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고구려의 길(1)
14화 고구려의 길(1)
누웠는데 잠이 안 왔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자려고 했으나 금방 뒤척였다.
을지문덕의 말이 너무 강렬한 생명력을 보이며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고구려가 통일 중국과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싸우다가 무너지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을지문덕의 분석은 세기말, ‘너희는 이제 다 죽는다!’라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 예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강도로 살아 있었다.
왼쪽으로 뒤척이고, 오른쪽으로 뒤척이다가 다시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보기로 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을지문덕의 말대로 세력의 이탈이 발생하면 고구려는 어찌 될까?
솔직히 지금도 버거워서 숨을 헐떡이는 나라다.
만일, 현재 전력보다 약해지면 통일 중국이 아니라 백제와 신라도 감당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중국이 개입하지 않아도 한반도에 통일 왕조가 등판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고구려로서는 비극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고구려의 사대는 자주적인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니······아. 무슨 개소리야. 진짜.
아무렴 그렇게까지 망가지겠어?
“······.”
이걸 누가 장담하겠어?
그런데 애석하게도 고구려의 정가는 장담하는 분위기였다.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됐다.
상황은 간단했다.
영원히 싸워야 하는 ‘투쟁의 역사’를 안고 달려가는 고구려다.
고구려가 강하면 강할수록 통일 중국은 쉬지 않고 도발할 역사였다.
사대할 수도 없고, 죽을 때까지 싸울 수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뫼비우스의 띠였다.
여기서 내가 선택할 건 오직 하나였다.
고구려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차피 싸워야 하는데 약하게 만드는 건 미친 짓이니까.
다시 결심을 세웠을 때 수탉이 울었다. 마치 ‘나가서 일하자.’라며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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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탉의 재촉에 부지런하게 움직여 도착한 곳은 개간 사업을 진행할 곳이었다.
보면 볼수록 광활한 평야였다.
감상이나 하려 온 건 아니고 본격적으로 인력이 투입되었기에 온 것이었다.
한눈에 보더라도 수백 명의 인원이 모여 있었다.
며칠 지나면 1,000명은 거뜬하게 넘을 것으로 예상됐다.
고구려가 가장 좋은 점이 인원 동원이 정말 간단하다는 것이었다.
일반 백성을 데려오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예속민인 하호는 그냥 쉬웠다. 하호는 자유민은 아니지만 노비도 아닌 무리로서 귀족에게 종속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예속민이라고 하여 고구려인이 아니라는 건 아니다. 그저 신분상 하호는 일반 백성보다 아래고 노비보다 위였을 뿐이다. 물론, 어쩌면 이런 결이 완벽한 사회 통합의 걸림돌일 수도 있지만, 다 이유가 있는 것이기에 건드릴 필요도 없다.
또한, 인력을 크게 동원할 일이 많은 나로서는 편한 부분이기도 했다.
단적으로 살충제를 무기로 귀족들을 압박하면 가문당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을 말 한마디로 동원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다 떠나서 이건 정말 너무 좋았다.
물론, 뚱한 표정을 한 ‘농부’들의 표정까지 내가 어찌할 수는 없다. 창칼을 잡고 싶어 하는 저들의 호전성은 일단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됐고. 오늘은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테이프나 자르고 가볍게 브리핑을 한 뒤 농작물에 대한 이론을 적당하게 전달해줄 생각이었다.
그랬다. 그랬는데······
“대인.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태자라고 하면 수나라와 국운을 걸고 싸운 영양왕 즉, 고대원이었다. 그러니까 존엄하신 분이 ‘굳이’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아니, 땀 흘려 일하는 곳에 태자까지 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전을 챙겨야 하니 농부들도 눈치 보고 어려워할 게 뻔했다.
당장 나부터 태자를 챙겨야 하니 동선이 꼬일 수밖에 없다.
물론, 싫은 기색을 하거나 쫓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적당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는데
“하하하! 다들 잘 지내셨는가!”
웃음부터 호쾌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나는 조금 당황하며 부친 닮아서 풍채가 좋은 청년, 고대원을 쳐다봤다.
그런데
“전하!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소인들은 전하 생각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그러니까요. 참으로 서운합니다.”
“진정 이러실 겁니까.”
농부들의 반응이 진짜 폭발적이었다.
등판하고 한 마디 툭 던진 게 전부였는데 말이다.
심지어 멀찍이 있던 농부들은
“오오오!”
“아니, 태자 전하!”
“전하!”
미친놈처럼 전력 질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전하!”
“전하!”
“전하!”
“전하!”
······
“전하!”
“전하!”
나 한국에서 이런 장면 본 적 있었다.
아이돌이 공연할 때 팬들이 저랬다.
그러니까
“다들 진정하게!”
아이돌의 손 한 번 잡아보려던 팬들이 정말 딱 이랬다.
아니,
“전하!”
“내 손은 두 개며, 몸은 하나에 불과하지만, 오늘 하루는 많이 남았네. 그러니 질서를 지키며 기다리게!”
“하지만, 오늘이 가면 언제 또 뵐 수 있단 말입니까!”
태자라는 압도적인 후광까지 더해지니 강도가 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를 보좌하던 농부들도 내 눈치를 살폈기에 경거망동하지 않았을 뿐, 이미 마음은 고대원의 지척까지 달려간 상태였다.
당황스러운 아이돌 팬 미팅에 나는 계속 눈만 껌뻑이며 쳐다봤다.
“자자. 말하지 않았는가. 아직 시간은 많으니 기다리게. 절차라는 게 있으니 말일세.”
그러면서 고대원이 나를 향해서 걸었다.
난리를 치던 농부들은 순식간에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막리지.”
“전하. 오셨습니까.”
“기별도 없이 와서 언짢으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소인이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다만, 어찌 오셨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하하하. 막리지께서 고구려의 영광을 위하여 경작에 나선다고 들었습니다. 늘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첫날은 직접 와서 농부들의 사기를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니 오늘은 고된 일이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지 말고, 내게 맡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전하께서 하시는 일인데 소인이 어찌 나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막리지.”
고대원은 방긋 웃더니 몸을 돌렸다.
“우리 막리지께서 고구려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직접 경작을 시작하셨네. 나는 자네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흙과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할 것인데 그래도 되겠나?”
“하하하!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인들은 경작이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소인의 별명이 흙입니다. 전하.”
“소인은 세 살 때 흙과 대화를 했습니다.”
경작불가론자들이 순식간에 농자천하지대본을 외치고 있었다.
내 옆에서 눈치 보던 이들도 어느새 인파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러더니
“모처럼 씨름이나 한 번 하지! 내가 크게 상을 내릴 것이네.”
천하장사를 뽑겠다고 선언했다.
“오오오!”
“오오오!”
“오오오!”
아주 그냥 난리였다.
심지어 십 수명이 덩실덩실 춤을 췄다.
고구려 전통의 춤은 아니었고 서역에서 전래 된 호선무였다.
뭐라고 할까?
고래도 춤을 추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고구려 왕족은 정말 알에서 태어나서 저런 신통력이 있나? 라고 생각할 때였다.
“참으로 정겹지 않소?”
갑자기 뒤에서 들린 소리에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예를 취했다.
내게 하오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뿐더러, 익히 아는 목소리였기에 그러했다.
바로
“폐하.”
태왕 고양성이었다.
아니, 고구려 왕족은 진짜 알에서 태어났나?
왜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야?
그리고 태왕이 오는데 왜 전달이 안 된 거야?
또,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은밀한 척하는 거고?
“내가 이르지 말라고 했소. 모처럼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백성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소.”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태자는 농부들과 어깨동무하며 뛰어놀고 있는데, 태왕은 조용히 등장하여 흐뭇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이돌의 인기에 흐뭇해하는 기획사 사장의 포스라고 할까?
이 장면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거나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막리지. 내가 왜 전적으로 동의했는지 궁금할 것이외다.”
더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을지문덕의 분석 이전에 연자유와 온달을 비롯한 평양계 귀족과 보수파인 국내계 귀족은 물론이거니와 백성들까지 반대할 정도로 전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나라가 고구려였다.
고양성이 고구려 정계의 반응을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을지문덕과 결이 다른 정세 인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러한데 고양성은 국시가 전환될 수도 있는 ‘농자천하지대본’의 가치에 ‘막리지를 지지하오!’라며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 이것이 가장 큰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실로 그러하옵니다. 신은 어심을 감히 짐작할 수 없사옵니다.”
“다 아는 이야기를 해도 되겠소?”
“물론이옵니다.”
고양성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농부들을 애잔한 눈으로 바라봤다.
적어도 지금 그의 눈동자는 고대원조차도 많은 이들 중 한 명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선왕 시절 환도성의 간주리가 반란을 일으켰소. 그저 내가 태자에 책봉되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오.”
환도성은 국내도성 시절 산성의 역할을 했을 정도로 국내계 귀족의 핵심 거점이었다. 이곳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안의 정치적 의미는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태자 시절 나는 참으로 많은 번뇌에 휩싸였소. 어찌하여 우리 고구려는 늘 왕위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까. 어째서 늘 반란이 일어나며, 숙청하게 되는 것일까. 반란과 숙청은 한 번이 아니라 수 대에 걸쳐서 지속하고 강도도 줄어들지 않았소. 나는 이를 늘 고민했소.”
“······.”
“이 물음의 끝에 내가 도달한 곳은 바로 고구려의 한계였소. 그리고 나의 한계였소.”
여전히 고양성의 시선은 농부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입가의 포근한 미소도 그대로였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참담할 뿐이었다.
진심이 가득했기에 듣기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기에 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소.”
“고구려를 평안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며 결과였사옵니다. 어찌 부족하다고 하시옵니까.”
“틀렸소.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말이외다.”
“······.”
“왕권 강화는 세상의 모든 권력을 내가 가져야 하기에 부르짖은 게 아니외다. 과거 장수태왕께서 왕권이 부실하여 수천 명을 숙청하셨겠소? 아니외다.”
“······.”
“태왕호가 수립된 이후 고구려의 왕권이 초라하여 수 대에 걸친 내란이 발생하고, 수천 명을 숙청하는 일이 이어졌겠소? 그러니 이 또한 아니외다.”
“······.”
“다른 원인이 있었소.”
그 말과 함께 고양성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바라봤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부족하였기에 그 무언가를 도출하지 못하였고 바라보고 꺼낸 건 결국, 왕권 강화였소. 참으로 고루한 결론이었소.”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 되고자 싸우는 게 아니었듯 고양성도 권력의 집중을 위해 왕권 강화에 매진 한 게 아니었다.
이 또한 생존이었다.
고양성 개인이 아닌 고구려의 생존 말이다.
오늘, 나는 더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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