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경쟁(1)
38화 경쟁(1)
고구려, 거란 그리고 고막해.
현실의 관계나 위치를 떼고 세 세력은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약탈’에 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막상 장성 이남을 넘어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자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그중 세상의 이목을 사로잡은 건 고구려도 거란도 아닌 고막해였다.
“우하하하! 쌀 한 톨도 남기지 말라!”
고막해의 중심 세력인 아회씨의 추장은 말을 타며 광인처럼 외쳤다.
“우리가 만들지 못하는 건 다 챙기고, 만들 수 있는 것도 다 챙겨라!”
하늘을 찌를 듯 치솟는 목소리에는 세상 모든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고막해군도 그 못지않게 광인처럼 고함을 지르며 마음껏 ‘약탈’했다.
“응? 누가 옵니다!”
“뭐? 수나라 놈들······이 아니라 거란족이다! 무시하고 약탈하라!”
“하하하! 알겠습니다.”
광기가 자욱하게 번지는 수준이 아니라 넘실거리며 흘렀다.
그리고
“······.”
거란족의 오적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 장면을 바라만 봤다.
“어찌할까요? 하필이면 우리가 목표로 삼은 곳에 고막해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과거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한 편이니 별수 없지. 옆 고을로 이동하지. 최대한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발 늦은 탓에 조금 더 움직여야 했다.
오적은 입맛을 다시며 속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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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폭풍처럼 장성 이남을 뒤흔들었으나 마음껏 활동하는 건 아니었다. 수백에서 수천으로 이뤄진 병력으로 약탈을 하는 것이기에 기동력은 좋았으나 수나라군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손해를 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적당하게’ 성과를 내며 반드시 장성 일대로 물러났다.
이렇게 모여서 그러한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으나 은근한 실적 경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하하! 그래. 거란족은 얼마나 약탈하셨소?”
가뜩이나 속이 복잡한 돌라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목소리가 원래 그렇게 크오? 귀가 아파서 인상을 쓸 수밖에 없소.”
“지금 내게 인의예지를 이르는 것이오? 참으로 놀랍소?”
“하.”
“실적이 별로요? 괜찮소. 우리도 아직 성과가 미미하오. 소소하게 500명 정도 잡아 왔소.”
“큰 소리 치기에 5,000명은 되는 줄 알았소? 우리 거란은 600명이외다.”
“음? 거란족은 우리보다 규모가 몇 배나 되는데 수가 100명이나 많이 잡으셨소? 대단하오?”
“이보시오.”
돌라가 노려봤으나 아회씨는 가볍게 말을 흘려버렸다.
“한데, 아까 봤는데 남녀노소가 사이좋게 모여 있더이다. 그렇게 600명이오? 우리는 젊은 남녀만 500명이오. 하하하!”
“하······.”
조롱 아닌 조롱에 돌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피 칠갑을 한 온달이 모습을 보였다.
모두 의아하여 쳐다봤는데
“아. 오는 길에 수나라군을 만나서 격전을 좀 치렀소.”
고구려군은 규모가 2천에 불과했는데, 심지어 이조차도 4~500명으로 분군하여 움직였다. 이를 상기한 아회씨는 눈에 이채를 띄며 물었다.
“적의 규모가 얼마나 됐소?”
“별로 안 됐소. 천 명 정도였소. 그래서 창을 휘두르며 달려가서 십 수명을 도륙 냈더니 사기가 떨어져서 아무것도 못 하더이다. 그 뒤로는 진군령을 내려서 정리했소. 참으로 싱거웠소.”
“참으로 겸손하시오. 수나라군이 강군이라는 걸 모두 알 것인데.”
“하하하. 과찬이시오. 그러고 보니 상황이 급박하여 제대로 통성명을 못 했소. 나는 고구려의 부마, 온달이라고 하오.”
“이런!”
아회씨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갑자기 극진한 예를 취했다.
“부마셨습니까? 소인은 고막해의 아회씨라고 합니다. 말씀을 편히 하시지요.”
그의 놀라운 처세에 거란족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만 봤다. 불혹의 나이에 고막해의 대표로 일가를 이룬 그의 삶을 되돌아볼 때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긴 했다.
온달은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일가를 이룬 수장인데 어찌 말을 가볍게 하겠소. 한데, 어찌하여 이름은 말하지 않고 성만 이르시오?”
“보잘것없는 이름이니 그냥 부르시면 됩니다. 이가, 왕가, 연가. 이런 느낌으로 편하시지요.”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하하하! 소인은 그게 편합니다. 또, 우리 고막해 내부에서도 다들 소인을 그리 부르기도 합니다. 평생 들었기에 익숙하지요. 한데, 고구려는 몇 명이나 사로잡으셨습니까?”
“조촐하게 300명이외다.”
병력의 수를 고려할 때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거란족 오적은 어물쩍 말을 꺼냈다.
“부마께 건의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음. 소인이 볼 때 약탈 지역을 세력마다 정확하게 나누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겹치니 참으로 불편합니다.”
어느새 오적도 온달에게 확실한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 본 을지문덕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두 번 정도 일을 더 치른 뒤 장성 이북으로 물러날 것이오. 그러니 오늘처럼 행하면 될 것이외다.”
“그럴 수는 없소. 다음에는 제대로 해볼 생각이니 고구려에서 매끄럽게 정리해주시오.”
“음.”
“우리 거란족이 약탈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오.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니 구역을 나눕시다.”
그 말에 아회씨가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거란의 약탈이라고 하셨소? 이거 참으로 기대되오! 하하하!”
“어디 다음에도 큰소리를 치는지 두고 봅시다.”
듣고 있던 온달이 말했다.
“문덕. 그러는 게 좋겠네. 나도 이참에 확실하게 입증해야겠네.”
“예?”
“약탈은 고구려가 천하제일이라는 걸 보여야지. 이건 자존심일세.”
“하하하! 고구려는 약탈을 안 한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절대 우리 고막해를 못 이기십니다.”
온달은 피식 웃으며 아회씨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약탈이 전통이오.”
“약탈은 원래 우리 거란족의 생존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보여드리지요.”
오적까지 결합하며 분위기는 불타올랐다.
그러나 돌라는 끼지 못하고 소태 씹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을지문덕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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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경멸만 담겨 있었다.
만인이 평등한 세상에서 홀로 인종차별을 주장한 용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건 좀 억울했다.
그런데 범인의 윤곽이 나오지 않았다.
작은 실마리도 없어서 몽타주 하나 그릴 수가 없었다.
처음 용의선상에 올렸던 연자유, 이문진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사건은 미제 국면으로 돌입할 기미를 보였다.
답답했다.
대체 어디서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음해’가 시작됐단 말인가.
중대한 정치적 사안은 아니었으나 그냥 내가 색출하고 싶었다.
아니다.
막리지를 음해한 것이니 국가 보위 수준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맞지 싶다.
그래서 총책임자를 찾아왔는데
“설마 말이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셨소?”
한심해 죽겠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이라서 조금 멈칫했는데 고양성이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막리지의 사랑채도 아니고 백주에 ‘광야’에서 그 대화를 나눴소. 고구려인은 늘 눈을 뜨고 있고, 귀는 늘 열려있소. 고구려인의 말(言)은 말(馬)보다 빠르오.”
5G 인터넷이 사방에 깔려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면 연자유와 이문진이 범인이다.
굳이 거기서 민감한 이야기를 한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한데, 막리지. 뽕나무는 왜 고집하오?”
“폐하. 백성을 추위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옵니다. 신이 틀린 것이옵니까?”
“틀린 건 아니오. 하지만, 늘 그렇듯 정치는 땅에 발을 대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외다. 우리가 뽕나무를 재배할 여건이 아니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오. 나 역시 고구려의 태왕으로서 양잠업을 크게 일으켜 백성을 추위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어려운 건 어려운 것이외다.”
사실 양잠업은 상당한 노동력과 고동의 정신력에 엄청난 스트레스까지 동반하는 정말 하기 싫은 산업이긴 했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는 양잠업을 하기 싫어서 여성들이 욕을 해대며 파업까지 하였으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조정에서 아무리 권장해도 눈을 부라리는 그들을 설득할 방안은 없었다. 양잠업이 민간에 잘 정착된 시기는 시장 화폐 경제가 도입된 이후 뽕나무를 재배하면 ‘돈’이 되는 현실이 구현된 이후였다.
그러니 어쩌면 고구려에서 양잠업을 도입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고양성까지 이렇게 난색을 보이니 어지간하면 나도 한 수 접는 게 맞긴 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를 향한 ‘근거 없는’ 음해가 나를 물러설 수 없게 만들었다. 단지, 기분 나쁘거나 짜증 난다는 식의 원초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사실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절대적인 명분은 따로 있었다.
뭐.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한 말은 맞기도 해서 억울한 것도 없다.
그리고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뽕나무로 고구려의 체질을 바꿔 버릴 생각이었다.
“폐하. 고구려에 왔는데 고구려 말도 못 하면 차별받아도 마땅하옵니다. 그들의 의지로 온 게 아닐지라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사옵니까? 그러니 차별해야지요.”
“생명이 위험한데 강행이라. 이유가 무엇이오?”
“뽕나무를 재배하여 양잠업을 고구려 전역에 보급하는 건 단지 백성을 추위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아니옵니다.”
백성이 부유하면 나라가 부강하다.
이런 원론적인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서쪽의 사람은 차별하지 말자면서 남북으로는 왜 그렇게 차별하는 것이옵니까?”
“뭐요······?”
국적 차별은 안 하는데, 지역 차별은 부지런하게 하는 모순을 지적했다.
역시 고양성은 멈칫했다.
“국적은 차별하지 않는 고구려가 지역은 집요하게 따진다는 건 참으로 괴이한 일이옵니다. 신은 이번에 핏대를 세우는 귀족들에게서 이러한 모순을 보았사옵니다.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사옵니다.”
마치 집은 엉망인데 밖에서는 말끔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할까?
혹은 집에서는 알코올 중독자에 가정 폭력범인데 밖에 나가서는 젠틀한 척을 한다고 해야 할까?
뭐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너무 기본적인 내용이었으나 허를 찔렸는지 용안은 심각해졌다.
“폐하. 신은 양잠업으로 이 모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사옵니다.”
“······.”
“하여, 신은 이 일을 이대로 밀고 가볼까 하옵니다.”
“말해보시오. 어찌할 건지.”
“이번에 데려온 수나라인들을 모조리 양잠업에 투입하겠사옵니다.”
“허.”
“또한, 우리 말을 익히고 자발적 ‘신속’의 뜻을 밝힌 이는 면화를 내릴 것이옵니다. 차별? 제대로 해보겠사옵니다. 하여, 고구려를 진짜 차별이 없는 따뜻한 나라로 변모시킬까 하옵니다.”
이건 그냥 슬로건이다.
무릇, 이런 일은 구체적인 정치적 지각 변동을 결과로 도출해야 한다.
그래서 말했다.
“기다려주시옵소서. 차기 대대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폐하께서 임명하게 되실 것이옵니다.”
뽕나무는 이걸 가능하게 할 것이다.
내가 다 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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