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0화 (490/605)

수상한 움직임

2024년 1월 09일 21:00 (라트비아시각 14:00),

라트비아 리가 EU 본부 대표이사회 회의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원형 탁자에 EU 회원국의 대표들이 앉아있는 가운데 의장이자 대표이사회의 위원장인 마리스 펠식스 의장이 의사봉을 한번 두드리고는 회의 시작을 알렸다.

쾅!

“그럼 지금부터 어제 상정에 올렸던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 제재 및 나토군 참전 건에 관한 투표를 진행하기에 앞서 이와 관련하여 회원국 대표들의 자유발언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발언할 회원국 대표분은 자유롭게 발언해 주세요.”

마리스 펠식스 의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독일 대표인 요한 호프만 장관이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제가 먼저 있습니다.”

“호프만 대표! 발언하세요.”

요한 호프만 장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원국 대표들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의장님! 회원국 대표 여러분! 사실 이번 상정 건은 하루 만에 자국의 정상과 얘기하여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당연히 우리 총리께서도 이번 상정 건은 매우 중대한 건이니 정상이사회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독일은 공식적으로 의장님께 이번 상정 건을 정상이사회로 이첩 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에 알았다는 듯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프만 대표! 정상이사회로의 상정 건을 이첩 하려면 회원국 중 삼분에 일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는 건 잘 아시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공식적으로 요청하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발언해 주세요.”

이때 한쪽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미 국무부 메인 존슨 장관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 빌어먹을 호프만 자식이 일을 꼬이게 하는군”

“제가 하겠습니다.”

이번엔 터키 대표 뤼슈티 젠킨 장관이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터키 대통령 역시 이번 상정 건은 정상이사회에서나 다뤄야 할 중대한 사안이라 하셨습니다. 고로 터키 역시 호프만 장관과 같은 의견입니다.”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이번엔 스페인 대표인 파블로 산체스 장관이 손을 들고는 바로 의사를 피력했다.

“산체스 대표 발언하세요.”

“감사합니다. 의장님! 상정 건이 중대하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정상이사회로 이첩까지 할 부분은 아닌 거 같습니다. 하루면 자국의 정상과 충분히 협의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저는 기존대로 금일 상전 건에 대해 투표를 했으면 합니다. 이에 정상이사회로 이첩 하는 걸 반대합니다.”

“이탈리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상이사회까지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정도 사안도 대표이사회에서 결정을 못 한다면 뭐하러 대표이사회가 있겠습니까?”

공식적으로 이첩 건에 대한 동의안 투표를 하기도 전에 스페인 대표와 이탈리아 대표가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했다. 이에 요한 호프만 장관이 언성을 높이며 다그쳤다.

“아니! 두 분은 이번 상정 건의 중요성을 모르는 겁니까?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도 갈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상정 건입니다. 이것만큼 중대한 사안이 어딨습니까?”

“호프만 대표! 그건 너무 극단적인 생각 같은데요? 여러 국가가 서로 간 충돌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하는 건 대한민국 한 국가입니다.”

파블로 산체스 장관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3년 전 대한민국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국가입니다. 우습게 볼 나라가 아닙니다.”

이때 이방인으로서 듣기만 하던 메인 존슨 장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의장님!”

“음, 상정 건과 관련되어 있으니 발언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메인 존슨 장관은 고개를 돌려 요한 호프만 장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 호프만 장관께서 미국도 대한민국에 전쟁에서 졌다고 하셨는데,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우리 미국은 세계평화를 위해 전쟁 확대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대한민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제대로 잡고 싶군요. 어쨌든 우리 미국은 본토에 큰 피해를 보았음에도 세계평화를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3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주변국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원흉국가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친애하는 EU 회원국 여러분께 어제와 같은 상정 건을 제안한 것입니다.”

할 말을 마친 메인 존슨 장관이 자리에 앉자 곧바로 터키 대표 뤼슈티 젠킨 장관이 반론을 제기했다.

“3년 전, 전쟁발발 원인은 중국이지 않습니까? 또한, 일본 역시 중국과 동맹을 맺고 대한민국을 공격했고요. 그리고 이번 전쟁 역시 러시아에서 먼저 전쟁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중국 또한 그렇고요. 아닌가요? 사실을 오도하는 말씀을 삼갔으면 합니다. 메인 존슨 장관님!”

“오도요?”

“네, 사실이 명백한 일을 그렇게 오도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허허, 터키가 쿠르디스탄 독립 건으로 대한민국에 많은 걸 받았는가 봅니다. 이렇게 얼굴에 핏대까지 서가며 변론하는 걸 보니 말입니다.”

“뭐요? 이 사람이 지금 말이면 단줄 아시오?”

“흥분하는 걸 보니 많이 받긴 했는가 봅니다?”

예전 같으면 미국에 찍소리도 못 낼 터키였지만 지금은 당당히 EU 회원국이었고 더군다나 근래 대한민국으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으며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크게 성장한 터키였다.

“저, 저, 오만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존슨 장관!”

“오만이요? 제가 대체 뭐가 오만하다는 겁니까? 도리어 터키가 요새 오만해진 듯한데요?”

탕! 탕! 탕!

“그만! 그만! 그만 하세요.”

서로를 향한 언사가 심해지자 마리스 펠식스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며 대화를 중단시켰다.

“두 분! 흥분을 가라앉으세요. 대표이사회 회의 중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의장님! 회의 분위기가 더 나빠지기 전에 일단 상정 이첩에 대한 동의안 투표를 먼저 했으면 합니다.”

요한 호프만 장관의 말에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슬쩍 메인 존슨 장관을 봤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거렸다.

이에 메인 존슨 장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 그럼 먼저 상정 건에 대해 정상이사회로 이첩 하는 것에 대한 동의안 투표를 하겠습니다. 이첩에 찬성하는 분 손들어주세요.”

마리스 펠식스 의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손을 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메인 존슨 장관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손을 든 대표자들은 총 10명, 30명 중 10명이니 삼분에 일이 넘어 동의안이 통과된 것이었다.

“동의안 결과를 발표합니다. 상정 건에 대한 정상이사회 이첩 찬성은 총 10명으로 정확히 삼분에 일이기에 동의안이 통과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탕! 탕! 탕!

마리스 펠식스 의장이 의사봉을 세 번 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자 메인 존슨 장관은 자리를 박차고는 그대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이제 정상이사회로 상정 건이 이첩되었으니 회원국 대표분들께서는 이와 같은 결과를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EU 규정에 따르면 정상이사회에 상정 건이 이첩될 경우 1개월 안에 정상이사회를 소집하게 되어 있었다.

“정상이사회는 각국 정상들의 일정을 확인한 후 내일 오후에 개최일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의견들 없으면 오늘 이 정도로 2차 대표이사회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탕! 탕! 탕!

★ ★ ★

2024년 1월 09일 22:00 (라트비아시각 15:00),

라트비아 리가 EU 본부 VIP 접견실.

화가 난 상태로 회의실을 빠져나온 메인 존슨 장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통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독일이 훼방을 놓는 바람에······.”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도록 하겠습니다.”

윗사람과 통화하듯 머리를 조아리며 통화를 하던 메인 존슨 장관은 통화가 끝나자 스마트폰을 탁자에 내팽개치듯 던지고는 그대로 소파에 몸을 묻혔다.

“다 된 밥에 콧물을 빠뜨리다니······.”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는지 메인 존슨 장관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사실 오늘 2차 대표이사회 회의에서 기존대로 상정 건과 관련하여 투표만 했어도 충분히 과반수를 넘겨 통과될 일이었다.

메인 존슨 장관은 독일이나 프랑스, 그리고 터키를 비롯한 몇 개국을 제외하곤 나머지 모든 국가에 미리 손을 써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마리스 펠식스 의장 역시 거부할 수 없는 뇌물을 받고 회유된 상태였다.

회의를 마치고 마리스 펠식스 의장이 VIP 접견실로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의장을 보자마자 메인 존슨 장관이 불같이 화를 냈다. 이에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소파에 앉으며 양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하게 되었소. 독일 대표가 그런 수단을 취할 줄 꿈에도 생각을 못 했소.”

“의장이라면 그 정도는 미리 손을 써놨어야지요.”

“지금까지 대표이사회에서 정상이사회로 상정 건을 이첩 동의안을 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소이다.”

사실 그랬다. 아무리 중대한 상정 건이 있더라도 지금까지는 대표이사회에서 모두 결정을 해왔다. 만약 정상이사회에 상정 건을 이첩 한다는 건 말 그대로 대표라는 직책에 부여된 권한과 권리 행사를 포기하겠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었다. 정치인 중에 과연 누가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과 권리를 포기하겠는가?

그러한 이유로 처음부터 정상이사회에서 상정되는 사안이 아니라면 EU의 모든 정책과 의사결정은 대표이사회에서 결정해왔다.

“의장님! 정상이사회는 언제 개최합니까?”

“아직 결정된 건 없습니다. 단지 규정상 1개월 안에 개최해야 합니다. 내일 오전까지 각국 정상들의 일정을 확인한 후 결정하여 내일 오후에 발표할 것입니다.”

“최대한 이른 날짜로 개최 바랍니다.”

“얼마나 말입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되도록 일주일 안으로 개최했으면 합니다.”

“일주일요? 존슨 장관! 회원국이 자그마치 30개국입니다. 30개국 정상들의 일정이 있기에 일주일 만에 개최하는 건 힘듭니다.”

“안됩니다. 무조건 일주일 안으로는 정상이사회를 개최하여 상정 건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허허, 이거 참!”

“의장님! 받으신 게 있으면 그 정도는 힘을 써줘야지 않겠습니까?”

“네? 음, 음,

메인 존슨 장관의 협박성 발언에 헛기침을 몇 번 한 마리스 펠식스 의장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네, 의장님!

“오늘까지 회원국 정상들의 일정 확인하고 정상이사회를 일주일 안으로 개최할 수 있도록 일정 조율 좀 해보게”

- 네? 일주일을 말입니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개최하는 정상이사회는 적어도 20일 이사의 기간을 잡······.

“그걸 누가 모르나? 급하니까 하는 말이 아닌가? 비서관! 어떻게든 조율해봐!”

- 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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