으며 싱그럽게 웃었다.
“서일. 이제 일 이야기를 해볼까 하네.”
“이런. 쉴 틈도 주지 않는군.”
어느새 가서일의 눈동자는 다시 가느다랗게 변하며 본연의 자세를 갖췄다. 이를 본 이문진은 껄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와 내가 굳이 서론을 길게 가져갈 필요가 있겠는가.”
“끙······.”
“그래. 가축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네. 어찌할 생각인가?”
“돼지는 먹어야지.”
답변은 참으로 단호했다.
“나는 돼지를 볼 때마다 생각하네. ‘우리가 먹어야 할까? 너희가 먹어야 할까? 너희는 무슨 복을 타고나서 종일 먹고 싸기만 해도 칭찬을 들을까?’ 이것이었네. 그러니 먹어야 하네.”
익살스럽게 웃으며 농을 한 가서일이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 백성이 굶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네. 그러나 돼지를 사육하면서 인부와 백성이 돼지고기를 입에 넣으며 즐거워하는 걸 보고 말았네. 혹자는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데 돼지를 왜 먹이냐고 하고 있네. 어림도 없네. 우리 백성이라고 하여 허구한 날 풀이나 뜯어 먹어야 하나?”
“자네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네. 나 또한 그리 여기고 있네.”
“내가 최선을 다하여 돼지 사육에 전념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이유일세. 적어도 우리 고구려의 백성이라면 돼지고기가 질릴 만큼 먹을 수 있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네.”
투박한 말이었으나 담긴 의미는 참으로 깊었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 수밖에 없는 이문진은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먹어야지. 먹어야만 배가 고프지 않지. 그래야만 생존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으니까.”
지금도 늘 생각했다.
만일, 대형인 온달이 자신들의 생존을 책임지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적어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절대로 고구려와 대화를 나누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형께서 계셨기에 바라봤네. 그러나 셀 수도 없는 이들은 결국, 생존의 길에서 무너지지 않았는가. 그러니 먹여야 하는 걸세. 먹어야만 고구려가 더 나아갈 수 있는 걸세.”
이문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서일의 말에 동의했다. 무엇하나 틀린 내용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요동 개간이 중요하지 않겠나?”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참으로 대범하지 않나? 아니, 경천동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것이네. 거란과 고막해 그리고 말갈로 신라를 견제하고 우리는 요충지인 요동을 개간하다니 말일세.”
“암. 요동의 개간은 곧 동방의 고구려가 북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될 것이니 어찌 대단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 들어봐야겠군. 자네의 생각을.”
이문진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결국, 백성을 효과적으로 사민 하는 걸세.”
“그렇지. 막무가내로 사민을 추진했다가는 혼란만 가중될 것이네.”
“하여, 생각해봤네. 자발적인 사민은 어떠하겠는가.”
“그게 가능하겠는가? 누가 고향을 떠나려고 하겠는가?”
“우경을 지원해주면 가능하지 않겠나?”
“음. 그러면 많은 백성이 나설 것이네. 한데, 가능하겠나? 엄청난 비용이 필요할 것인데.”
사민에 응하였다고 하여 소를 준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고구려에 아무리 소가 많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정책을 그리 펼칠 수는 없네. 조정의 정책은 천금과도 같아야 하는데 무질서한 대가성은 바람직하지 않아.”
“그렇지. 한데, 내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
“무엇인가.”
“요동 지역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을 때 우마가 대략 14일~20일 정도 필요하네. 경작할 때만 사용할 뿐, 파종, 제초, 추수, 탈곡에는 굳이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
가서일은 눈을 더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 정도면 모든 백성이 소를 보유할 필요가 없지 않나?”
“바로 그것일세. 고작 14일~20일을 위해서 소를 1년 내내 먹인다는 건 백성에게 엄청난 부담이지.”
“그렇군. 조정에서 소를 사육하되 경작할 때 무상으로 빌려주면 되겠군.”
“바로 그것일세.”
이리한다면 모두가 웃을 수 있다.
“사민 정책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네. 민심은 동요하지 않을 것이고, 백성은 지원할 것이네. 누구도 부담가지지 않고 말일세.”
“큭. 참으로 좋은 생각일세. 아무리 빡빡한 왕 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용인하실 것이네. 만일, 이조차도 화를 내신다면 내가 기어이 그림으로 남길 것일세.”
“하하하! 그래야지! 응당 그래야 할 것이네.”
이문진은 가서일과 정책을 논의하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늘 나아갈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니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맑게 웃으며 계속하여 말을 꺼냈다.
“또한, 내가 연 대인께서 작성하신 문서를 세세하게 살폈네. 모든 지역에 대규모 관개시설을 만들 필요가 없었네.”
“음.”
가서일은 턱을 긁으며 이문진이 내미는 문서를 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내려갈수록 표정이 희한하게 변했다.
“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작은 하천의 물 흐름을 막는 보를 쌓는 수준의 관개시설이면 충분하다는 건 알겠네. 한데, 류조언? 이게 뭔가? 축조하는 방법 자체가 괴이하네만.”
“내가 요동의 사정을 분석하여 왕 대인께 여쭸더니 이르신 이색적인 방책이었네.”
“그러지 말고 세세하게 설명해보게. 그리고 이색적이라고 했나? 이미 심상치 않군.”
가서일은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지식에 대한 열망이 넘쳤기에 생소한 사안과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얼음이 떠다닐 정도로 차가운 물에 들어가서 말뚝을 받고 버드나무 가지를 깔아야 한다고 하셨네.”
“······왜 그래야 하나? 아니, 애초에 굳이 얼음까지 떠다녀야 하나? 대체 왜?”
“큭. 자네의 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네. 나도 같은 반응이었네.”
이문진은 왕고덕과 나눈 대화를 옮겼다.
-얼음물에 들어갔는가?
-······.
-아직도 안 들어갔나?
-······들어갔습니다. 춥군요. 아주.
-바람직한 자세일세. 기다려보게.
-······.
-일단 추위에 떤 다음에 돌이나 흙을 담은 가마니를 준비해야 하네.
-······아마도 들고 들어갔을 겁니다.
-다행이군. 어쨌든 그 가마니로 버드나무 가지를 눌러 하천을 막게.
-그게 됩니까······?
-안되면 찾아오게. 되도록 해줄 테니.
-······.
-그 뒤 수거로 하천의 물이 흘러 들어가게 하면 되는 것일세. 새겨야 할 것이네.
이문진의 말을 들은 가서일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리 이르셨나?”
“보태고 뺀 게 하나도 없네.”
“······.”
“나중에 자네가 다시 여쭤보게. 난 어쩔 수가 없었네.”
“······.”
분명 웃어야 하는데 웃음도 안 나왔다.
그래서인지 가서일의 표정은 무서우리만큼 굳어 있었다.
“둔전의 일은 어찌 되었나. 당초 목표는 3만이었는데 여전히 3천으로 답보상태가 아닌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네. 물론, 여전히 3천여 명이지만 어찌 한순간에 늘릴 수 있겠나. 천천히 규모를 늘려야지.”
“바로 그게 문제가 아니겠는가? 백성의 수가 한정적인데 3만의 대군을 새로 꾸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이미 30만의 대군을 운용하는 나라일세.”
가서일의 말대로 고작 300만의 나라에서 30만의 대군을 운용하고 있는 고구려였다. 여기에 새롭게 3만의 병력을 더한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문진도 동의하였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서일을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말했다면 분명 방책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실은 내가 꾸준히 돌아다니면서 살펴봤네. 어차피 넘치는 땅에 부족한 백성일세. 그러니 토지를 나눠줘도 무탈하지 않겠나? 귀족들이 시끄럽긴 할 건데 이는 왕 대인이 알아서 잘 처리하실 걸세.”
“토지를 분배하자는 건가?”
“못할 게 뭔가? 서토는 정전제를 했다는 기록이 있네.”
“음. 그건······.”
“문서로만 남아있지.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네. 물론, 친위대로 국한한 것이지만 말일세.”
“둔전으로는 백성을 모아낼 수 없으니 경작지를 나누는 것이라. 허. 이건 완벽한 병농일치로군.”
자영농이 곧 군인이 되는 것이다.
하늘 아래 가서일이 아니라면 누가 이를 생각이나 할까.
이문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좋아. 바로 추진해보겠네.”
“하하하! 참으로 기대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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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수백 마리가 논과 밭을 엉망으로 만들었었다. 신라는 이를 핑계로 고구려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막리지 왕고덕은 신라의 건국을 비웃는 무도한 행위를 했다. 결국, 신라 사신단은 문전박대나 당했다.
이때부터 신라는 고구려가 호전적인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했기에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오늘 한수에서 올라온 급보는 미처 예측하지 못한 심각함을 담고 있었다.
“고구려의 태왕이 친정을 했다고 하였소?”
“그러하옵니다. 대왕 폐하.”
신라왕 김백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폐하. 한수는 우리 신라의 생명줄이옵니다. 만일, 고구려에게 빼앗긴다면 후일을 도모하기 어렵사옵니다.”
상대등 노리부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물론이오. 반드시 사수해야 할 곳이지요. 그러나, 고구려의 태왕이 친정을 했다면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이외다. 지난번 고구려가 우리 사신을 도발하였기에 전쟁 준비를 꾸준히 하였으나 어찌 쉽사리 감당할 수 있겠소이까.”
“폐하. 설마 친정을 고려하시옵니까.”
“적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기세를 올리자면 내가 가는 게 옳소.”
노리부는 패기 넘치는 젊은 왕의 결심에 크게 감탄했다.
“당장 출병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