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17화 (18/91)

17.

“도이야!”

해가지고 어둠이 밀려 온 지도 꽤 지난 것 같다.

정확한 시간까지야 알 수는 없었지만

잠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느라 의식하지 못한 사이

주위는 온통 새카만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모....”

“여기 있을 줄 알았다....”

적당히 비탈진 길을 따라 올라와 도이의 곁에 마주 앉은 이모.

쌍둥이 자매마냥 엄마를 꼭 닮은 모습에 도이는 말없이 그녀의 가슴팍을 끌어 않는다.

살짝 그늘진 얼굴은, 오늘따라 유난히 엄마가 그리워 보인다.

“배 안고파? 얼른 내려가자. 저녁 상 차려 놓은 지가 벌써 반시간이야.”

“아직 저녁 안 먹었어?”

“너 기다렸지. 오랜만에 이모 집 놀러왔는데 혼자 먹일 순 없잖아.”

“나 왔는지는 어떻게 알고....”

“다 아는 수가 있어,”

이모는 살포시 가벼운 미소만을 머금었다. 그 이상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어디서 좋은 냄새가 난다 싶었더니, 우리 언니는 벌써 저녁식사 하셨네?”

대신에 동그랗게 솟은 무덤 앞에 놓인 미역국과 쌀밥을 보며

대견하다는 듯 도이의 머리를 쓸어 내렸다.

“그만 내려가자, 이제 너도 밥 먹어야지. 이모부가 우리 도이, 아침나절부터 기다렸어.”

“응..... 이모.”

이모가 먼저 흙먼지를 털고 일어났고 도이가 연이어 일어섰다.

그 때......

“발이 왜 그래?”

두 사람이 나란히 달빛을 받으며 걸으려는 찰나, 이모가 도이의 다친 발을 보았다.

아무래도 부은 정도가 심했기에 평소보다 몇 배나 느린 걸음을 걸었으니

이모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 그냥, 어쩌다가.”

“그 발로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괜찮아 이모. 그냥 인대만 조금 늘어난 것뿐이니까.”

“조심했었어야지.”

이모는 무척이나 속상한 눈치였다.

그에 도이는 살며시 이모의 팔에 제 팔을 끼워 넣으며 정말 괜찮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주위가 온통 어두운 게, 해가 진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러나 짙게 깔린 어둠을 타고 달빛을 머금은 그들의 뒷모습은 더 없이 다정해 보였고,

아픈 발을 절고 있지만 도이의 얼굴은 그 어느 날보다 밝아보였다.

.

.

“오면서 전화 하라니까 더럽게도 말은 안 듣지.”

오후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울 때 도이는 버스를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불쑥, 앞에 나타나서 크지도,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낚아채가는 녀석.

잔뜩 심술이 난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네가 여기 왜 있는데?”

“왜긴 왜야? 말 안 듣는 애물단지 하나 납치하러 나왔지.”

민환은 자신의 팔을 내밀면서 도이가 다리에 무리 없이 버스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내가 이 시간에 올 건 어떻게 알고?”

“양평에 전화 해봤지.”

“이모랑 통화했어?”

“그러니까 나왔지.”

말은 톡 쏘아 붙이지만, 그래도 도이를 배려해서인지 아주 느린 걸음을 걷고 있었다.

“전화기를 폼으로 달고 다녀? 받지도 않을 거면서 들고 다니긴 왜 들고 다니는지, 원~”

“너무 그러지 마라. 배터리가 없었다고.”

“핑계도 좋지.”

“핑계 아냐.”

이래저래 쏟아지는 핀잔에 도이는 그저 고분고분할 뿐이다.

딱히 민환이 마중 나왔다는 사실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뭐, 보통은 남자친구가 마중 나와 주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이 으레 당연한 일이지만,

도이에게는 예외인 모양이다.

오히려 민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인다.

“다리는 어때?”

“보시다시피.”

“저녁은 먹었어?”

이제서 버스를 내린 사람에게 하는 질문 치고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버스 안에서 저녁을 해결 한 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니.....

“저녁 먹기엔 아직 이르지 않아?”

“이르긴 뭐가 일러? 벌써 다섯 시가 넘었는데.”

“너, 배고프구나?”

“누가 그렇대?”

버럭 성질을 부리는 녀석을 보며 피식, 도이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걸쳐진다.

“민환아.”

“나 배고픈 거 아니라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버럭 소리 지르는 게 영 심상치 않다. -_-;;

“누가 뭐래?”

“그, 그러니까 그게....”

“내가 배고프다고.”

“어?”

“오랜만에 이 누나, 맛있는 저녁 좀 사 줄 생각 없어?”

“너, 나한테 돈 맡겨놨냐?”

“....-_-;; 쪼잔 하긴. 치사하다 치사해. 내가 더러워서라도 굶고 만다.”

“좋은 생각이야.”

저벅저벅, 앞을 향해 걸어 나가 능숙한 손짓으로 택시 한대를 잡아 세우는 민환.

그를 보는 도이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그런다고 내 얼굴 안 뚫어져. 얼른 타기나 해, 이 느림보 곰탱이야.”

“씨이, 말을 해도 꼭.....!”

“뭐해? 안 탈거야? 아저씨 기다리잖아.”

투덜투덜, 자꾸만 삐딱 선을 타며 말을 하지만,

그래도 민환은 도이가 택시 안에 안전히 앉을 때 까지 문을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앞좌석에 앉는다.

민환은 어디어디로 가 달라며 목적지를 말했고,

차가 막혀서인지 택지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딱히 말이 없었고,

아픈 다리를 이끌고 양평까지 다녀온 탓인지, 많이 피곤해 보이는 도이는 깜박 잠이 들었다.

“야, 신도이!”

“..... 어디야?”

“밤샜냐? 무슨 잠을 깊게 자는지, 어째 깨워도 몰라? 다 왔어. 내려.”

민환은 요금을 지불하고 앞에 있는 건물의 내부로 들어갔다.

도이는 잠시 주변을 살펴봤다.

꽤나 익숙한 이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디 가는 건데?”

“....밥 먹어야지.... 배고프다며?”

무뚝뚝하게, 그냥 툭, 내 던지는 말 이었지만, 도이는 피식 환하게 웃어보였다.

역시, 민환은 배가 고픈 것이었다는 확신을 하면서. -_-;;

“다리 때문에 다른 데 보단 여기가 낳을 것 같아서. 괜찮지?”

“당연하지.”

“뭐 먹을래?”

“음.... 오늘따라 설렁탕이 땡기는구나.”

“설렁탕? 하여간 식성 하나는 특이하다니까.”

“왜? 설렁탕이 맘에 안 들어? 그럼 선지로 먹을까?”

“..............-_-;;”

잠시 민환의 미간이 오만가지 상으로 일그러진다. 하지만, 이내

“아줌마, 여기 설렁탕 둘이요.”

“꼭, 자기도 따라 먹을 거면서 그러지.”

“그래도 난 남자고, 넌 여자잖아.”

“너가 아니라 누나.”

“암튼.”

아주 잠시 그렇게, 두 사람은 별 일 아닌 일로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가 이내 약간의 시간이 흘러갔고 주문한 설렁탕이 나왔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을 내 뿜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설렁탕은 그래도 먹음직스러웠다.

“이야~ 역시 맛있다.”

“날도 더운데 꼭 이런 걸 먹지.”

“자고로 이열치열이랬어.”

“그래서, 땀 질질 흘리면서 먹으니까 좋냐?”

“응. 좋아. 근데 넌 왜 안 먹어?”

저게, 배가 꽤 고플 텐데.... 왜 안 먹지......?

하면서도 도이는 연신 입김을 불어 뜨거운 열을 식히며

제 몫인 설렁탕을 입으로 떠 넣었다.

그러나 민환은 아직도 수저를 들지 않는다.

그를 이상하게 여긴 도이는 덩달아 수저를 놓았고 마주앉은 민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배고픈 거 아니었어?”

“배 안 고프다니까!”

“그래서 안 먹을 거야?”

“신경 끄고 누나나 많이 드셔.”

찬 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는 민환의 모습이 오늘따라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도이는 왜 그러느냐, 혹시 다른 할 말이 있느냐, 이런 저런 것을 캐묻기 시작했다.

정말 배가 고파서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말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고자 데리고 온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민환은 내내 아니라며 할 말도, 특별한 일도 없다면서 어서 먹기나 하라고 했지만,

도이의 끈질긴 추긍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물론, 그걸 바라고 더 아니라고 잡아 뺏을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배제 할 순 없다.)

그래서 결국엔…

“저기.....”

“이게 뭐야? 사진이네?”

지갑 안에 들어있던 사진을 천천히 탁자위로 내민다.

“어. 사진이야. 근데....”

“어? 이거.... 민주.... 아니야?”

천천히 사진에 박아두었던 고개를 들어올린 도이를 보며 민환은

지독히도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니 눈에도 민주로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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