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운명(1) >
73화 운명(1)
이를 당황했다고 해야 하나?
이러한 감정이 대략 백 가지 정도 나를 덮었다.
말문이 막혀서 멀뚱하게 쳐다보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의아함이 넘실거리는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고대원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고대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나의 누이를 알 겁니다.”
고대원은 다시 나의 허를 찌르는 평이한 말을 했다. 말문이 막혔으나 답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억지로 말을 꺼냈다.
“물론입니다. 고구려에서 공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한 답변이지만 참으로 걸작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집어넣고 새로 꺼내고 싶어질 정도였다.
물론, 고대원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누이지만 볼 때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놀랍고, 가슴이 벅차오르고, 존경스럽지요.”
그럴 만했다.
평강공주의 행보는 누군가의 존경과 흠모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고대원이 태자라고 하여, 그러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막상 대화가 이렇게 흐르자 문뜩 궁금해졌다.
명실상부 고구려의 차기 태왕인 고대원과 평강공주는 과연 어떤 사이일까?
정보가 부족한 내가 관계성을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강공주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관점에 따라서 고양성보다 더 대단한 부분도 많았다.
가끔 보고 있노라면 고구려사에도 ‘여왕’ 한 명 정도는 괜찮잖아?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고대원이 있는데 그리할 수는 없는 망상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고대원의 길이 곧 역사라는 걸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러한 정치적 관점 혹은 아니더라도 두 사람은 어떠한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혹시라도 고대원이 평강공주를 불편하게 여기는 게 아닐까?
백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부디 오늘 나의 의문이 해소되길 바라였다.
그냥.
문뜩.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지켜만 봤습니다.”
이는 또 대체 무슨 말일까?
고대원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의도와는 무관하게 의아함은 점차 쌓였다.
“누이의 결정을 지켜만 봤습니다. 응원하지도, 만류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지켜만 봤습니다.”
“······.”
“누이는 다른 왕족과는 달리 늘 판단이라는 걸 하였기에 계속 지켜만 봤습니다.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지요.”
“······.”
“그렇지 않습니까? 고구려에서 여인의 삶이란······아니, 귀족의 분열로 몸살을 앓던 나라에서 공주의 삶이란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여성의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를 따지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수천 명의 귀족이 도륙당했던 내전을 거치고 왕위에 오른 고양성의 왕권이 안정적일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국에서 공주의 존재는 정략의 일부에 속하며, 동맹을 체결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 된다.
어차피 공주는 태왕으로 즉위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가 평강공주에게 정해준 설정값이었다.
“그러하니 부왕께서는 평양계의 유력 가문 중 한 곳을 선택하려 하였지요. 하여, 왕권을 지탱할 수 있는 버팀목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누이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모두가 알고 있듯 설정값을 무너뜨렸다. 놀라울 정도로 과감한 방식으로 말이다.
“늘 지켜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혼례의 일은 과거 누이가 부왕과 다퉜던 것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설득하거나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말입니다.”
“답변이 어떠했습니까.”
고대원은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누이는 내게 말하였지요.”
내게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남매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영양왕과 평강공주의 이야기 말이다.
*****
고대원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또, 이토록 무모하게 행동하는 평강공주가 너무나도 답답했다.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쩌려고 이리합니까. 혼례가 아닙니까. 전의 일들과는 다릅니다. 그러한데 부왕의 뜻과 정면으로 거스르겠다니요.”
“하. 하면, 나더러 부왕께서 정하시는 ‘아무나’와 혼례를 치르라는 겁니까? 아무리 사람이 아니라 가문과 혼례를 치르고 함께 하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전하께서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사사롭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거늘 어찌 이리도 박하더냐? 전하께서는 참으로 너무합니다.”
평강공주는 존대와 하대를 섞어가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다. 물론, 전혀 문제가 될 행동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고대원 역시 누이의 이런 면을 좋아할 뿐, 탓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누이에게는 복잡한 격식이나 예법을 따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면, 대체 어쩌려는 겁니까. 계획이라도 알려주면 안 되겠습니까.”
“어쩌긴 뭘 어쩌냐는 겁니까. 야멸찬 부왕께서 기어이 나를 팔아넘기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응당 싸워야지요. 나는 지는 싸움은 안 합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팔아넘기다니요······.”
“아니, 너는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것이냐. 전하께서 진정 내게 이러실 겁니까?”
“편을 드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치? 그래. 내가 그 이치대로 하려는 겁니다.”
이치에 대해서 말하겠다던 평강공주는 무언가 차올랐는지 화를 내뱉었다.
“아니, 애초에 딸을 팔아넘기는 행동이 이치라고 보는 겁니까?”
“······화를 누그러뜨리십시오.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내가 백번은 말했습니다. 이 혼례는 무효라고 말입니다. 한데, 부왕께서는 아예 듣지를 않아요. 팔아서 얻는 이익만 계산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값만 바라보는 데 이게 파는 게 아니면 무엇입니까. 이러하니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늘 그랬지만 평강공주의 언변은 거침이 없었다.
행여 부왕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고대원은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아니구나. 누이가 언제 부왕께 졌다고.’
되돌아보면 싸움은 늘 부왕의 패배였다.
“알겠습니다. 한데, 이치를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미 이치가 없는 싸움입니다. 하. 고구려의 공주라고 하여 물건 넘기듯이 하려는 부왕과 싸우는 데 무슨 이치를 논하겠습니까. 나는 강수를 둘 겁니다.”
“······.”
“어차피 나는 정해진 운명 따위를 그냥 수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세상 만물을 인식한 이후 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
그녀는 늘 결정하는 삶을 살았다.
한 번도 결정된 무언가를 따르지 않았다.
고구려의 공주로서 이는 참으로 어렵고 괴이한 일이었다.
“하면, 어찌 싸우실 겁니까. 설마, 또 굶기라도 하려는 겁니까? 부디 그러지는 마세요. 보는 동생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갑니다.”
“굶기는 왜 굶습니까? 이 싸움은 길게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니 매끼 잘 챙겨 먹을 겁니다.”
평강공주는 기어이 이기겠다는 독기까지 보였다.
그리고 고대원은 이미 싸움은 확정적이라는 걸 깨달았기에 누이가 그나마 굶지는 않겠다는 말에나 안도했다.
“잘 먹으면서 싸워야지요. 그래요. 어찌할 건지 일러주겠습니까?”
“좋습니다. 전하가 부왕께 잘 전해주세요. 나는 내가 직접 찾을 겁니다. 나와 혼례를 치를 사람을 말입니다.”
“나쁘지 않군요. 아니, 괜찮은 방법입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부왕의 결정과는 다소 어긋날지라도 어차피 고구려의 대귀족과 혼례를 치를 것이다. 애초 왕족과 결혼할 수 있는 가문 자체가 많지도 않았다.
‘다행이구나. 그저 부왕의 결정을 따르는 걸 싫어하는 수준으로 반발하는 것이다. 부왕께서도 이 정도는 양보하실 것이니까.’
그런데
“나는 분명 말했습니다. 정해진 운명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요. 그러니 그 운명과 만날만한 가문과는 혼례를 치르지 않을 겁니다.”
이상한 말이 들렸다.
고대원은 눈을 껌뻑이며 쳐다봤다.
“무슨 말씀입니까······?”
“전하.”
평강공주는 숨을 크게 마셨다.
그러더니 대뜸 그녀의 눈이 먹먹해졌다. 이내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시선을 옮기지 않고 한 마디씩, 천천히 꺼냈다.
“이미 나는 연모하고 있거늘 어찌 이를 부인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이미 마음에 품은 이가 있다는 겁니까.”
“······이치라고 하셨습니까? 이를 물으셨지요?”
대뜸 그녀는 딱딱할 정도로 경어를 사용했다. 고대원은 내심 당황했다. 게다가 반문의 흐름도 이상했다.
“그래요. 이치. 전하께서는 장차 이 나라 고구려의 태왕이 되실 분입니다. 하면, 묻겠습니다. 이 나라 고구려에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여기십니까?”
“······.”
“어찌하여 답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어찌 이러십니까.”
“이치를 묻기에 이치를 답하는 겁니다. 나라의 이치, 사람의 이치. 이 두 가지를 모두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요. 이미 물으셨으니 답하지요. 마음에 품은 이가 있느냐고 하셨습니까?”
고대원의 바라보는 평강공주의 눈동자는 참으로 구슬펐고, 미소는 가련하였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그녀의 모습, 세상 그 무엇도 이처럼 아련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원은 마음이 쓰렸다.
그런데
“나는 사람을 연모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답변은 보편적인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 나라 고구려를 연모합니다. 온몸으로. 뜨겁게. 그리고 진심으로.”
“······.”
“예. 압니다. 아무리 연모할지라도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입니까? 세상 모든 이가 내게 연모를 멈추라고 합니다. 가질 수 없으니 그냥 두라고 합니다. 부왕께서도 그리고 전하께서도요.”
딱딱하였으나 절절했다.
이렇게 그녀의 말이 고대원의 심장을 찌르고 흔들었다.
그리고 평강공주의 얼굴은
“연모.”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또, 그리고
“연모.”
목소리도 일그러졌다.
“내가 이 나라 고구려를 연모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뤄질 수 없다는 걸 말입니다. 아무리 갈망해도 얻을 수 없기에 실패하게 될 감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연모는 스쳐 지나간다고. 그러니 잊을 수 있다고. 그저 그러한 것이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일그러지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도 다시 원래대로였다.
그러나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머나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연모한 대상이 이토록 위대하고 압도적인데 어찌 잊겠습니까. 눈을 감아도 보였으며, 눈을 뜨면 안고 싶었습니다.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았고, 걸으면 느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
“실패가 확정적인 연모였습니다. 그러나 연모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여, 내게 연모는 바라보며, 기다리며, 갈망하는 게 아닙니다.”
“······.”
“그저 내가 연모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면 되는 것입니다.”
대체 누가 알아줄 것인가.
“고구려가.”
그녀의 연모는 이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