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살짝 쿵 도이를 비꼬는 말투에 다희는 그저 배시시 웃어 보인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녀석의 얼굴이 마냥 반갑기만 하다.
벗뜨! 하지만!!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유부녀는 누가 유부녀야?!”
언제 그렇게 힘이 없었냐는 듯,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 다희는 옵션으로 살짝 흘겨보기까지 한다.
제 교실인양, 어느새 다희의 앞자리 빈 의자를 끌어다 앉은 민환이
고개를 살며시 갸우뚱거리며 묻는다.
“왜? 그럼 아니야?”
“당연하지!”
“뭐야? 친구라고 감싸는 거야, 지금?”
너무 강하게 나오는 다희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억양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더불어 다른 뜻이 담겨있을 법한 다희의 말에 쉽게 동요를 하며 캐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척이나 심심한 반응이었다.
“누가 그렇대!”
“깜짝이야.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람?”
“씨..... 무슨 반응이 이렇게 재미없어?”
“…….”
“도이가 궁금하지도 않냐? 넌? 그래도 도이는 너 걱정 많이 하던데.....
네가 그래서 나쁜 놈이란 소릴 듣는 거야! 알아?!”
“후훗.....”
무언가 뜻이 담겨있는 듯한 말과 억양에 민환은 그저 쓰디 쓴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웃음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곧 원래의 편안하고 장난기 가득 찬 그런 얼굴로 돌아왔다.
“근데 진짜 안 궁금해?”
“뭐가?”
“뭐긴 뭐야? 도이 말이지.”
결국엔 다희가 먼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물어주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어지간해선 물어보지 않을 것만 같은 민환의 행동에
혹시라도 타이밍을 늦춰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젠장!
“왜? 신도이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혹시 그 기생오라비가.....”
“말짱 꽝 됐거든.”
다희는 늘 유민을 칭하던 ‘기생오라비’라는 단어를 내 뱉으면서
무언가 말 하려는 민환의 말을 가볍게 끊는다.
“말짱 꽝?”
“그래.”
“뭐가?”
“뭐긴 뭐야? 유민오빠지....
근데, 정말 멋있었어. 그때의 상황 말이야. 완전 한편의 반전드라마였다니까?”
“느닷없이 멋있다는 말은 뭐며, 반전드라마는 또 뭐야?”
“뭐, 유민오빠가 안쓰럽긴 하지만....
솔직히 따지고 보면 유민오빠도 별로 나무랄 덴 없는 사람이긴 하잖아.”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무슨 소릴 것 같은데?!”
“아~ 진짜! 장난해?”
다희의 빈정거림에 이제까지의 심심한 반응과 다르게 곧장 반응하는 민환이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과는 다르게 두 귀가 번뜩였고, 두 눈이 더 크게 떠졌다.
가뜩이나 남자치고는 무척이나 큰 눈이 부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저렇게 크게 뜨면서 가뜩이나 가까운 거리를 좁혀오니까 더 부담스럽다.
젠장! 신도이 이 계집애 주변에는 왜 이렇게 하나같이 빠진 인물이 없는 거야!
아무리 친구의 동생이라지만(민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민환의 뛰어나게 귀엽상한 외모에
다희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 답답해!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 화상아!!”
“어쭈? 이 쪼끄만 게 어디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를까?”
“내가 지금 소리 안 지르게 생겼어?”
“피이~ 말도 없이 잠수나 탄 주제에... 참, 그러고 보니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아아~ 정말! 말 돌리지 말고!”
“아~ 진짜, 목소리 안 줄일래?”
점점 높아지는 민환의 음성에 다희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면서도 마치 큰 죄를 지은 것 마냥 교실 이곳저곳을 살핀다.
다행이도 민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패거리도.
다희의 입에서 묵직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이 썩을 놈아! 여기는 네 놈 교실이 아니란 말이다!
여기는 그 재수 옴팡 없는 차민아가 있는 교실이란 말이다! 응?!”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의 다희를 보며 그제야 민환도
전혀~ 전혀~ 생각지 않고 있던 민아의 존재를 의식했다.
동시에 녀석의 표정이 몹시도 구겨졌다.
그녀를 특별히 경계하는 건 아니지만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지 말고 잠깐 나가자.”
“어딜?”
“너란 놈의 그 화통 삶아먹은 듯한 소리를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곳.”
어떻게 들으면 조금은 기분이 나쁠 법한 이야기지만 민환의 반응은 별반 없었다.
다희의 그 말을 인정하는 듯도 했다.
“우리 학교에 그런 곳도 있어?”
.
.
성민을 만나지 못한 도이는 힘없이 늘어진 걸음걸이로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가 무의식중에 낯익은 곳으로 오고 말았다. 늘 유민과 함께했던 그의 집.
이제는 때 묻은 버릇이 되어 의식을 하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행동에 도이는 놀람 반, 후회 반의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묵묵히 뒤를 돌아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아직은 유민도,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가시 박힌 시선들 보내는 아빠도 마주치고 싶진 않다.
더군다나 그렇게 자신을 무시하던 유민의 부모님까지도.
그래서 도이는 혹시라도 유민과 마주칠세라 재빨리 그 곳을 빠져나왔다.
다행이도 오는 내내 유민을 비롯한 그와 관계된 그 집안사람들은 그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미안 오빠. 아직은 오빠를 마주칠 자신이 없어.”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말을 나지막이 지껄이며 어느새 도이는 버스를 올라탔고,
당분간 묵기로 했던 다희네 집으로 향했다.
늘 다니던 길목임이 분명한데, 삼년이라는 긴 시간 가까이 지냈던 곳임이 분명한데,
늘 다니던 그 길도, 늘 아랫목에 이부자리를 깔고 지내던 그 집도 어색하고 낯설기만 해
되돌아가는 도이의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해 보인다.
.
.
“저, 저기!”
민환의 표정이 그저 생기발랄하기만 하다.
너무나 좋아 좋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감정에 버스를 타고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단 걸음에 달려왔다. (사실, 자신의 애마를 이용했다.)
“뭐야?”
아무래도 점심시간 다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여기는 성민의 아지트. 성민이 총장으로 있는 폭주족 이글의 아지트였다.
오전에 도이가 다녀갔던 그 곳이었다.
마음이 마음인지라 다급했던 민환은 자신의 목적지인 지하계단을 밟기 전,
그 곳에서부터 천천히 위로 올라오는 한 놈을 잡아 세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오전에 이미 도이와 안면을 익혔던 정호였다.
아직까지 그 안에 머물렀다 이제야 나오는 건지 녀석의 의상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것인지,
아니면 도이의 정체가 찜찜한 것인지.... 놈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저기, 혹시 이글이라는 폭주족의 멤버입니까?”
민환은 다소 정중히 놈에게 물었지만 여전히 딱딱한 정호의 얼굴.
그에 덩달아 민환의 표정까지 구겨질 것 같았다.
어쩐지 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민환은 괜히 놈과 오랜 시간을 끌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권성민이라는 놈을 찾아왔는데,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오히려 민환이 내 뱉은 말은 역효과를 가져왔다.
녀석의 표정이 한층 더 살벌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놈이 민환을 향해 말했다.
“씨빠빠. 놈? 네가 지금 우리 짱더러 놈이라고 했냐?”
정호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한 듯한 얼굴이었다. 민환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왜, 뭐가 잘 못 됐습니까?”
“그럼, 아니라고 생각 해?”
“예?! 아니, 대체 내가 뭘 잘못 했기에.....”
차게 얼어붙은 듯한 정호의 표정과 어투에 민환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잠시 아차 싶은 순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른쪽 뺨이 화끈거리기까지 하다. 민환은 너무도 어처구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