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미터앞 그녀석-15화 (16/91)

15.

다행이도 엄마는 한 시간 가량이 지난 후에 깨어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잠시 놓았던 정신을 추스른 것뿐이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엄마는 다소 멍한 정신으로

단단한 감기 몸살이라도 걸린 사람마냥 끙끙 앓았다.

반면에 아버지는 계속해서 밖을 나가셨다.

엄마가 저리도 아픈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버지.

어디에 무슨 일로 그리 바삐 움직이는 지 알 수 없는 도이는 그

저 갑갑하기만 했고 불안하기만 했다.

“엄마, 나왔어.”

“....그래.”

“아빠는?”

“....몰라.”

며칠 새 엄마와의 대화에서도 많은 변화가 왔다.

평소 같으면 이제 왔냐며, 밖은 춥지 않냐 며, 배고프지 않냐 며

이것저것 물어 올 엄마였지만

오히려 도이가 이것저것 물어야만 마지못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하는 엄마였다.

“하아.... 짜증나.....”

마냥 누워 멈출 줄 모르는 한숨과 앓는 소리만을 내는 엄마와

며칠 째 소식이 없는 아버지 사이에서 도이도 차츰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 때는 그 추운 겨울의 끄트머리즈음이었다.

아빠는 하루가 지나면 지날수록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일주일 동안 5000만원이라는 거금을 구하지 못하면 넘어갈 것만 같았던 집은,

어찌 된 영문인지 무사했다.

그러나 집안의 형편은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엄마는 약으로 하루하루를 버텼고,

도이는 짙은 한숨과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즈음, 오랜만에 그 집이 시끄러워졌다.

작은 소동이 일은 것이다.

행복한 웃음을 전해줄 소동이 아닌 어린도이에겐 참혹하고 끔찍한 선물을 안겨줄 소동이...

오랜만에 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며칠 새 코빼기도 안 비추던 아버지의 귀가임을 짐작했지만

아무래도 아니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어왔다.

그 인기척은 어딘가 모르게 거칠었기 때문이다.

“도이야 뭐하니? 밖에 누구 왔나보다.”

“어, 사람 있네. 이봐요, 문 좀 열어봐!”

도이는 일부러 숨죽인 채,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사람이 있음을 알려선 안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그간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과,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엄마와 아빠의 말다툼 속에서 도이는,

신경이 무척이나 예민했던 때였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부턴가.....

사람과의 마찰을 피하게 되었고 대인기피증이라는 증세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지난겨울부터 엄마와의 대화는 단절되었기에 엄마는 그를 알지 못했다.

“엄마, 제발......”

아주 희미하고 미약한 음성이었지만, 그 음성 하나에도 예민해지는 도이였다.

어쩐지 꺼려지는 문 밖의 사람이 절대로 듣질 않길 바랐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귀신같이도 미약하기 그지없는 엄마의 목소리도 다 담아 들었다.

그들이 정확히 누군지도 모른 채로 도이는,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야만 할 상황이 온 것이다.

“이봐요, 왜 이렇게 뜸을 들여?”

“빨리 빨리 좀 열어봐요!”

쾅쾅쾅. 자칫하면 문을 부스고서라도 들어올 것만 같은 기세에 바싹 긴장감이 오른다.

도이는 맨발로 현관에 섰지만 쉽게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어쩐지 두려운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문득 스쳐지나가는 너무나 뻔한 영상하나.

보통의 영화나 드라마 따위에서 보면 사업이 잘못되거나 하는 등의

돈 문제로 말썽이 생기면 들이닥치는 사채업자들이나

온 가구에 들러붙는 노란색의 차압딱지.

“도이야,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밖에 누군데 이렇게 시끄러워? 응?”

“어, 엄마.....!!”

쾅쾅쾅. 현관을 두들기는 소리는 점점 더 해가면 더했지 덜 하지 않았다.

그에 안방에서 머리를 싸매고 누워있던 엄마가 다소 짜증 섞인 얼굴로 나온다.

그리고는 벌컥, 열지 말았어야 했을 문을 열고 말았다.

“당신들 뭡니까? 누군데 남의 집 앞에서 이렇게 행패.....”

“신씨 어디다 숨겼어?”

“뭐, 뭐라는 겁니까? 지금?”

“당신 남편 말이야, 어디다 숨겼어? 앙?”

“무슨 소리냐고요?”

그들은 다짜고짜 아버지부터 찾기 시작했다.

“우리도 기다리다, 기다리다 안 되서 온 거야. 그러니까 발뺌할 생각 하지 말라고!”

“대체 누가 누굴 숨겼다는 거예요? 네?”

엄마는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허나 그들은 막무가내로 엄마를 밀치고 거실을 차지했다.

제집 안방인 양 아주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들의 횡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원한 음료수를 찾아 냉장고를 뒤지는가하면,

점심 한 끼도 재대로 챙겨 먹지 못한 양 반창 통까지 들춰본다.

물론, 그 이상의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많은 행동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배째라였다.

도이네 가족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돈임이 분명한데도 받지 않으면 못 나간다는 식이었다.

“아니면, 돈을 내 놓던지”

“그래요, 아무튼 어느 쪽이고 사단을 보자고요!”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감히 누구 돈을 때 먹으려고 그래?!”

그 와중에도 거실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대화들이 한창 오고갔다.

도이는 도통 알 수 없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 그저 멍하니 한쪽 구석에 서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꼭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것 마냥 초라해 보인다.

허나 도이는 그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다못해 나가라는 말 한마디조차 하기엔 너무나 어리고 무기력했다.

정확한 내막도 모르거니와 자칫 하다간 엄마에게 큰 사단이라도 날까 겁까지 난다.

“이것들 봐요! 난 당신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왜 내 남편을 찾는지 모르겠네요.

여긴 엄연한 가정집이고,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들이 들어와서 횡포를 부리고 있는 걸

가만 볼 수가 없다고요!

당장이라도 가택 침입죄로 고소하기 전에 나가 주세요!”

“가택침입죄? 훗. 웃기는 군. 이봐요, 아줌마.

우리라고 여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그러게, 이런저런 더러운 꼴 보기 싫으면 돈을 갚던가, 아니면 당신 남편을 내놓던가.”

“그러게, 책임 질 능력도 없이 사채를 쓰긴 왜 써?”

“사, 사채라뇨?”

엄마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리고는 그들의 말에 사색이 되어 한동안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감히.

그들은 엄마의 그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양, 시시껄렁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린 양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돈이 될 물건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정말이지 그들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어머, 이거 결혼 패물인가보네? 이건 좀 돈이 되겠는 걸?”

“어디 봐요, 음..... 흥정만 잘 하면 돈 천은 나오겠는데?”

“그래? 어디 나도 좀 봐봐.”

거실을 빼앗긴 것도 분해 죽겠는데, 안방이며 어디며, 온 집안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제 집 안방을 드나다는 양, 온 집안을 들쑤시기 시작했고,

어디서 귀신같이도 잘 찾는지, 엄마의 결혼 패물과 옷장 속에 잘 숨겨 두었던 통장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돈이 될만한 것들을 모조리 꺼내온다.

“어, 엄마!”

“도, 도이야, 저 사람들 도대체 뭐니? 왜 내 옷장을 뒤지는 거야?

왜 내 옷장을, 왜 내 패물을....

왜... 내 집을...

아.... 아파... 가슴이... 답답해... 하아....”

“어, 엄마! 엄마!! 엄마!!!”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의 도이는 사채가 정확히 무얼 말하는 건지는 몰랐다.

하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고,

사채라는 말 한마디를 전해들은 이후부터 그들을 향해

그 어떤 말로도 대항 하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맹목적으로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 망할 인간..... 하아....

나쁜... 인...간....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하아.....”

그들의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행실에 끝내 엄마는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들의 손을 거쳐 그들의 가방으로 옮겨지는 것들을 보면서

끝내는 가쁜 호흡을 내쉬고 만다.

위험하다.

하얗게 질색한 얼굴도, 고르지 못한 채로 헉헉거리는 호흡도,

점점 초점을 잃어가는 눈동자도 모든 게 위험했다.

더군다나 엄마는 한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쇼크가 올 것만 같았다.

도이는 재빨리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통화를 마치곤 엄마를 돌아보았다.

이미 그 자리에 납작하게 드러누워 의식을 잃은 엄마를.

“엄마, 엄마!! 눈 좀 떠봐. 숨 좀 셔봐!”

도이는 재빨리 엄마의 상채를 무릎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엄마의 가슴께를 붙들고 흔들어 보지만, 손위로 느껴져야 할 맥박이 없다.

두근두근, 작게나마 뛰고 있어야 할 심장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의식을 잃은 순간 멈춰버린 것이다.

그들은 쓰러져버린 엄마를 마치,

동내 개 보듯 그렇게 슬쩍 흘겨보더니

이내 더 이상은 있어봤자 거둘 수확이 없다는 판정이라도 지은 양 유유히 빠져나갔다.

뻔뻔스럽게도 고개를 버젓이 들어 그 짧은 목에 힘을 잔뜩 준채로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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