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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43화 (43/199)

43화 르네상스

43화 르네상스

백 번을 생각해봐도 치열한 심리 싸움과 완벽한 정세 분석을 주고받은 외교전이라고 자평할 수 있었다. 이렇듯 힘겨웠던 대수 외교는 수나라 사신단이 동이 튼 직후 인사도 없이 도주하면서 마무리됐다.

아니,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가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인지 모르겠다. 정말 무례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하긴, 원 역사에서도 저놈들은 을지문덕한테 인사도 안 하고 도망치긴 했던 거 같다.

어쨌거나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남은 돌궐은 남았으니 마무리해야 했다. 언제까지 술만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신을 기다렸사옵니까.”

고식이 분석을 마무리했다.

재차 언급하지만, 돌궐 사신단이 평양 도성에 당도한 이후 마셔라 죽어라 하고 있었다. 이를 고려할 때 정말로 숨이 넘어가게 하는 극악한 일 처리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나를 비롯해서 모두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그시 쳐다봤으나 고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의 시선이나 돌아가는 사정은 모르겠고, 자료를 정리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실로 두려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돌궐은 강성한 군사력을 앞세워 북제와 북주가 공존하던 시절 막대한 양의 세폐를 확보하였사옵니다.”

“세폐라.”

“그러하옵니다. 특히, 북주는 매년 비단 10만 단을 세폐를 바치며 우호 관계를 이루고자 노력했사옵니다.”

깜짝 놀라버렸다.

비단 10만 단이라면 어지간한 나라의 국고 수준이었다.

북중국에서 돌궐이라고 하면 치를 떨만한 규모였다.

사실 이 시절 동아시아의 4강이라고 한다면 북중국, 남중국, 돌궐 그리고 고구려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중 객관적으로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진 세력은 적어도 아직은 돌궐이었다.

“그들의 약탈은 본국의 전통보다 질적으로 부족함이 많사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안정적인 세폐에 집착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하온데, 북주가 북제를 무너뜨리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었사옵니다. 신이 면밀하게 파악했사온데······.”

나름대로 일목요연한 정세 분석이 이어졌다.

축약하면 북주가 북중국을 통일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돌궐은 북제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고보령을 지원했다.

이후 대대적인 북주 원정을 준비했으나 돌궐의 타발가한(타스파르 카간)이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됐다. 그리고 절묘하게 양견이 찬탈하여 수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만일, 이때 타발가한이 죽지 않았다면 북중국의 정권 교체는 외부의 공세와 맞물리면서 엄청난 혼란이 생겼을 것이다.

“하옵고, 현재 돌궐은 심대한 내부의 문제를 안고 있사옵니다. 돌궐의 대카간은 이를 불식하고자 다섯 명의 소카간을······.”

새로운 대카간이 즉위할 때 내부의 문제가 상당히 컸다. 이를 수습하고자 유력 세력의 실체를 인정해주며 수장 다섯 명을 소카간에 임명했다. 겉보기로는 잘 수습된 것으로 보이지만 분란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즉, 언제 분열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의미했다.

그나저나 이제 고식의 입을 막아야 할 것 같았다.

꼼꼼하게 준비한 건 알겠는데 너무 장황했다.

이만하면 됐다.

“기다리게.”

“허. 왜 그러십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나라가 세공을 중단하자 돌궐이 노발대발한다는 말이 아닌가? 게다가 분열을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해서 대외 원정으로 권위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는 거고.”

“내, 내가 오랫동안 부지런하고 열심히 분석하였거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고생했네. 자네가 잘 정리해서 내가 한 번에 알아들은 걸세. 그런데 외교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자리에서 자네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그러니 다음부터는 문서로 제출하게. 실은 우리도 글자를 읽을 줄 안다네.”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됐네.”

고식의 눈동자는 격하게 흔들렸으나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혼자 한탄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한데, 이계찰에 대해서 아나?”

“이계찰은 왜 묻습니까.”

“사신단의 정사가 이계찰이니 묻는 것일세.”

“허. 그 사실을 왜 이제 말합니까?”

“이 사실을 아직도 몰랐던 자네가 문제가 있는 걸세. 한데, 왜 그러나?”

“이계찰은 돌궐의 대카간과 버금가는 세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뭐······?”

이건 의외였다.

대카간급의 인사가 사신으로 온 것도 놀라운데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얌전히 술이나 먹고 있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었다.

“지금껏 우리 고구려와 돌궐은 첨예한 대립 관계였소. 한데, 저들이 이토록 전향적으로 나오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외다.”

“하하하! 폐하. 신이 바로 돌궐 전문가이옵니다. 신이 다 알 수 있사옵니다.”

“태대사자의 생각을 말해보시오.”

“이는 참으로 간단하옵니다. 돌궐은 대대적인 남진을 꾀하고 있사옵니다. 한데, 남진하려면 영주를 지나가야 하옵니다. 지금 영주는 본국이 취하였으니 돌궐도 입장이 난처해진 것이옵니다.”

일리가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 수나라와 싸우러 가는데 고구려의 영토를 무단으로 통과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폐하. 지금 돌궐이 대고구려 외교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옵니다.”

“좋소.”

고양성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나를 쳐다봤다.

“막리지. 최대한 많은 걸 얻어오시오.”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아니, 폐하. 돌궐은 신이 누구보다도 잘 아옵니다.”

대경실색한 고식이 말하자 고양성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고생하셨소. 참으로 일목요연한 정리였소. 내가 크게 감탄했소.”

“폐하. 그러니 신이 나서는 게 옳지 않겠사옵니까?”

“한데, 이계찰이 그런 위치라면 응당 우리도 ‘격’을 맞춰야 하지 않겠소?”

“······.”

내가 막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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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신이 혼미해지는 수준의 술 냄새였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술독을 권한 건 나였으니까 말이다.

이계찰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 뒤 입가를 닦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피식 웃더니 말했다.

“오늘은 나를 찾을 줄 알았소.”

여전히 술이 덜 깬 상태라고 보였는데 목소리는 정상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눈동자도 초점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래서 사람은 명함이 중요했다.

어제만 해도 거의 알코올 중독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매사 절제가 철저한 거물로 보였다.

“한데, 내가 찾을 줄 알았다니 무슨 말이오?”

“하하하. 되었소. 그만하셔도 되오. 이제 다 알았으니 말이오.”

“음.”

“참으로 놀랐소. 그동안 늘 연회만 베풀기에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수나라 사신단이 온 이후 사정을 다 알게 되었소. 고구려가 어찌 천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는 시간이었소. 아. 물론, 고구려의 산해진미는 참으로 좋았소. 특히 돼지고기 말이외다.”

놀라운 수준으로 착각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도 아니다.

그래서 그냥 들어보기로 했다.

“수나라 사신을 강력하게 압박하면서 고구려의 힘을 보여주신 게 아니겠소?”

“음.”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참으로 전율스러웠소. 진심으로 감탄했소. 덕분에 나는 고구려의 의지를 확실하게 알았소.”

고식의 지독한 일처리가 이런 착각을 도출했다.

이렇게 보니 고식이 정말 고생이 많았다.

“아니, 우리 사신과 수나라 사신을 고의로 만나게 한 것 자체가 놀라웠소. 대체 누가 이런 계책을 수립하였소?”

“허. 지금 보고 있는데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오?”

“하하하. 역시 막리지였군요. 참으로 대단하셨소. 하면, 우리도 화답해야지요.”

“어찌 화답할지 기대가 되오.”

“40만이외다.”

이계찰은 엄청난 거두절미를 보여줬다.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장성을 넘을 것이오.”

수나라 원정군의 규모였다.

숫자만으로도 압박이 느껴졌다.

동시에 몇 가지 의문이 파생되었다.

1. 이번 원정이 원 역사에도 있었을까?

1-1. 만일 그렇다면 돌궐은 패했기에 수나라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통일을 일궈냈을 것이다.

1-2. 하면, 왜 패했을까? 이토록 강성한데 말이다.

2. 원 역사가 아니라 나의 등장이 만들어낸 나비효과라면?

2-1. ······.

여러 가지 경우의 수로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2번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내가 일으킨 나비효과로 돌궐이 원정을 꾀했다기에는 시기와 상황이 너무 역동적이다. 이를 고려할 때 지금 내 앞에 이계찰이 있는 정도가 나비효과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고구려가 보여준 의지라면 우리와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40만이라는 숫자는 고구려가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도 여기고 있소.”

이계찰은 의기양양했다.

압도적인 군세로 협상에서 우위에 섰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은 잠시 멈췄다.

“결국, 우리에게 길을 내어달라는 것이구려.”

“그렇소. 양국의 우호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귀국은 수나라를 도모하여 막대한 양의 세폐를 확보할 것이오. 하면, 우리는 무엇을 얻소?”

“싸움은 우리가 할 것이니 고구려는 피를 흘리지 않고 국경의 안정을 얻는 게 아니겠소?”

어디서 헛소리를 하나.

고식의 분석에 의하면 지금 돌궐은 무조건 남진해야 한다.

세폐를 받아내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하고, 불안정한 대카간의 권위는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고구려가 영주를 확보한 건 돌궐에게 중대 사안이었다. 사실 돌궐로서도 적대 세력인 고구려가 길목을 장악한 사실이 얼마나 곤혹스럽겠는가.

“1할.”

“무슨 말이오?”

“약탈이든 세폐든 뭔가 나오지 않겠소? 그중 1할을 주시오.”

이계찰은 눈을 몇 번이나 껌뻑였다.

“내가 아직 취기가 남아서 물어보는 것이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1회에 그칠 것인데 이조차도 어렵다면 됐소. 못 가오. 유감스럽다면 우리와 겨뤄도 좋소.”

“우리가 수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압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오?”

“수나라는 귀국에 세폐를 줄 생각이 없소. 한데,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그래서 우리를 공격한다? 큭. 미안한데 우리는 비단 10만 필을 매년 줄 능력이 없소. 그런데 말이외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자신 있소?”

“······.”

“서토의 무리와 우리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건 귀공도 잘 알 것이오만.”

고구려는 중국을 공격하는 것과 비슷한 비용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대되는 경제적 수익은 절반도 안 된다.

이를 고려할 때 지금 돌궐이 고구려를 도발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아니, 돌궐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이게 핵심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위에 있다.

이계찰은 잠시 생각하더니 어물쩍 말을 던졌다.

“그래서 미리 말하지 않았소이까. 아직 취기가 남아 있다고.”

“이런. 내가 배려하지 못했나 보오.”

“괜찮소. 내가 과하게 마셨으니까. 한데, 혹시 고구려도 세폐에 관심이 있소?”

만일, 고구려도 세폐에 욕심을 내면 돌궐은 경쟁자가 생기는 것이니 달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전혀 아니었다.

“아. 우리는 전혀 관심이 없소.”

사실 세폐가 안정적이긴 하다.

때가 되면 알아서 돈을 바치는 건데, 이것보다 좋은 건 없다.

그런데 이건 아주 근시안적인 시야에 불과하다.

언제라도 중국이 힘을 키워 세폐를 중단해버리면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자고로 외부의 경제력으로 힘을 키우는 건 위험한 것이다.

반면, 약탈은 사정이 다르다.

단지 재물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사람을 잡아 와서 국력을 키우는 것이다.

수나라가 미치지 않는 이상 백성을 세폐로 바치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고집 있는 약탈의 길을 걷는 게 옳다.

“약탈은 고구려의 유구한 전통이지요. 우리는 이거면 되오.”

“그렇소······?”

“믿지 못하면 논의는 없던 걸로 해도 좋소.”

“되었소. 진심이라고 여기겠소.”

“좋소.”

그래. 고생해.

너희는 우리의 장기 말이 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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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성의 입가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나는 화답하듯 웃었다.

“큭. 돌궐의 40만 대군이 장성을 넘어간다고 했소?”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 쉽사리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하온데, 본국은 상관이 없사옵니다.”

“하하하. 바로 그것이오. 누가 이길지라도 양측 모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니 말이외다. 또한, 만에 하나 돌궐이 패하여 1할을 받지 못한다면 오랫동안 압박할 수단이 생기는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오.”

“그러하옵니다. 남쪽의 진나라는 내우(內憂), 북쪽의 수나라는 외환(外患), 돌궐은 내우외환.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사옵니다.”

천하의 정세가 너무나도 이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폐하. 이미 고한 듯 누가 이기더라도 상관이 없사옵니다. 본국은 이번 전쟁에서 최대한의 성과를 내면 될 것이니 말이옵니다. 하여, 청하옵니다.”

나는 오늘

“돌궐이 남하하여 수나라의 대군과 혈전을 펼칠 때 아군도 장성을 넘어 화북 전역을 약탈하라 명하여주시옵소서.”

고구려 외교의 성과를 고하였다.

“그리하여, 무혈로서 수만 명의 포로를 확보한다면 고구려의 국세는 하늘을 찌를 것이옵니다.”

어쩌면 10만 단위의 인원을 확보할지도 모른다.

피는 그들이 흘리고, 우리는 이권만 취한다.

이것이 우리의 외교다.

“왕명을 내릴 것이오. 돌궐의 남진에 발맞춰 모든 귀족이 전 병력을 동원해야 할 것이오.”

“천은이 망극하옵니다.”

보병 10만, 기병 5만.

고구려 역사상 최대 규모 전통의 집행이 선언되었다.

전통을 더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르네상스가 아니겠는가.

이 판이 끝날 때 적은 약해지고, 오직 고구려만 성장할 것이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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