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운명(2) >
74화 운명(2)
평강공주는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옆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직 나아갈 뿐이었다.
“나의 혼례는 고구려에 대한 뜨거운 연모로 귀결될 겁니다.”
“······.”
“나를 막지 마세요. 아니, 막아서는 아니 될 겁니다.”
“······.”
“전하의 것이 될 고구려를 내가 연모하는 게 불쾌하다면 막으세요. 그러나 아니라면 그냥 두셔야 할 겁니다. 아니, 불쾌하더라도 눈을 돌리십시오. 가질 수도 없기에 손을 뻗지도 않을 건데, 마음조차 품지 말라는 건 나의 생명을 박탈하는 겁니다.”
“······.”
누구라도 이런 말을 듣는다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녀가 그토록 연모하는 고구려를 태어나면서부터 취하게 될 운명인 고대원이라면 더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대원은 괴로웠다.
누이의 마음이 이토록 거대할 줄은 미처 몰랐기에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죽을 만큼.
힘겹게 물었다.
“해서 어찌할 생각입니까.”
이는 그녀의 연모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오히려 담담한 눈으로 고대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맙지도, 불편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평양계 그리고 국내계. 고구려를 양분하고 있는 귀족.”
“······.”
“이 나라 고구려가 가장 힘겨워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대립입니다. 하여, 나는 새로운 세력을 고구려의 역사에 등장시킬 겁니다.”
“······.”
“그리하여 바칠 겁니다. 내가 영원히 연모할 고구려에게.”
새로운 세력이라고 했다.
평양 천도가 아니었다면 평양계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없었다. 이토록 새로운 세력이 고개를 든다는 건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평강공주는 이를 해내겠다고 선언했다.
“전하.”
“예.”
“나를 향한 불필요한 감정이나 생각은 거두시지요.”
“······.”
“나의 말에 동조하여 막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를 꺼내지 마셔야 합니다.”
“······.”
평강공주의 목울대로 무언가가 넘어갔다.
“내가 고구려를 탐할 수 없다면······.”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내가 고구려를 취할 수 없다면······.”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고구려의 한 축을 지탱이라도 할 겁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여잡고 버텨낼 겁니다.”
“······.”
“그리하여 바칠 겁니다. 새로운 제물을.”
그리고
“울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물기가 흘렀다.
“지탱할 수 있기에 행복하니 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담겼다.
“해서, 나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합니다. 기어이 해낼 것입니다. 이를 성사하지 못하면 나는 고구려를 연모조차 할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평강공주의 눈이 고대원을 담았다.
어느새 볼을 타고 내린 물기는 그녀의 입술에 이르렀다.
“이것이 연모입니다.”
“······.”
“누구도 막아서는 아니 될 겁니다. 아니, 막지 못할 겁니다.”
평강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그리고 말했다.
“운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운명을 밀어낼 겁니다. 한데, 내게도 허락된 운명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
“고구려의 공주로 태어난 것.”
둘.
“고구려를 연모하게 된 것.”
이것이었다.
“내게 허락된 연모가 아니기에 나는 해낼 것이며, 더 크고 뜨겁게 다가갈 것입니다.”
감정이 흔들렸을까?
평강공주는 복잡한 시선을 보이더니 홀린 듯 말했다.
“남들은 말합니다. 내가 남자였다면 하고요. 하하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는데요.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는 고대원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운명에 의하여 태자가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내게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평강공주는 이를 악물며 허공을 바라봤다.
그녀의 핏발 선 눈은 너무나도 가련하였다.
“부왕께 전하세요. 오늘 내가 한 말, 모두를.”
“······.”
“응당 내가 직접 전하는 게 옳지만, 용안을 보고 싶지 않군요.”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돌아올 겁니다. 고구려의 한 축을 들고. 그러니 기다리십시오. 아니, 지켜보십시오.”
이는
“내가 기어이 나의 대에 나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말입니다.”
선언이었고, 약조였으며, 연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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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놀라운 내용이었다.
평강공주의 가치관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운명을 개척한 수준이었다.
“그 뒤의 일은 막리지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저 감탄만 터져 나올 뿐이었다.
“누이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사람이지요. 운명이라는 말을 송두리째 뽑아낸 사람입니다. 고구려에 이와 같은 인생을 개척한 사람은 없습니다.”
평강공주, 그녀는 진정한 이 시대의 호걸(豪傑)이었고, 거인(巨人)이었다.
누가 감히 그녀의 발걸음을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러나 나는 아닙니다.”
고대원의 말이 시작됐다.
“나는 운명을 개척하지 않습니다. 거역하지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다면 그저 수용할 겁니다.”
이는 대체 무슨 말인가.
“막리지. 누이는 고구려의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고구려의 비상을 꿈꾸었다.
그리고 고구려와 비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나는 이 역시도 다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내 눈의 끝은 하늘이 아니라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루는 고구려의 땅으로 시작하며 땅으로 끝이 납니다.”
“고구려의 영토를 이르십니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땅을 바라보는 이유는 영토를 가늠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 백성의 두 발을 늘 살폈기에, 그들의 두 발이 닿는 땅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고대원이 평소 백성과 그토록 열성적으로 땀을 흘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는 오늘 기어이 알고 싶었다.
“하여, 내게 고구려는 석 자가 아니라 실은 한 글자에 불과합니다. 이는 땅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너무나도 직관적인 가치였기에 그러했다.
“땅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실질적입니다. 눈에 보이니 실체를 가늠할 수도 있습니다.”
“······.”
“누이는 고구려를 연모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닙니다. 나는 고구려가 아니라 땅을 걷는 백성의 땀과 숨소리를 연모합니다. 내게 고구려는 그들의 땅입니다. 내가 연모하는 이들이 거닐고 있는 땅, 바로 그것입니다.”
고대원의 연모는 평강공주와는 달랐다.
더 실체적이지만, 더 추상적이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늘 백성과 함께 있습니다. 동이 트면 안학궁을 나오고, 해가 저물면 안학궁을 돌아갑니다.”
후계자였다.
이를 준비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늘 안학궁 밖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고양성 역시 이를 만류하지는 않았다.
원하는 바를 할 수 있게 배려할 뿐이었다.
“내가 그들을 연모한다고 하여, 그들이 나를 연모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강요입니다. 하여, 바라지 않습니다. 아니,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내가 바라볼 수 있게 두 발로 이 땅 위에서 오랫동안 버티어 주기만 하면 될 일입니다.”
흐뭇하게 웃는 그의 눈동자가 나에게로 향했다.
“내게 고구려는 이러합니다. 일국의 태자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가볍지 않습니까.”
“백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걷고 계십니다. 어찌 감히 평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고구려의 태자입니다. 천하의 질서에 예민해야 하면, 귀족을 통합하여야 할 막중한 책무가 있습니다. 한데, 나는 이를 등한시하니 싫은 소리를 감내해야지요.”
“소인은 진실로 그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고대원의 길이 틀렸다면 그 어떤 위정자의 길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하의 길은 올곧고 원대한 것입니다. 부디 꺾이지 마십시오.”
“꺾일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흔들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떠한 외압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고대원의 목소리는 높거나 낮지 않았다.
복잡한 미사여구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했고, 직관적이었으며, 간단명료했다.
백성과 늘 대화하며 걸어왔기에 묻어나는 현상이었다.
“동방과 북방을 통합한다고 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여, 중원이라 부른다고 하였습니까.”
“예. 전하.”
만일, 평강공주가 고구려가 곧 중원이 되는 세상을 들었다면 무서울 정도로 열광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국세가 팽창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부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고대원은 마치 제삼자처럼 말했다.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는 시대입니다.”
낭만의 시대라고 했다.
“기어이 날아오르고자 뛰어가는 시대입니다.”
수나라를 짓밟고자 모든 걸 동원하는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고구려의 태자로서 뛰어가지 못하기에 날 수 없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심장이 묘하게 울렁였다.
“낭만을 즐기지 못하는 백성에게도 웃음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장이 격하게 떨려왔다.
“그러니 하늘을 바라보며 나아가세요. 땅은 내가 바라보겠습니다. 그곳에서 백성과 함께 걷겠습니다.”
고대원에게 있어서 고구려는 천년의 강국이 아니었다. 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백성이 살아온 터전이었다.
“일찍이 나는 다짐한 바가 있습니다.”
어느새 심장은 떨리거나 울렁이지 않았다.
설레듯 간지러워졌다.
“고구려가 천하제일의 강국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땅을 짓밟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는 진실로 그러했다.
그 누구도 고대원의 고구려를 범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백성이 천하에서 가장 부유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끼니를 거르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고대원의 하루는 백성이었다.
그는 백성의 굶주림과 늘 함께하여 해결하고자 했다. 이는 정사에 기록된 것이 아니지만 어제, 오늘 내가 보았고, 내일 보게 될 것이다.
“고구려의 백성이 늘 웃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정치가 그들을 울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고구려의 백성은 평강공주를 흠모한다.
그러나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녀가 나아가는 길의 양쪽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고대원을 만난 백성은 달랐다.
늘 호탕하게 웃었고, 눈을 마주했다.
고대원이 걷는 길은 백성이 가득했으며,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함께 걸었으며, 손을 잡고자 내밀었다.
그의 길은 진실로 이러했다.
“내가 원하는 고구려는 이렇습니다.”
그의 고구려는 하늘을 지탱하는 게 아니었다.
하늘이
“하늘이 고구려를 섬기도록 해야겠지요.”
고구려를 지탱하고 있었다.
“중원.”
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 가치가 이 땅의 풍요로 귀결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덧붙였다.
“백성의 풍요로움 말입니다.”
나는 오늘 알게 되었다.
고대원은 준비된 군주의 길을 홀로 조용히 걷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다시 깨달았다.
이러하기에 고대원이 수나라를 압살한 영양왕이었다는 걸.
바람에 날리듯 고대원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그러기에 고구려는 내게 운명이었습니다.”
고대원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뿌리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