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적법한 계승
31화 적법한 계승
국내계 귀족의 회합은 뜨거웠다.
아니, 그냥 불타올랐다.
“크······나는 왕 대인께서 이러실 줄 알았네.”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라도 왕 대인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네.”
“그렇지. 왕 대인이 아니시면 누가 고구려의 전통을 부르짖으실 수 있겠나?”
“누가 뭐라고 해도 왕 대인께서는 전통의 적법한 계승자가 분명하네.”
왕고덕이 ‘약탈’을 주창하고 고양성이 윤허한 사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퍼졌다. 아니, 왕명으로 국내성에 미리 준비하라고 하였으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이리되자 고구려 역사에서 약탈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내계 귀족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 이게 고구려지.”
“큭. 이래야 우리의 피가 끓지.”
“전설처럼 내려오는 선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늘 동경했다네. 우리 대에는 그런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왕 대인께서 다시 길을 여셨어.”
참으로 오랜 세월 고구려는 공식적으로는 ‘약탈’을 하지 않았다.
아예 없을 수는 없었겠으나 국가 단위의 약탈보다는 총력전을 치른 뒤 ‘전리품’을 가져오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과거 고구려가 서서히 성장할 때는 가문과 가문이 일치단결하여 약탈을 수시로 진행했다. 여기에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약탈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광개토왕 이후 거대한 세력권을 일군 뒤로는 사정이 다소 달라졌다.
약탈이라는 행위도 결국 상대가 있어야 한다.
과거 주된 약탈 대상은 이미 ‘고구려’가 되었기에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아닌 세력을 약탈하자니 전처럼 고만고만한 상대가 없었다.
적국이 아닌 세력을 약탈하면 적국이 될 것이기에 단독으로 약탈을 시행할 수 있는 가문이라고 할지라도 고구려라는 집단에 묶여 있는 이상 절대로 시행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적국을 상대로 할 수도 없었는데 약탈을 곧 선전포고로 간주하는 야박한 세계가 개막되었기 때문이었다. 광개토왕 이후 고구려와 국경을 나란히 하는 나라들은 하나 같이 총력전을 펼쳐야 할 정도로 강성했기에 약탈을 한다는 건 사실상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 고구려는 ‘공식적인’ 약탈이 없었다.
즉, 현재의 귀족에게 국가적 차원의 약탈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선대의 위명이었다.
그런데 왕고덕이 서토를 상대로 한 무제한 약탈을 선언했으니 전설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서토놈들과 총력전이 발생해도 되니까 얼마든지 마음껏 하라는 선언이지?”
“그렇지. 전이었다면 당황스러울 것 같지만 이미 왕 대인께서 60만 사병의 구축을 이르시지 않았는가.”
“암. 60만 대군이 요동을 지키는데 누가 감히 전통의 부활로 시비를 걸겠는가.”
“참으로 옳은 말일세. 아니, 그리고 내가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애초 60만 대군을 확보하려면 일손이 더 필요하긴 했네.”
“그렇지? 그러자면 어쩔 수 없이 서토에서 데려와야지. 이건 우리가 어쩔 수가 없는 일일세.”
“듣자니 그곳은 사람이 많아서 밥도 굶는다며? 이참에 우리가 데려오면 서로 좋은 걸세.”
전통의 적법한 계승자가 선언한 전통의 화려한 부활은 세상을 이토록 뜨겁게 만들었다.
“왕명에 의하면 부마의 일이 끝난 직후 달리는 걸세.”
“그렇다면······?”
“당장 국내성에 사람을 보내야지. 기병 중심으로 대오를 갖추라고 말일세.”
“요동과 무려성에 사람을 미리 보내서 협조를 구해야겠군.”
“무려성이 가라달이 누군가? 특별한 사정이 없을시 무려성에 들어가면 가라달의 통제에 따라야 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건 가장 중요한 문제일세.”
“하하하. 국내계 귀족인 고승일세.”
“이런! 고승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군. 그는 고구려에서 가장 호전적인 사람이니 말일세.”
“그리고 적과 싸울 때 가능성이 작게라도 있으면 누구의 제안도 거절하지 않고 일단 싸우고 보는 사람이지. 뒤를 돌아볼지 몰라.”
“약탈은 일사불란하게 이뤄지겠군.”
-----
평양계 귀족의 분위기는 애매했다.
그만큼 지금 흘러가는 상황은 뜻밖이었다.
“왕 대인께서 전통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자처하실 줄은 몰랐소.”
“그렇소. 약탈이라······.”
이들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국내계와는 달리 이들 평양계는 국운을 건 총력전을 치르며 역사를 이어왔다. 해서, 고구려의 전통인 약탈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었다. 이후 고구려의 중추가 되었을 때 고구려는 약탈의 역사로부터 거리를 두었으니 제대로 전통을 견식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평양계의 수장인 왕고덕이 전통의 화려한 부활을 선언했으니 당혹스러운 건 당연했다.
하지만
“경험해보고 싶긴 했네.”
“국내계 귀족들이 술만 먹으면 선대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하긴 했지.”
“이참에 우리도 전설로 우뚝 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평양계 귀족도 고구려인이었다.
“참으로 옳은 말일세. 우리가 단지 약탈만 한다면 국내계의 뒤를 쫓아가는 수준이겠지. 그러나 우리 평양계는 분명히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또 다른 전설이 될 수가 있네.”
“동의하는 바일세. 게다가 우리가 섣불리 육로를 선택하면 국내계에서 눈을 부라리며 멱살을 잡을 것도 뻔하고.”
“그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네. 됐네. 우리는 우리의 강점을 살려야지. 평양계하면 수군, 수군하면 평양계가 아니겠는가?”
원래 고구려는 수군이 약세였다.
그러나 평양계가 대대적으로 합류하면서 수군 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건 분명한 역사였다.
“왕 대인께서 이미 우리의 길을 열어주셨네. 전통의 계승을 시작하는 일에 강이식을 선봉으로 세우셨지 않은가.”
“그가 잘 성과를 내겠지?”
“대대로 수군을 이끌었던 가문의 후계자가 아닌가. 그의 실패는 수군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일세.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만일, 왕고덕이 수군의 활로를 모색해주지 않았다면 평양계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잠시의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준비해야겠지?”
“물론일세. 그 전에 확실하게 하지. 연합하겠나? 아니면, 따로 하겠나.”
“우리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처음에는 서로 힘을 보태는 게 좋지 않겠나?”
“책임자는 누구로 세울 생각인가.”
“당연히 강이식이지.”
“좋은 생각일세. 그라면 왕 대인께서 확실하게 보증도 서주실 것이고, 우리끼리 책임자를 인선하느라 기 싸움을 할 필요도 없지.”
가장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니 윤곽이 하나씩 잡히기 시작했다.
남은 건 전력을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소선 30척을 내겠네.”
“받고. 중선 23척을 보태지.”
“좋군. 나도 대선 8척을 내겠네.”
순식간에 4천여 명이 넘는 수군과 군선 61척이 판돈으로 올라왔다.
큰 손 3명이 이렇게 나서자 한 명이 눈치 보며 어물쩍 말했다.
“서토 사람을 데려와야 하니 배가 더 필요하지 않겠나?”
“적어도 괜찮으니 눈치 보지 말고 보태게.”
“하하하. 소선 5척밖에 없네.”
“······그동안 뭐 했나?”
“미안하네.”
“됐네. 말이 나왔으니 확실하게 하지. 정확하게 나누는 걸세. 보탠 군선과 인원으로. 이걸 어기면 우리는 따로 하는 게 옳아.”
“험험. 그래야지.”
“훗날 따로 할 때 하더라도 우리가 아직은 약탈 경험이 부족하니까 몇 번은 같이 해야 할 것이니 모두 유념하게.”
“좋아. 그러니 아직 안 보탠 사람들 다 말하게.”
다시 상황이 정리되었다.
“나는 대선 10척을 내지. 자네는 왜 눈만 껌뻑이나?”
“아. 부끄럽네. 소선 20척에 불과하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자네는 왜 먼 산 보나? 다음 판부터 보탤 건가?”
“중선 4척일세.”
“자네는 뭐 했나?”
“미안하네.”
“나는 대선 6척, 중선 12척일세.”
“자네는 뭐가 그렇게 많나? 난 소선 8척과 중선 3척일세.”
“나는······.”
어느새 100여 척의 군선과 8천여 명의 병력이 명단에 올랐다.
그야말로 찰나였다.
-----
경작지에서 소처럼 소와 일하던 친위대 겸 농부들은 진땀을 흘리며 말을 꺼냈다.
“소문 들었나?”
“암. 약탈하러 간다던데?”
“그래서 하는 말일세. 드디어 약탈을 공식적으로 하나?”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비공식적으로 무언가를 했다는 것 같았다.
이는 그들만 알 수 있을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말이 들리더군.”
“자고로 이상한 건 나누는 거라고 배웠네.”
“평양은 배 타고, 국내성은 말 탄다던데?”
“뭐? 배를 탄다고? 어처구니가 없군.”
“이미 선발대가 출병했네.”
그 말에 일제히 오만상을 찌푸렸다.
“모름지기 고구려인이라면 응당 말을 타고 달려야 하거늘.”
“바다? 정말 바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있군.”
“바다에서 뭘 하나? 귀족들은 아직도 멀었네.”
“답답하군. 안 되겠네. 나중에 왕 대인이 오면 강력하게 따져 물어야겠네.”
“정확하게 하지. 바다로 가는 건 귀족 마음인데 우리보고 배 타라고 하면 집에 가버리자고.”
“당연한 말을 왜 하나? 죽어도 타지 않을 것이네. 그건 평양 귀족들 사병이나 타라고 하게.”
다들 엄청난 성토를 쏟아냈다.
그러자 한 명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나는 배 타는 게 좋네만.”
“자네는 아직 멀었네.”
“배 타는 게 좋다니. 참으로 한심하군.”
괜한 말로 타박이나 들은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우리에게 신라로 가라는 건 아니겠지?”
“신라? 거긴 우리끼리 알아서 하는 곳이지.”
“그렇지? 설마 왕 대인이 우리의 소일거리를 뺏어가고 그러지는 않으시겠지?”
“만일 그러시면 강하게 따져 물어야지.”
-----
대뜸 찾아와서 밥 달라고 해서 밥을 줬더니 밥은 안 먹고 딴짓만 했다. 의연은 한 숟갈도 뜨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참 많이 했다. 그냥 무시하고 밥이나 먹었다.
“대인.”
“밥이나 먹게. 더 할 말 없네.”
“소승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소승에게 서토에 가서 불교로 왕권 강화할 수 있는 비책을 제대로 알아 오라고 하시더니 그새 유학을 이렇게 보급하시는 건 대체 무슨 경우입니까.”
의연은 원래 유학자였다. 그것도 상당히 능력이 있고 유명한 유학자였다. 그런데 왕고덕이 설득하여 출가시켰고 중국으로 유학까지 보냈다. 이런 서사를 고려할 때 지금 내게 와서 따지는 건 기승전결 완벽하게 합당했다.
“그렇게 됐네. 자네가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하네.”
“소승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거 시험 합격한 이들의 명단은 왜 보나?”
“아. 소승이 도와드릴 만한 일이 있나 싶어서 보긴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면서 그건 또 무슨 경우인가.”
“소승이 원래 생각보다 말이 빠르고, 말보다 행동이 빠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유학자의 명단을 보고 있지만 여전히 대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게 따지려는 건 아니고 진짜 이해가 안 가는 것 같긴 했다. 왕고덕이 한 일이긴 하지만, 유학을 보급한 건 내가 한 일이라서 아예 책임이 없다고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할 말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
“불교의 이권을 주장할 생각이라면 집어넣게. 듣기 싫으니까.”
“무릇, 불교는 백성을 위계의 질서에 넣을 수 있으나, 유학은 귀족도 위계로 줄을 세울 수 있지요. 두 가지가 함께 가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없겠군.
“유학이 크게 성장하면 불교가 현실에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는 법이지요. 승려로서 이건 경계하는 게 옳지요.”
“그래서?”
“그런데 우리 귀족들은 유학의 보급이 가지는 진실을 모르는 것 같더군요.”
“이런. 다시 말해야겠군. 가서 전하게. 내가 조만간 관복도 정하고, 복색도 나눌 것이라고. 왕과 신하, 신하와 신하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어야지. 반대할 사람은 당장 찾아오라고 전해주게나.”
젓가락을 내리고 의연을 지그시 바라봤다.
애석하게도 나는 아무런 타협을 할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말을 더 보태면 혜자와 불교 세력을 상당히 곤란하게 해줄 의향도 있었다.
“한데, 최근 대인의 행보를 보며 소승이 참으로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자네의 깨달음은 사찰에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게. 이만하면 내가 충분히 들어줬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밥이나 먹게. 더 말하면 다시는 내 집에서 밥 먹는 일이 없을 것이네.”
“대인. 소승이 볼 때 유학보다 고구려와 적합한 학문은 없습니다.”
“밥이 넘어가나? 당장 말하게.”
다시 말하지만, 의연은 원래 전도유망한 유학자였다.
그가 ‘고구려와 유학은 제법 잘 어울려요.’라고 하니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