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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62화 (62/199)

62화 또 다른 전설의 준비(1)

62화 또 다른 전설의 준비(1)

노기로 가득한 의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 자네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인가!”

그의 노여움에 노출된 이들은 바로 학문에 충실하지 않은 유생들이었다. 의연은 분명 승려였으나 부처님의 자애로움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으로 유생들을 쥐잡듯이 잡았다.

“대사. 소생들은······.”

“스승님.”

“음. 예. 스승님. 소생들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서책을 탐독하지 않습니까. 한데, 허구한 날 화를 내시니 소생들은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답하도다. 이보다 답답할 수가 없도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께서도 한숨을 쉬실 정도일세. 대체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의연은 합장까지 하며 탄식했다.

관세음보살까지 소환하는 상황이니 유생들은 머쓱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께서는 늘 기회를 내리시기에 불자로서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하여, 묻겠네. 자네들은 교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유학자가 백성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까.”

“잘 아는군. 시작은 나쁘지 않아.”

의연은 그나마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물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약탈은 왜 해야 하나?”

“허. 약탈은 우리 고구려의 위대한 전통이며, 낭만 그 자체이니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어찌 이유를 따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 들었나?”

“무엇을 말입니까.”

“관세음보살께서 한숨을 쉬는 걸 들었냐는 말일세.”

“······.”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네.”

의연은 한숨만 연달아 십수 번을 내 쉬었다.

유생들은 눈만 껌뻑이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냉큼 물었다.

“하면, 소생들의 말이 틀렸습니까? 약탈은 우리의 고유한 전통입니다.”

“허. 틀리지 않았다고 하면 교화의 논리로 무장할 수 있나? 하면, 전쟁은 어찌하나? 이기면 되는 거 아닌가?”

“······.”

“자네들의 답변이 이 말과 뭐가 다른가? 고작 이런 수준으로 어찌 교화라는 중대사를 수행할 수 있는가? 듣던 백성들 다 도망갈 것이네.”

“그게······.”

“갈!”

의연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합장했다.

“관세음보살께서 화를 내셨으나 이내 웃으셨네.”

“······.”

“어지간하면 화를 내시지 않거늘 오죽 답답하셨으면 이리하셨을까.”

“······한데, 스승님은 어찌하여 관세음보살을 찾으십니까? 부처님이 아니라.”

“어찌 이토록 예와 법도를 모르는가! 하면, 부처님께서 공도나 맹도와 겸상하셔야 하나?”

“이런. 질문 자체가 어리석었습니다.”

“늦게나마 깨달았다니 다행일세.”

의연은 합장을 거두며 유생들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가르침을 향한 열의가 가득했다.

“고구려의 땅은 참으로 넓지. 한데, 백성의 수가 부족하여 그 많은 땅을 경작하지 못하였네. 하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일할 사람을 구해와야지요.”

“바로 그것일세! 하여, 우리는 약탈하는 것일세. 백성이 들으면 어찌하겠는가!”

“감탄하며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교화에 성공해낸 것이지요.”

“이제 말이 통하는군.”

바야흐로 훈풍이 불었다.

너도 웃고, 나도 웃는 그런 분위기였다.

물론, 길지는 않았다.

“한데, 스승님의 말씀은 이치에 어긋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냥 다 약탈하면 되는 데 굳이 왜 농사를 지어야 합니까? 실은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인 의문이지요.”

“갈!”

“······.”

“관세음보살께서 전하라 하셨네. 참으로 답답하다고 말일세.”

의연은 핏대까지 세우며 말을 이었다.

“어찌 이렇게 하나도 모르고 열은 쳐다도 못 보는 수준이란 말인가.”

“······.”

눈을 부라리는 그의 승복이 유독 펄럭였다.

희한한 건 그게 또 보기 좋았기에 유생들은 멀뚱멀뚱 쳐다봤다.

“하늘 아래 약탈의 고귀한 가치를 잘 구현하는 나라가 어디인가?”

“무조건 우리 고구려지요.”

“암. 고구려야말로 약탈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네. 한데 말일세. 이토록 숭고한 가치를 가진 약탈이라는 건 독점하고자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그렇습니다. 너도나도 다 따라 하는 중이지요.”

역시 이 분야에 대한 이해도는 뛰어났다.

의연은 내심 만족하며 말을 이었다.

“옳은 말일세. 하여, 천하에는 약탈 후발주자들이 참으로 많다네. 이는 참으로 기특한 일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엽적인 약탈이 천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고구려의 약탈이 가지는 낭만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허. 지금 뭐 하나?”

“갑자기 또 왜 그러십니까?”

다시 눈을 부라리는 의연을 바라보던 유생들은 흐린 눈을 뜨며 쳐다봤다.

양측의 시선이 허공에서 첨예하게 대립했으나 의연의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내가 아니, 관세음보살께서 우리 고구려와 후발주자들을 비교라도 하셨다는 건가?”

“음. 그건 아니지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그렇지. 지금 비교가 아니라 후발주자를 거느리는 고구려의 위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세. 이는 참으로 중요한 것일세.”

“그 말씀은······?”

“당연히 우리가 그들을 거둬야 하는 걸세. 이리하자면 고구려의 물산이 천하에서 가장 풍족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천하에서 가장 풍요로운 고구려.

이를 상상했을까?

어느새 환희에 찬 의연의 낭랑한 목소리가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

“무릇, 약탈의 종주국이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란 적들이 봤을 때 약탈할 물자가 천하에서 가장 많다는 걸세. 이는 바로 풍요로움일지니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는가.”

“마치 부자들이 더 욕심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군요.”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대충 뜻은 통하니 고개를 끄덕여보겠네.”

“하하하! 소생이 이 정도입니다.”

그러나 의연은 이내 정색하며 승복을 펄럭였다.

이번에도 희한하게 그 모습이 참으로 잘 어울렸다.

“어디 이뿐인가? 고구려가 생산하는 곡식의 풍요로움은 백성을 기쁘게 할 것이네. 오늘 100명이 말을 타면, 내일은 1,000명이 말을 타게 할 것이란 말일세. 한데, 자네들은 농사를 등한시하는 것이니 어찌 이기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큰 즐거움을 독식하려는 마음이니 말일세. 참으로 못됐군.”

“허. 스승님. 소생들이 많이 배우지 못하였을 뿐 이기적이지는 않습니다. 어찌 그토록 탓만 하십니까.”

“흥! 내 말을 들어보게!”

“좋습니다. 경청해보지요.”

유생들은 자신만만했다.

지금껏 이기적으로 살아온 적은 없었기에 당당한 것이었다.

“농사를 경시하는 풍조의 끝은 무엇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당당하군. 잘 듣게. 농사지어 조세가 많아지는 오직 태왕 폐하를 위함인데, 자네들은 이를 경시한 걸세. 참으로 불충하군.”

“아니, 그런 말씀은 없었습니다.”

“하면, 오늘부터 익혀야지. 현실이 이러한데 자네들이 학문을 익히는 걸 경시하면 어찌 되겠는가?”

의연의 일갈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무릇 약탈의 종주국으로서 준비 태세를 확실하게 갖춰야 하네. 물론, 자네들이 후발주자의 무사들보다 더 잘 싸우리라고는 생각하네. 이건 당연한 현상이니 말일세.”

이는 반론이 필요 없는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찌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달라야 하네. 그들은 그저 생존을 위하여 약탈하지만, 우리는 지고한 신념이 있다는 걸세. 그들에게 이를 설명할 수준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느새 유생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의연은 크게 한탄하며 말했다.

“대체 내가 언제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줘야 하는가.”

“아니, 스승님. 유학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내 말이 어렵나?”

“아닙니다. 스승님이 아니라 공도와 맹도가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하. 심지어 지독하게 말을 꼬아서 미치겠습니다. 소생들이 따로 더 익혀보려고 삼삼오오 모여서 책을 봤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허.”

“아무리 상의해도 스승님의 말씀과 연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제자들이 현실의 어려움을 토로하자 의연은 길게 한숨을 쉬며 안타까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어찌 이토록 마음 아픈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차분하게 하나씩 설명하기로 했다.

“아직 사정이 어려워 내 ‘말씀’을 서책으로 엮어내지 못하였다. 이는 조기에 해결하겠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이니라.”

“아닙니다. 애초에 공도나 맹도도 스승님처럼 쉽게 풀어내면 될 것인데 그러하지 못한 겁니다. 이는 역량의 문제입니다.”

“허.”

뒤늦게 알게 된 유생들의 놀라운 학구열에 의연은 크게 감탄했다.

아니, 진심으로 감동했다.

아니······스승을 하늘처럼 여기는 마음에 기뻤다.

하마터면 당장 달려가 끌어안을 뻔했다.

그러나 불자로서 몸가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 내가 시원하게 일러줄 것이니라.”

“맹도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유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네들이 본 건 무엇이며 어찌하여 그러한가?”

유생들은 생각할수록 불쾌하다는 듯 고개까지 저으며 말했다.

“역성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역성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왕이 왕 같지 않으면 치워버리는 말이 아닙니까. 한데, 어찌 그런 미친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답답하도다. 왕을 왜 치우라고 하였던가?”

“하늘의 뜻, 천명을 어겼으니 치워버리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것일세.”

의연은 흡족하게 웃었다.

학구열을 보이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스승의 마음은 늘 뿌듯하고 기쁜 것이었다.

“모두 알고 있듯 맹도는 서토의 사람이다. 저들이 군주를 뭐라고 부르던가.”

“황제라고 하지요.”

“그렇지. 결국, 황제가 황제 같지 않으면 치워버리는 것이니라. 하면, 대관절 이를 누가 치우는가? 바로 하늘의 뜻이라고 하였다. 하면, 하늘은 어디인가? 묻겠다. 태양은 어디에서 뜨는가?!”

“응당 동쪽에서······아니? 그렇다면······?”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유생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바로 그러하다!. 황제가 황제 같지 않으면 우리 고구려의 태왕 폐하께서 위력을 내리시어 갈아 치우시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천명이며 역성의 본질이니라.”

드디어 천명의 뜻이 밝혀졌고, 역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유생들은 크게 감탄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속이 시원합니다. 아니, 한데, 맹도는 뭐 하러 이토록 쉬운 걸 그렇게 어렵게 꼬아서 말을 한 겁니까? 도통 그 음흉한 속을 모르겠습니다.”

“내가 서토에서 몇 년 살아봐서 잘 알고 있네. 그게 서토인들의 특징이 아니던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네. 저들은 늘 유식한 척을 하느라 서론이 길었다네. 그래서 싸움도 못 하는 걸세.”

의연은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는지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하긴. 그렇긴 하지요. 서토놈들이 할 줄 아는 건 머릿수로 밀고 나오는 것밖에 없지요.”

“암. 그러나 그렇게 많은 이들 중에서 나보다 유학에 탁월한 사람은 없네.”

“그렇습니다. 하늘 아래 이토록 쉽게 풀어내실 수 있는 분은 스승님이 유일할 겁니다.”

“그런데도 따로 익히라는 건 그래야만 질의응답이 되기 때문일세. 내 말을 새기게.”

점차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의연과 유생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간헐적으로 웃음도 터져 나왔다.

“새기게. 우리 고구려의 유생은 다 잘해야 하네. 서토의 유생들이 하는 거라고는 앉아서 떠드는 게 전부지만 우리는 아니지 않은가. 훗날 언제고 서토의 유생과 학문을 겨루게 될 것이네. 이때 어찌할 것인가.”

“하하하. 시원하게 문답해야지요. 그리고 가운데는 칼도 둬야겠지요.”

자신만만한 웃음이 담긴 답변이었다.

누가 감히 이 자신감을 틀렸다고 하겠는가.

“참으로 옳은 말일세. 질의에 먼저 답하는 이가 칼을 잡는 것일세.”

“하하하! 나약한 서토의 유생들은 앉기도 전에 오줌을 지릴 겁니다.”

“보나 마나 그러할 것이네. 그런데 우리가 칼을 잡지도 못하면 어찌할 것인가? 오줌싸개한테 패할 것인가?”

“그건 곤란하지요. 그렇다고 답하지 않았는데 칼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정당하니 말입니다.”

자고로 개인의 승부는 정직해야 한다.

이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하면, 어찌해야겠는가?”

“목숨을 걸고 익혀야겠군요.”

“자네들은 참으로 탁월하군. 과연 내 제자일세.”

의연은 환하게 웃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관세음보살께서 참으로 노고가 많으십니다. 소승은 오늘도 크게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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