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고구려의 별(3)
6화 고구려의 별(3)
평소 침착하긴 했으나 종종 흥분하긴 했다. 하지만, 이토록 분기탱천한 연자유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신라인을 봐도 이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내가 고기 한 점 먹지 못했소.”
“허. 아예 시작부터 연 대인을 타박했다는 겁니까? 부처님의 자비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군요.”
“대사라면 나를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소.”
“소승이 아니면 누가 연 대인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런데 시비법이라. 이건 좀 의외이긴 합니다. 왕 대인은 농업에 정통한 분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소. 아주 옳은 말이오.”
연자유는 힘겹게 분을 삭히며 말을 이었다.
“왕 형님이 정략은 싫어하지만, 정책 입안은 누구보다도 뛰어나지요. 잦은 건 아니지만, 한 번도 부실한 내용을 꺼낸 적은 없소. 물론, 평소 크게 관심을 주지 않았던 농업이기에 의아하긴 했으나 결국, 나를 희롱하시고자 주춧돌을 쌓은 것이었소.”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니 말이외다. 내가······.”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을지문덕은 조심스레 한 마디를 보탰다.
“지금 생각해보면 왕 대인께서 괴이한 농을 하시긴 했습니다.”
“괴이한 농이라니? 무슨 말인가?”
“돼지 목장을 언급하셨습니다.”
“······.”
연자유는 흐린 눈을 했다.
혜자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연 대인. 정말 농에 불과했습니다. 평양에 돼지 목장이라니요.”
“하하하······이 형님이 거문고로 성불하실 때가 됐나 보오. 그런 농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그러나 을지문덕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농이 아니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무슨 말인가. 농이 아닐 수가 있나? 돼지가 왜 돼지인가? 돼지라서 돼지인데 평양 도성에서 돼지 목장을 찾는 말이 어찌 농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소인도 뭐라고 정확하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건 시비법은 농업의 생산력을 늘릴 수 있다는 겁니다. 만일, 인분으로 시비하는 방법이 정말 가능하다면 돼지 목장도 현실이 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
“연 대인. 왕 대인은 허언하지 않습니다. 또한, 복잡한 정략을 구사하지도 않으십니다. 늘 있는 그대로를 이르시는 분이었지요. 그렇다면 돼지 목장과 인분 시비법이 모두 진심일 수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을지문덕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는지 어느새 연자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더욱이 왕고덕에 대한 인물평은 을지문덕의 말 그대로였다.
특히, 국사와 관련한 일에서는 누구보다도 진중했는데 한 번도 농을 섞지 않았다. 그러한 인물이 농업 생산력과 직결되는 시비법을 언급했다는 건 지금이라도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음. 대사의 생각은 어떻소?”
“들어보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렇군요. 우리가 왕 대인의 평소 성정을 잠시 잊었습니다. 돼지 목장은 누가 봐도 농이라고 여겨졌고, 똥오줌도 비슷한 맥락이었으니 말입니다. 이 두 가지가 너무 강렬해서 가장 중요한 걸 놓쳤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문덕, 자네가 가장 중요한 걸······이런.”
말하다 말고 멈칫하자 혜자가 의아하여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폐하께 알현을 청하여 이 일을 전하였소.”
“예? 낭패가 아닙니까. 필시 폐하께서는 이 일로 연 대인을 두고두고 놀리실 겁니다. 일국의 대사를 알아듣지 못한 옹졸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거. 누구보고 옹졸하다는 거요?”
“연 대인이지요.”
“허. 아니, 밥상머리에서 똥오줌 이야기를 하니 오해를 안 할 수가 있소? 이거 참으로 골치 아프게 됐소. 그렇다고 실패를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외다.”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안학궁으로 달려가서 폐하께 ‘실은 막리지 왕고덕의 이야기에 일리가 있었다.’라고 고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대사의 말이 참으로 옳소.”
그런데
“음. 연 대인의 댁에 오기 전에 왕 대인을 만났습니다. 안학궁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을지문덕의 말에 연자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는 그 말을 왜 이제 하나?”
“허. 문덕. 가장 중요한 말을 가장 늦게 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인가?”
“이런 건 적장에게나 하는 걸세. 대사. 어찌 생각하시오?”
“대인의 생각이 곧 소승의 생각입니다.”
을지문덕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문진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구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벗의 출사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을지문덕은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이문진, 그는 고구려 최고의 재상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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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성이 시원하게 동의하긴 했으나 애석하게도 대화가 끝난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인분 시비법은 전례 없는 방법이었으니 기회비용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시행하자면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필요할 건데 이를 감행할 정도로 성과가 좋다고 자신하오?”
일국의 군왕답게 우려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고양성의 말대로 도성의 인분을 모아내는 건 진짜로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집마다 있는 측간에서 똥을 퍼내고, 통에 담고, 수레로 옮기는 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또한, 외곽의 똥 창고에서는 본격적으로 가공도 해야 하기에 시설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이건 불확실한 투자일 때나 하는 이야기다.
100% 승산을 자신하는 내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물론이옵니다. 신은 무조건 성공할 것이옵니다.”
“막리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작금의 고구려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소. 하여, 작은 실패에도 큰 위기를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롭소.”
“폐하.”
“만일, 막리지가 이토록 큰일을 도모했다가 실패하면 왕권이 흔들릴 것이외다. 그리고······.”
그 뒤로도 장황하게 말이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외교나 전쟁이 아니다.
심지어 정쟁도 아니다.
그냥 내가 똥오줌을 구해서 비료로 만드는 건데 조국의 운명까지 걱정할 이유는 아예 없었다.
아니, 애초에 평원왕 고양성의 치세는 내외로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왕은 조선의 왕과 달랐다.
조선의 왕은 신하의 사사로운 일까지 트집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왕권이 강하고 시스템이 체계적이었으나 고구려는 전혀 아니었다.
과장 좀 보태서 신하의 사적인 일은 왕에게 남의 나라 일이나 다름이 없다.
더욱이 내가 속한 왕씨 가문은 고구려의 정점에 있는 귀족 가문이며, 나는 무려 막리지다. 한 마디로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이 사람이 지금 왜 이러는 걸까?’였다.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 왕실과 조정에서 행하는 게 아니라 신이 사재(私財)로 진행하는 일이옵니다. 하온데, 내우외환이 왜 언급되옵니까? 실패해도 신이 실패하는 것인데 어찌 고구려의 국운까지 나와야 하는 것이옵니까?”
“아니지요. 성공하면 콩을 몇 배로 더 수확할 수 있는 일이오. 하면, 고구려의 국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팽창할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오. 틀렸소?”
“틀리지는 않사옵니다. 하온데, 왕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왕권을 더 강화할 기회가 없어지는 걸 우려하시는 것이라고 사료 되옵니다만.”
“그게 그거요. 그런데 그리 말하니 참으로 서운하오?”
이게 또 이해됐다.
일반 백성도 아니고 귀족 수천 명이 죽어 나가는 내전이 수시로 일어나는 고구려였다. 그만큼 국내계 귀족과 평양계 귀족의 뿌리 깊은 갈등에 몸살 하는 나라였다. 그런데 이를 억제하며 작금의 평화로운 정국을 구축한 사람이 바로 고양성이었다.
나는 이를 상기하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아니, 함께 하는 건 우려가 되고, 신이 혼자 하자니 서운하다고 하시옵니다. 신은 어찌해야 하는 것이옵니까?”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봤소. 보시오. 귀족이나 귀족이 아닌 이나 모두 똥오줌을 더러워했단 말이오. 한데, 막리지가 두 팔 벗고 나서는데 지켜만 본다는 건 태왕으로서 아니라고 생각하오.”
어지러운 화법이긴 했으나 듣자마자 담긴 뜻을 알 수 있었다.
눈을 껌뻑이면서 쳐다봤다.
그러니까
“정치적 부담이 없는 일이오. 하지만, 모두가 안학궁을 쳐다보며 크게 절할 것이니 나는 이를 그냥 넘길 수가 없소. 이를 잘 활용해야 할 것이외다.”
왕권 강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이래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구나 싶었다.
아니, 태왕이구나 싶었다.
인분으로 비료를 만드는 일로 ‘왕권 강화’를 꾀하려고 하다니 말이다.
아니, 인분을 치우는 일로 왕권 강화를 꾀한다고 해야 할까?
이래서 국사 수업에 왕권 강화가 그토록 자주 나왔나 싶다.
왕의 모든 통치 행위가 곧 왕권 강화로 연결되는 것이니 말이다.
또, 이러니 작금의 정국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거 같다.
엷게 웃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농업 혁명을 향해서 달리는 내 길이 이 시대의 가치와 부합하여 귀결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양성에게 부탁할 일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갈망하는 왕권 강화로 귀결될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아니, 무조건 될 것이다. 인분을 치우는 걸로 태왕이 칭송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이는 더 강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까.
“신에게는 폐하께서 더 큰 위력을 보이실 수 있는 방책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바로
“살충이옵니다.”
살충이었다.
일찍이 남송 사람 진부는 ‘줄기를 먹는 명충과 잎을 먹는 등충 및 뿌리를 먹는 모충과 마디를 갉아먹는 적충을 제거하시어······.’라면서 하늘에 병충해를 멈춰달라고 간곡하게 빌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로부터 비책을 얻었으나 바로 살충제였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뒤인 송원 시대에 등장하는 방법이었다. 아니, 그 뒤로도 병충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이러한데, 작은 효과라도 낼 수 있다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겠는가.
물론, 당대의 농서인 제민요술에도 석회 살충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송대의 진부농서와 원대의 왕정농서의 살충 방법을 보탤 것이니 효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건 작금의 천하에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인간이 도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이를 고구려에 바친다.
“신(神)의 권능을 폐하께서 취하시옵소서.”
고양성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그러나 찰나였다.
다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신하 왕고덕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이 시절 살충이라는 건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인분은 황당하지라도 시비법이 있긴 했으니 새로운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살충은 다시 말하지만, 신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고양성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차명(借名)으로 진행하시옵소서. 신이 하는 걸로 하겠사옵니다.”
“······.”
“성공하면 폐하께서 취하시옵소서.”
“잊으셨소?”
고양성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의 성공이 곧 막리지의 성공이며, 막리지의 실패가 곧 나의 실패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차명은 없소. 응당 내가 나설 것이오. 무엇이 필요하오?”
“석회이옵니다.”
고양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어이 내게 살충의 권능을 가져오시오.”
“반드시 그리하겠사옵니다.”
“또한, 나는 권능을 막리지에게 내리겠소.”
전권을 준다는 의미였다.
엷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저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시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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