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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44화 (44/199)

44화 특권

44화 특권

고구려에 르네상스가 개막될지라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내실이었다. 만일, 고구려의 내정이 전과 같다면 우리는 대륙의 지각 변동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럴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고구려에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수나라와 돌궐을 상대로 한 치열한 외교전이 끝났을 때 우리는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성적표를 가져온 연자유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귀에만 걸린 게 아니라 조만간 승천할 것만 같았다.

괜히 이러는 게 아니었다.

“형님. 패서의 신 경작지로 징수한 조세가 무려 10만 석에 이릅니다. 이것이야말로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농법의 집행 이후 첫 성과가 나온 것인데 대동강 개발로 조정이 확보한 조세가 10만 석이라고 했다. 비단으로 징수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올해는 어차피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된 것도 아니라서 곡식으로 처리했다.

어쨌거나 10만 석이 적은 건 아니지만, 무언가 아쉬웠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음. 나쁘지 않군.”

“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이건 엄청난 성과입니다. 10만 석이면 10만 대군을 5~6달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애초 고구려에는 없던 수확이 아닙니까.”

맞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원래 없던 걸 만들어낸 겁니다. 게다가 경작은 더 확대될 것이니 1년 뒤, 2년 뒤의 고구려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게다가 기존 귀족들의 토지에서도 전보다 3할 이상의 성과가 났습니다. 이건 엄청난 일입니다.”

그래. 맞다.

자고로 농업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갑자기 백만 석, 천만 석을 만들어내는 마법이 아니었다. 올해 1만 석을 남기면, 내년에는 2만 석, 그 뒤로는 3만 석, 4만 석······이렇게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초보적인 수준의 시비법으로 이런 성과를 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수도 없는데 내가 너무 욕심을 낸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일전에 말한 일은 어찌 되었나?”

“그러지 않아도 파악했습니다.”

연자유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문서를 슬며시 내밀었다.

힐끗 봤는데 글자가 빼곡했고, 지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황해도 일대의 경작지와 경작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모든 지역을 세밀하게 분석해온 것이다. 매번 느끼지만 연자유는 정말 유능한 사람이었다. 싱긋 웃으면서 한 글자씩 차분하게 읽었다.

볼수록 완벽했다.

최초 시비법을 도입할 때 사실상 일체형 사료로 진행했다.

무릇 사료라는 건 땅의 성질에 따라서 성과가 달리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중국에서 동네마다 다른 방식을 기록한 농서가 툭툭 튀어나온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 고구려도 이제는 지역형 맞춤 비료를 사용할 때가 됐다.

고작 1년 만에 성과가 도출되었다는 대명제만으로 이를 시행하는 건 아니었다. 전통의 집행이 선언되었고, 르네상스를 열어내기 위한 열의가 고구려 전역을 뒤덮고 있다. 이럴 때 무엇보다 내정이 튼튼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세분화한 귀찮고 고단한 농법을 모두 잘 수용할 것이다.

나는 문서를 살피며 말했다.

“문진. 식사는 끝내셨나?”

“이제 막 끝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지필묵을 챙기지요.”

요즘 바빠서 굶고 다니는 이문진이었기에 종종 불러서 밥도 먹였다.

그리고 연자유와 이문진의 길은 다소 달랐다.

연자유가 국정을 총괄하며 정책을 수립한다면, 이문진은 농법을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니 연자유가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농사를 지으러 가야 하는 건 이문진이었다.

“그러면 이제 내가 밥을 먹지요. 미리 말하는데 인분 이야기하면 진짜 가만 안 둘 겁니다.”

“하하하! 알겠네. 편히 먹게.”

“한 번 더 믿어보겠습니다.”

연자유는 나와 이문진을 흘겨보더니 상추 쌈을 싸기 시작했다.

“대인. 준비됐습니다.”

“새기게. 한성 일대의 밭은 똥재와 외양간 거름 및 풀을 사용해야 할 것이네. 논은 우분, 똥재 및 부숙한 풀 따위로 시비하게. 그리고······.”

문서와 지도를 비교하며 손가락을 옮겼다.

“내미홀군(황해도 해주)이군요.”

“그렇지. 이곳은 흙을 말린 후 풀과 함께 태운 소토와 우분과 재를 섞어 시비하게.”

“예. 그리고 소생이 들어보니 벼를 직파할 때 약간의 똥재를 곁들인 곳이 있었습니다.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건······.”

“거! 진짜! 똥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심각하게 토론 중인데 연자유가 또 화를 냈다.

슬쩍 봤는데 돼지고기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먹을 거 다 먹고 화를 낸 것인데, 이건 우리의 똥 이야기가 들을 만하다는 걸 입증하는 사례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러니까

“똥재와 함께 직파하는 건 개인 취향일세.”

무시하기로 했다.

“개인 취향이라면 효과를 알 수 없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런데 기어이 이리하는 사람은 해야 하는 걸세. 농사짓는 사람의 고집은 대단한 것이니까. 물론, 농사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하는 건 제어해야지만, 이 경우는 그냥 두게.”

“하! 나는 가겠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겁니다.”

“잘 가게.”

연자유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문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데, 대인. 소생이 유심히 살펴보니 농법도 중요하지만, 치수 사업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역사를 일으킬 수는 없네.”

다시 언급하지만 지금 고구려는 장안 도성을 축조하고 있다. 이때 저수지나 제방 따위를 축조하자고 역사를 일으키는 건 너무 무리수였다.

“소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곳이 빗물에만 의지하여 농사를 짓는 게 현실이니 말입니다. 또한, 이미 언급하신 내미홀군만 해도 하류는 범람이 과합니다. 그러니 귀족이 작은 규모라도 진행하면 형편이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음.”

맞는 말이긴 하다.

농사에서 제일 중요한 건 농법이 아니라 하늘의 변덕이니 말이다.

바로 이런 논의를 대비하여 이 자리에 연자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재빠르게 붙잡았다.

“나는 자네가 꼭 함께해주길 바라네.”

“똥이나 드십시오.”

“자네는 왜 이렇게 옹졸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하!”

연자유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무리 화가 나도 일은 해야 하는 법이다.

“됐네. 소규모로 관개 시설을 축조해보려고 하는데,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겠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다시 인력을 동원해서 하천의 흐름 따위를 파악하라는 겁니까?”

“정확하네. 역시 자네는 탁월하군.”

“······왜 일을 두 번 하게 합니까? 동시에 알아 올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자네가 더 신경 썼다면 알아서 파악해왔겠지. 아니, 사람이 왜 이렇게 수동적인가? 국운을 걸고 추진하는 농업이거늘 조금이라도 능동적일 수는 없나?”

“뭐, 뭐요?”

“이미 폐하께서 수나라 사신에게 ‘요동에 오면 오직 죽음뿐이다!’라고 일갈하셨네. 한데, 신하들은 이렇게 수동적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아니, 요동에서 수나라군과 싸울 때 ‘죽여도 될까?’ 이렇게 물어볼 건가? 제발 좀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하!”

결국, 연자유는 자리를 떠났다.

사람이 갈수록 화가 많아지는 거 같다.

“알아서 준비해올 것이네. 하지만, 명심하게. 왕명으로 진행하는 역사는 불가능하네.”

“물론입니다. 그저 고을마다 적당한 수준으로 준비해야지요. 또한, 현재 고구려의 농업 실태를 고려할 때 이 정도면 해도 충분합니다. 그나저나 참으로 놀랍습니다. 연 대인이 다혈질이긴 한데, 이를 이렇게 잘 활용하는 분은 대인이 유일하실 겁니다.”

“다혈질인데 인정을 안 해서 문제지. 자신은 냉정하다고 생각하니 말일세. 참으로 놀랍지 않나?”

“하하하. 연 대인을 제외한 모든 이가 달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연자유는 생각보다 다혈질이었다.

장담하는데 그의 후손 중 누군가는 한국사 최고의 다혈질일지도 모른다.

누가 태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도 이토록 풍년인데, 농법의 세분화가 집행되고 관개 수로가 확충된다면 내년은 더 기대해볼 만하겠군요.”

“덩실덩실 춤을 출 일만 남은 것일세.”

점차 풍요로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남쪽으로 돼지 500마리를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아. 풍년은 고구려만의 특권일세. 그래서 며칠 굶긴 돼지로 특별히 엄선했다네.”

“하하하! 참으로 낭만적이십니다.”

“암. 이것이 낭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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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이었다.

추수하는 농부들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매년 올해만 같으면 좋겠군.”

“암. 이 정도면 귀족들에게 바치더라도 1년은 거뜬하게 버틸 수 있을 것이네.”

주고받는 말에는 기쁨과 환희가 가득했다.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은 분위기를 참으로 흥겹게 만들었다.

“아이고.”

한 명이 허리를 펴면서 땀을 닦았다.

그런데 초승달처럼 휘어진 그의 눈동자에 무언가 이상한 게 보였다.

“응······?”

멀찍이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익히 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니까

“돼지······?”

돼지였다.

“왜 그러나?”

“아니, 저기······.”

“응? 어?”

동시에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돼지가 달려오고 울림이 정확하게 들렸다.

십 수명의 농부들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들 눈을 껌뻑이며 쳐다만 봤다.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돼지는 돼지였는데 수가 너무 많았다.

멀찍이서 대충 보더라도 열 마리는 되었다.

“이게 무슨······.”

“아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점차 거리는 좁혀졌다.

“······.”

“······.”

“······.”

어느새 지척에 이르렀다.

농부들은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막지. 내가 돼지를 키워봤네. 저놈들은······억!”

나서던 농부 한 명을 돼지가 들이박았다.

그는 사망했다.

이를 지켜보던 농부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래도 아직은 해볼 만했다.

“아니! 이 새끼들은 어디 돼지인데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비키게! 내가 왕년에 돼지를 잡아봤네.”

한 명이 다시 나섰는데

“으악!”

죽었다.

농부들은 또 대경실색했다.

“무, 무슨 돼지가 이렇게 사나워?!”

그새 돼지들이 곡식을 미친 듯이 먹기 시작했다.

“마, 막아!”

“돼지가 괜히 돼지겠나?! 막아야 해!”

“다 먹어 치울 거야!”

다들 돼지들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지축을 흔드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고개가 움직였다.

“······.”

“······.”

“······.”

“······.”

말문이 막혔다.

저 멀리 수백 마리의 돼지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쾌애애애애액!

-쾌애애애애액!

-쾌애애애애액!

진짜 돼지 멱따는 소리가 지천을 울렸다.

돼지가 달리며 발생하는 울림은 그냥 묻혀버릴 수준이었다.

아연실색한 농부들은 뒷걸음칠 쳤다.

다 떠나서 십 수명의 농부가 수백 마리의 돼지를 어찌할 방법이라는 건 적어도 ‘신라’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돼지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쾌애애애애액!

-쾌애애애애액!

-쾌애애애애액!

어느새 바로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를 무시하며 죽을힘을 다하여 달렸다.

지금은 일단 살아야 했다.

신라인들이 모두 떠난 경작지에는 500여 마리의 돼지가 굉음을 내며 미친 듯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다 먹어 치운 거 같은데?”

“가야겠지. 신라군이 올 수도 있으니까.”

고구려 인부들이 대화를 나눴다.

“근데 그냥 싸우면 안 되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신라 놈들이 아무리 허약해도 100명만 몰려와도 우리가 어찌하긴 어려우니까.”

“하긴. 한 손으로 열손을 감당하기는 어렵지.”

아쉬움이 가득한 대화를 끝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 이 새끼. 돌아가자니까?”

아직 먹느라 버티던 돼지 몇 마리를 향해서 눈을 부라리며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돼지들은 멈칫하더니 인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쾌애애애애액!

-쾌애애애애액!

-쾌애애애애액!

미친 듯이 회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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