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만리장성 너머로(2)
37화 만리장성 너머로(2)
고구려군 수천, 거란군 수만.
누가 보더라도 주축은 거란군이었다.
그러니까 누가 보더라도 말이다.
“대체 거란족이 무슨 이유로 장성을 넘었단 말인가!”
얼마 전, 느닷없이 해적이 나타나서 불바다를 만들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거란족이 장성을 넘었다.
북평 태수의 일갈에 뚱뚱한 관리가 황급히 말했다.
“고구려와 고막해가 연합하여 고보령을 도모했습니다. 위기를 느낀 거란족이 장성 이남으로 내려온 게 아니겠습니까.”
“하면, 고구려가 두려워 감히 장성을 넘어 본국을 공격했단 말인가?”
“최근 고보령은 돌궐과 손을 잡았습니다. 또한, 거란족의 유력 부족장인 돌라는 돌궐에 우호적인 인물입니다. 이때 돌궐과 적대적인 고구려가 영주를 휘저으니 장성을 넘은 사정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상당히 타당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홀쭉한 관리가 반대의견을 꺼냈다.
“장성을 넘은 무리에는 고구려군의 깃발도 있었습니다.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할지도 모릅니다. 섣불리 단정하는 건 어렵습니다.”
“하면, 자네는 고구려와 거란이 동맹을 체결하여 장성을 넘었다고 보는 것인가? 대체 왜?”
“놀랍게도 그들은 교전을 치르지는 않았습니다. 변방을 약탈한 뒤 민심을 교란하더니 물러났습니다. 끌려간 이들의 규모도 상당합니다. 소인은 저들의 목적이 약탈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인. 말이 안 됩니다.”
뚱뚱한 관리가 바로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제시했다.
“약탈이라니요? 특히, 고구려가 개입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자네가 답해보게. 군사를 일으켜서 약탈이나 하자고 본국과 적대한다는 발상을 고구려가 했다는 건가? 수백 년의 금기를 어기고 서진한 고구려의 목적이 광활한 화북의 옥토가 아니라 약탈이라는 건가? 대체 고구려가 왜 이런 짓을 하나?”
“해적도 고구려의 세력이었네. 한데, 왜 이번은 아니라고 생각하나?”
“모든 걸 단순화하지 말게. 보시게. 고구려군의 깃발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거란군의 규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네. 이건 어찌 설명할 건가? 거란의 약탈에 고구려가 힘을 보탰다는 건가? 본국도 섣불리 대하기 어려운 고구려가 고작 거란의 후미나 봐주고 있었다고 말을 하고 싶나?”
“하지만, 수만의 병력이 곧장 철수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 않나? 약탈이라면 가능한 일일세.”
“대체 누가 약탈을 온 힘을 기울여서 하나? 그런 사례가 있나?”
“사례를 왜 찾나? 끌려간 인원이 천여 명을 넘었네. 고구려 해적이 끌고 간 우리 백성의 수도 천 명일세. 우리의 피해가 이렇게 큰데 힘을 기울였겠지. 그리고 저들이 철수한 이유를 제시해보게.”
“그건······.”
두 사람의 설전이 격해지자 태수는 손을 내저으며 잘라냈다.
“북방의 일을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렵네. 그러나 변고는 황도에 전하는 게 옳겠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면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아직 빼앗긴 ‘영토’는 없었기에 큰 걱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찰병이 달려오면서
“저, 적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북방의 변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뚱뚱한 관리는 홀쭉한 관리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약탈을 참으로 요란하게 하는군.”
“······.”
“대인. 당장 요격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막해까지 출병하여 적의 수가 더 늘었습니다.”
비보가 더해졌다.
훌쭉한 관리는 뚱뚱한 관리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거란과 고막해가 동맹이라도 체결했나보군.”
“······.”
-----
돌라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평생 이토록 ‘허무’하고 불편한 상황은 경험한 바가 없었다.
시작은 어처구니없는 퇴각이었다.
-어째서 바로 퇴각한 것이오?
제대로 교전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고구려군은 철군을 감행했다.
기껏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동참했는데 참으로 당혹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때 온달은 노래하듯 편안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야 적이 혼란에 빠질 게 아니겠소?
-혼란이라니요? 총진군하여 성을 도모하면 되는 게 아니오?
-성은 도모하지 않을 것이오.
-······하면, 왜 장성을 넘은 것이오?
-아군의 목적은 수나라를 약탈하는 것이오.
-······일전에 고구려의 수군이 움직인 것도 약탈이 목적이었소?
-그렇소.
-······.
고작 약탈이나 하고자 수만의 대병을 일으킨 게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은 1만 명이 넘는 고막해의 군세가 등장하면서 불편해졌다.
‘고막해와 우리가 원수라는 걸 알면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특히, 퇴각하던 온달이 고막해가 나타나자 말머리를 돌린 건 불편함을 넘어 불쾌함까지 들게 했다.
“보시오.”
“왜 그럽니까.”
정세 분석의 실패로 입지가 크게 줄어든 오적은 온달과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돌라는 이를 고려하며 슬쩍 말을 보탰다.
“고구려가 약탈이나 하려는 걸 알고 있소?”
“사정은 들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지요.”
“뭐가 대단하다는 것이오? 고작 약탈에 힘을 보태자고 장성을 넘어 수나라와 척질 수는 없는 노릇이오.”
“수나라가 경기를 일으켜 대군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일인데 감행하니 대단하다는 겁니다.”
“만일, 수나라 황제가 대군을 일으키면 고구려가 싸우리라 생각하오? 선례를 보더라도······.”
“무슨 의미입니까? 아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오적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지자 돌라는 슬쩍 말을 돌렸다.
“내 말은 수만의 대군이 결합했는데 목표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것이외다.”
“좋게 생각하세요. 좋게. 이참에 우리도 크게 한몫 챙겨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니 괜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괜한 생각이라니 무슨 말이오?”
“돌궐이었다면 장성을 넘자마자 총력전을 펼쳤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지금 고구려와 한배를 탄 것도 우리의 선택이었습니다. 공의 사사로운 인연으로 부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말아야 할 겁니다.”
“······.”
“공과 돌궐이 가깝다는 사실은 고구려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중하세요.”
그렇지만 고구려에 신속을 청하려고 한 것도 사실이긴 했다.
어디까지나 영주에서 편안하게 말이다.
오적의 말에 돌라는 고소를 삼키며 어물쩍 말을 돌렸다.
“우리와 고막해는 수만의 병력을 차출했소. 한데, 고구려는 고작 2천이니 답답해서 한 말이었소.”
“조만간 국내성에서 추가 병력이 온다고 들었습니다. 이 대화, 여기서 끝내지요.”
“그냥 말을 한 거요. 말.”
오적은 더 대꾸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
을지문덕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급박한 순간에 내렸던 정세 판단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수나라를 상대로 약탈이라. 참으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하하하! 자네도 그런가? 실은 나도 마찬가지일세.”
온달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에 올라탔다.
을지문덕도 말에 오르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한데, 일시 퇴각을 청한 이유가 있는가?”
약탈은 속도가 생명이었다.
온달의 능력을 고려할 때 최대한 빠르고 강렬하게 약탈을 끝낸 뒤 유유히 퇴각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탈 내내 맥이 빠진 공세를 펼쳤고 느닷없이 퇴각했다.
고막해의 참전을 명분으로 퇴각을 멈춘 것인데, 만일 이러하지 않았다면 만리장성을 넘었다는 군사적 의미만 얻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단지, 고막해의 추장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하여 내게 서찰을 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하하하. 소장은 부마의 신묘한 무력을 믿을 뿐이지요.”
온달은 천천히 말을 몰며 호탕하게 웃었다.
자연스레 시선을 돌려 거란군을 바라봤다.
“되었네. 복잡하게 돌리지 말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전장에 충실한 무장일세. 복잡한 외교나 정치는 관심도 없고, 잘할 생각도 없으니까.”
을지문덕은 말을 몰아 온달의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소장이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으나 거란족은 과거의 일을 잊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분명 우리 고구려는 북주의 압력에 신속해 온 거란족을 돌려보냈으니 말입니다. 아마 이번 선택을 할 때도 이런 요소가 상당히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한데도, 수만의 대병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자네의 역량에서 기인한 것일세. 참으로 대단해.”
사실 협상 장소에서 이뤄진 을지문덕의 압박은 대단한 것이었다.
을지문덕은 무려 거란족의 진영에서 거란족의 정찰병이 가져온 정보를 차단하며 시행한 것이었으니 부족장들의 선택지를 아예 박탈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일, 정찰병이 가져온 정보가 고구려에 불리한 내용이었다고 할지라도 내뱉은 말을 번복하기가 참으로 난처했을 것이니 을지문덕의 협상력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전부터 생각했네만 자네의 능력은 왜 이렇게 부러운지 모르겠군.”
“전혀 아닌 거 알고 있습니다.”
“이런. 들켰군.”
온달과 을지문덕은 길이 달랐다.
을지문덕은 철저한 분석의 끝에 전략, 전술적인 판단을 하는 지장이었다. 물론, 을지문덕의 무위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니. 한 마디로 팔방미인이었다.
반면, 온달은 정말 말 그대로 압도적인 무력을 내세운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상대의 계책을 분쇄할 위력이었으니 괜히 고구려 최강의 무장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을지문덕은 엷게 웃으며 말했다.
“가라달의 말에 의하면 거란족의 유력 부족장인 돌라는 돌궐과 친분이 두텁습니다.”
“안 그래도 그 사람은 털이 지저분하게 났더군. 게다가 눈동자는 뭐가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지도 모르겠고.”
“······별로 중요한 건 아닌 듯합니다.”
“공주가 봤으면 기겁했을 것이라는 말일세. 미안하네. 내가 공주 생각이 나서 옆길로 샜네. 어서 말해보게.”
“하하하. 그래야지요.”
을지문덕도 자연스레 거란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돌라는 우리의 행보를 유심히 보며 속으로 돌궐과 저울질하고 있을 겁니다.”
“고구려의 약세가 보이면 돌궐로 동맹을 체결할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마 지금도 머릿속으로는 그 생각이 가득할 겁니다.”
“최초 퇴각하였을 때 김이 샜을 것이고, 거란족과 흉흉한 관계인 고막해군이 등장하였으니 속이 부글부글하겠군.”
“그렇습니다. 아마 지금쯤 누군가를 잡고 답답한 속내를 꺼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저 멀리 오적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둘라가 보였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을지문덕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확고하게 포섭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렵다면 확실하게 해야지요. 어쩌면 수나라와 일전을 치러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한데 불안한 요소를 끌어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거하려면 거란족의 반발도 고려해야 할 것일세.”
“종기를 짜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짜내는 게 아니라 알아서 낫게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멸하게 두자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거란족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킨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전제 조건은 당연히 압도적인 고구려의 힘이겠군. 우리가 비루한 모습을 보이면 발생하지 않을 일이니까 말일세. 아마 모두 돌궐에게로 가겠지.”
“하하하. 조만간 국내성에서도 추가적인 출병이 있을 겁니다. 병력의 부족함은 이렇게 채우면 될 일입니다.”
온달은 엷게 웃었다.
그러면서 오른손을 들었다.
“그 전에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더 좋겠지. 우리 고구려의 힘을 말일세.”
동시에 온달의 오른손이 묵직하게 앞을 내려치듯 움직였다.
그 즉시 2천 고구려 기병이 돌격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온달은 산책하듯 천천히 말을 몰았다.
“문덕. 내용을 전하게. 다시 수백 명으로 분군하여 아무 데나 약탈하라고. 북평군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어야겠네.”
“그리하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