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52화 (53/91)

52.

“성민이 만나러 왔어요?”

“네에....”

그녀가 직접 이 곳 까지 성민을 찾으러 올 거란 생각을 전혀 못했던지,

도이의 등장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낯빛을 띠더니,

이제는 어느 정도 본 페이스를 찾아 심드렁히 묻는다.

“그 자식 여기 없는데.”

“그래요?”

“네.”

“그럼.. 언제.. 쯤... 오면 만날 수 있어요?”

무척이나 풀이 죽은 음성에 진오는 물끄러미 도이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 했다.

“당분간 안 올 텐데.”

“안... 와요? 성민이 여기 안 와요?”

“아마도요.”

도이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진다. 절망적인 얼굴이었다.

“나중이라도 성민이랑 연락 되면 말은 전해줄게요. 그 쪽이 다녀갔었다고.”

“미안하지만 그래 줄래요?”

“근데, 이름이 뭐예요?”

“네?”

“이름을 알아야 전해주던 말던 하죠.”

“아아.... 도이예요. 신도이.”

“알았어요.”

“꼭 좀, 부탁 할게요.”

진오는 간절하면서도 정중한 태도로 부탁을 하는 도이를 제치고,

그녀의 마지막 말도 듣지 않은 채로 굳게 닫혀있던 철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휑하니 비워진 진오가 있던 자리.

도이는 그래도 안면이 있는 존재가 사라지자

잠시 잊었던 긴장감이 두 배로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진오처럼 다소 쌀쌀맞더라고 그렇게 모른 채 들어가 줬으면 좋으련만,

그들은 하나같이 도이의 작고 뽀얀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다만, 진오가 나타나기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건,

부담스러운 시선을 보내긴 보내지만 그 시선이 전처럼 장난질을 친다거나

껄렁껄렁 거리는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은 격양된 듯하면서도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또한 잔뜩 긴장한 그런 눈초리였다.

“저, 저기요 누나.”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또 다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쭈뼛쭈뼛 거리는데,

다소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짓궂은 장난질을 쳐오던 놈이

웬일인지 공손하게 도이를 불러왔다.

도이가 그 녀석의 불림에 화들짝 놀랐지만, 그 놀라는 모습을 보며

그는 도이보다도 더 화들짝 놀란다.

“왜, 왜요?”

“아, 아깐 정말 죄송했어요.”

“네에?!”

“우리 짱 찾아오신 줄도 모르고, 정말정말 죄송해요.”

“저, 저기, 괜찮은데....”

“아니요, 제가 안 괜찮아요. 정말 죄송해요.”

“아, 저기....”

“그, 그래서 말인데요... 아까 있던 일은 가급적이면 잊어주세요.”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상당히 비굴하면서도 불쌍한 표정으로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예견치 못한 그의 행동에 도이는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도이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을 가면 갈수록 더 절실해져만 간다.

까딱하다가는 눈물이라도 쏟을 것만 같은 그의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도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듯 끄덕였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도이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훤히 터주었다.

도이는 성민을 만나고자 했지만 만나기는커녕,

만나지 못한 지난 며칠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로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설사, 누군가가 더 있으라며 잡아두려 했다면

그들에게서 풍겨지는 기세에 눈물을 터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민환이나 그동안 봐왔던 성민의 모습이

다소 껄렁껄렁하긴 했어도 참 착한 녀석들인 것도 같다. -_-;

“씨빠빠. 존나, 십년감수했네.”

길이 터지자 부리나케 그 길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도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꽤나 무거운 한숨과 함께 그의 입에선 절로 욕설이 터져 나온다.

“야, 뭐야? 저 여자 뭐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새꺄!”

“짱하고 관련된 여자 아냐?”

“모르지, 짱하고 관련됐다고 드나드는 계집이 어디 한둘이냐?”

“그건 그런데, 이 여자는 왠지 느낌이 틀리니까 그렇지.

설마, 이 여자가 짱이 좋아한다는 여자 아니야?”

“틀리긴 뭐가 틀려? 여자가 거기서 거기지.”

“아무리 다른 계집들이랑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여자라면 죽어도 관심 없던 짱이 저런 여잘 좋아할까?”

“또 모르지.”

“그러고 보니 왜, 얼마 전에 백송이랑 민진오가 그런 비스 무리한 얘기 했었잖아.”

“근데 진오가 했던 말은 뭐야?”

“뭐?”

“짱을 버린 여자라는 말.”

“글쎄.....”

이미 사라진 도이와 아지트 안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진오 사이에서 오갔던 말을 토대로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의문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전혀 가능성 없다면서 가능성이 있는,

아니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심오한 토론을 벌인다. -_-;

.

.

점심시간이 찾아오자 다희는 그저 책상위에 넙적 엎드려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이 함께 점심을 먹자며 다가왔지만 다희는 쓸쓸히 고개를 내 저으며 거부했다.

교실은 휑하니 비워졌다.

“히유~”

“…….”

“히유~”

꼭 빵빵하던 풍선 속에 가득 찬 공기가 맥없이 빠져나오는 것만 같은 소리를 내며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있는 다희.

배가 고픈지, 뱃속에서는 진작부터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쳐 댔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나쁜 계집애, 도대체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

기다리는 사람 생각해서라도 연락 좀 해 주지.”

4교시 도중에 남자친구에게로부터 맛있는 점심을 먹으라는 문자 한통을 받고는

내내 잠잠한 핸드폰을 보며 궁시렁 거린다.

전화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전화를 해 봤자 연결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오지도 않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 때―

이제 점심시간이라고는 십 여분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누군가가 다희의 곁을 다가온다.

다희는 그저 같은 반 친구들 중 누구려니 생각 한다.

혹은 자신의 앞자리나 주변 어느 자리의 주인이 돌아오는가 보다 했다.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뭐해요?”

하지만 들려오는 건 너무나 오랜만이라 깜박하면 잊어버릴 뻔했던 그 낯익은 음성이었다.

“근데 오늘은 왜 혼자야? 그 고집 불통에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 유부녀는 어디 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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