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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5화 (5/199)

5화 고구려의 별(2)

5화 고구려의 별(2)

평원왕 고양성.

이 사람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내우외환의 고구려를 다시 반석 위에 올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외교 역량은 즉위 이후에 바로 입증되었다.

과거 문자명왕 시절 동방의 패권을 공인받은 고구려는 국제 시장에서 연일 상한가를 기록했다.

그런데 고구려가 독주하던 국제 시장에 신라가 북제에 조공하면서 ‘이번에 상장합니다! 고구려보다 값이 싸다고요!’라며 공식 등판하면서 위기는 시작됐다.

그동안 ‘신라? 비상장 주식인데 언제 상장폐지 될지 알고 매입해? 전통적 우량주인 고구려에 투자하는 게 맞지.’라며 외면하던 북제도 드디어 신라주를 매입했다.

급기야 진흥왕을 동이교위로 책봉하며 고구려의 독점적 지위를 송두리째 흔들고자 했다.

북제는 신라주가 전처럼 상한가를 치지는 않더라도 꾸준한 우상향을 보일 것으로 기대했다.

신라 역시 기대에 발맞춰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야 했다.

그래야만 종래 고구려가 가졌던 확실하게 위치를 흔들 수 있었다.

이때 고양성의 대처가 놀라웠다.

그는 ‘그래? 우리도 북제 새끼들 무시해.’라며 사신 파견을 중단시켰다. 장수왕 이래 이어졌던 전통적인 대중국 외교 노선을 과감하게 폐기한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힘으로 일궈낸 것이다. 우리가 힘이 생기면 다시 찾을 자리다.’라며 신라를 향한 대대적인 압박을 시작했다.

결과 신라는 과거 무서운 기세로 점령했던 함경남도에서 퇴각하여 강원도까지 후퇴했고, 한강 전선에서도 한 걸음 물러나게 됐다.

즉, 모든 전선에서 퇴각한 것이다.

막상 이렇게 되자 기대를 모았던 신라주는 순식간에 휴지 조각이 됐다.

북제는 부랴부랴 고구려에 먼저 사신을 파견했고, 고양성은 ‘알았어~’라며 쿨하게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미 변화를 시작한 고구려의 외교 전술은 멈출 수 없었다.

신라의 성장과 맞물린 국제 정세의 변화는 언제라도 북제가 울타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양성은 적극적인 자세로 국제 외교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종래 형식적인 차원으로 교섭하던 남조와 밀도 있는 관계를 구축했고, 뻘쭘한 사이였던 왜국에도 지속하여 사신을 파견했다.

물론, 왜국과는 당장 의미 있는 관계성을 확보할 수는 없었으나 새로운 외교 전술의 수립은 근시안적인 관점으로 접근한 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제와 신라의 후방에 우호적인 세력을 확보하고자 한 방편이었다.

한 마디로 지금 고구려의 외교는 장수왕이 구축한 전통적인 북중국 중심 외교에서 완벽하게 탈피한 다원주의 외교였다.

이처럼 아예 새로운 외교 방침의 수립으로 고구려의 국제적 위치를 재확인하며 외부의 도전을 모조리 물리친 사람이 바로 고양성이었다.

그가 지금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막리지. 듣자니 위두대형 연자유와 크게 다퉜다고 들었소. 내가 걱정되어 부를까 했는데 직접 찾아오니 참으로 마음이 편하오.”

“그새 안학궁에 들려 폐하의 어심을 어지럽힌 위두대형은 참으로 옹졸하옵니다. 하옵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용안을 보고 있노라면 전혀 걱정은 하지 않으시는 것 같사옵니다.”

“티 났소?”

“그러하옵니다. 폐하.”

고양성은 너털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사정을 들어보니 막리지가 밥상머리에서 면박을 줬다고 들었소. 똥오줌 이야기를 했다지요?”

“고구려에 도입할 시비법을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시비법?”

고양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를 쳐다봤다.

“혹시 농업의 진흥을 꾀하려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무릇 농업이야말로 하늘 아래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음. 그렇지요? 농업이 잘되어야만 군량도 확보할 수 있으니 말이오.”

농업을 목적과 본질이 아니라 수단으로 생각하는 인식을 알 수 있었다.

무조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맞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뭘 바꿀 필요는 없다.

나중에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냥 본론을 말하면 된다.

“폐하. ‘인분’을 잘 활용하면 시비할 수 있으니 콩의 생산량이 몇 배로 늘어날 겁니다.”

“똥오줌으로? 신라인이 대동강에서 헤엄친다는 말보다 더 황당하오?”

“이미 서토에서는 가축의 분뇨로 비료를 만들고 있사옵니다. 신이 여기서 착안한 것이니 믿으셔도 좋사옵니다.”

“······.”

고양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충 ‘감히 태왕을 능멸하오?’라는 뜻이 담긴 것 같았다.

“막리지이기에 농업을 잘 다스려 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한 건 부정하지 않겠소. 하지만,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농법을 떠올릴 정도로 농업에 능하지 않았소. 아니, 구체적인 방법은 관심이 없었소. 막리지는 거문고와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오.”

왕고덕이 괜히 왕산악의 후손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정말 평화롭게 살아온 사람이었나보다.

농업 이야기하는데 대뜸 거문고 사랑이 언급될 정도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고양성도 마찬가지로 인분으로 시비한다는 걸 도무지 이해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했다.

어찌할까.

그냥 개인적으로 해도 될 일이긴 하다.

내 땅에서 내가 인분으로 시비하면 되는 거긴 한데, 여기까지 와서 혼자 농사지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만 해도 정말 별로였다.

나는 농사로 고구려를 환골탈태시키려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고양성을 설득하는 게 맞다.

그런데

“고구려가 시비법을 도입하지 못한 이유를 모르지 않을 것이오.”

고양성의 입에서 상당히 생산적인 말이 나왔다.

여전히 나를 쳐다보는 눈은 흐린 상태였으나 말은 또박또박 잘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선수를 쳤다.

“고구려에 시비법이 도입되지 못한 건 악순환이 반복되었기 때문이옵니다. 신이 조금 전에 고하였사옵니다. 서토의 시비법은 가축의 분뇨를 사용하고 있사옵니다. 고구려에 소와 돼지 그리고 양 따위의 가축은 많으나 분뇨를 모아낼 시설이 없고, 방법을 알지 못하옵니다. 아니, 먹일 사료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데 어찌 분뇨로 거름을 만들 수 있겠사옵니까.”

고양성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왕고덕이 정말 농사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하긴. 그러니까 돼지 목장에 대한 정보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겠지.

나는 상황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폐하. 신이 그동안 고하지 않았을 뿐 농법에 대해서 부지런히 익혔사옵니다.”

“음.”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공부한 내용을 간략하게 알려주기로 했다.

나는 실제로 공부했으니까.

“똥오줌이 아니라도 농업을 크게 일으킬 수 있사옵니다.”

“어떤 방법이오?”

“가장 근본적인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관개수로의 확보이옵니다. 자고로 지력을 되살리는 왕도는 관개수로를 잘 만드는 것이옵니다.”

“지금 새 도성을 축조하느라 역량을 기울이고 있소. 한데, 관개수로라고 하셨소? 농이 과하시오.”

지금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인 장안성을 축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국력을 기울인 일이었기에 다른 역사를 일으킬 여력은 없었다.

그러니 고양성의 말은 아주 옳은 것이었다.

다만, 흥미로운 건 지금 고양성은 상당히 즐거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가능성을 떠나서 이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았다.

“참으로 지당하신 하교이옵니다. 하온데, 신이 어찌 관개수로만 언급하겠사옵니까.”

“다른 안을 꺼내 보시오.”

“간단한 방법으로는 풀을 이용하는 초분이나 흙과 초목을 함께 태운 화분, 하천의 진흙을 의미하는 남니도 있사옵니다.”

자고로 비료에는 등급이 있고, 사용처가 다 따로 있는 법이다.

당장 가축의 똥만 해도 그렇다. 양의 똥은 말라 있기에 밭농사, 돼지의 똥은 쉽게 분해되어 논에 적합하다. 또, 화분은 토양 속의 산류를 없애기에 음습한 땅에서 사용해야 한다.

고양성이 물어본 남니도 지금 시행하면 시대를 앞서는 탁월한 시비법이긴 했으나 참으로 까다로웠다.

“남니는 성능은 탁월하오나 채취하는 방법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옵니다. 우선, 비가 오는 날에는 채취할 수 없사옵니다. 하온데, 맑은 날이라고 하여 다 되는 것도 아니옵니다. 구름도 적당하게 있어야 하옵니다. 심지어 하천의 있는 진흙이라고 하여 모두 남니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옵니다. 하옵고······.”

중국 강남 지역의 전통적인 비료인 남니는 인분과 비교될 만큼 뛰어난 성능이 있다. 하지만, 지금 고구려에서 이걸 사용할 이유는 없다. 인분이 넘쳐나는 데 굳이 인력을 투입하여 하천에 들어가서 바닥을 긁어낼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고가의 비료가 탄생할 뿐이다.

내 말을 모두 들은 고양성의 표정이 참으로 심각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진위를 고민하는 걸까?

이것이 아니라면······

“막리지가 그토록 자신 하니 만류하지는 않겠소.”

답변은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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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이나 웃음을 참고자 멈췄으나 도무지 안 되겠는지 연자유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대인. 참으로 송구합니다.”

“대사. 웃을 일이 아니외다.”

“하하하······문전박대라니요. 왕 대인께 그런 꼴을 당한 사람은 연 대인이 처음일 겁니다.”

“끙······.”

연자유도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끙 소리 내며 앓기만 했다.

듣고 있던 을지문덕이 조심스레 물었다.

“대인. 어찌하다가 문전박대를 당하셨습니까.”

“허. 문덕. 자네까지 이러긴가?”

사실 을지문덕은 왕고덕, 연자유와 같은 고위 귀족과 겸상할 수 없는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다. 하지만, 과거 왕고덕이 그를 아꼈기에 자연스레 여러 귀족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송구합니다. 한데, 왕 대인이 문전박대라니. 신라인이 대동강에서 낚시한다는 말보다 더 놀라워서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왕 대인께서 대체 뭐라고 하셨습니까. 설마 대놓고 ‘나가게’ 이러셨습니까?”

“차라리 그랬다면 내가 말도 안 하겠네. 하. 참으로 수치스럽군. 밥상머리에 앉아서 똥오줌 이야기만 쉬지 않고 했네.”

“······.”

을지문덕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부처님이시여.”

혜자가 경건하게 합장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서 정말······하.”

“왕 대인이 잘못한 게 맞습니다. 연 대인께서 진정하십시오.”

“대인. 소승이 오늘 대인을 위해서 108배라도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연자유를 위로했다. 이건 누가 보고 들어도 왕고덕이 잘못한 사안이었다. 밥상머리에서 똥오줌을 언급한다는 건 고구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대인. 어찌하다가 왕 대인이 똥오줌을 언급했습니까? 밥상이 차려지자마자 똥오줌 이야기를 하며 면박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만일, 이랬다면 왕 대인을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 나와 함께 콩밭을 보고 왔소. 그 뒤 농업을 진흥할 방법을 말하더니 똥오줌을 언급했소이다.”

그 말을 들은 을지문덕은 머릿속으로 스치는 말이 있었다.

-왕 대인께서 모종의 정치적 결단을 하면 내게 일러주겠는가?

벗의 말이었다.

‘농업의 진흥을 정치적 결단으로 볼 수 있을까?’

을지문덕은 일단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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