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세컨드 찬스
백현은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아니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붙같이 화를 내던 미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오빠 어릴 적 모습 보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그래.”
그렇다.
잠깐이지만 강백현은 과거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과거의 10살이었던 강백현은 이곳으로 와 있었다.
그게 신체전이 능력.
“대화는 했어?”
“아니, 곤하게 자고 있어서 깨우진 않았어.”
“깨우지 않았으면, 대화를 해 본 건 아니네.”
“그렇지. 대신 기억은 읽을 수 있잖아. 어릴 때는 참 순수했었네. 지금은 아니지만!”
미나의 말에 백현이 눈을 치켜 올렸다. 그러자 강미나가 피식 하고 웃으며 쏘아붙였다.
“뭐!”
“아니야. 됐어. 내 예상대로 단순히 10년 전이 아닌, 10년 전의 신체가 있었던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
“그랬구나.”
“2009년, 집 안에서 난 너를 봤어. 그때 넌 6살이었고, 날짜는 확실히 모르지만 늦은 밤이었어. 너에게 지금대로 내 모습을 본 기억이 남아 있어? 없어?”
백현의 말에 미나가 궁리해보았다.
‘과거를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고 생각한 거지?’
유감스럽지만, 미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 안 나. 그런 기억은 없다고 봐.”
“정말이야?”
“응. 안타깝지만 오빠의 예상은 틀렸어. 과거를 바꾼다고 현재의 미래가 바뀌진 않아. 이미 지나간 시간을 처음부터 되돌리는 방법 자체가 없었던 거야.”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잖아.”
“돌아갈 수는 있지. 그런데 지금 여기 사는 사람들 모두를 데려갈 수는 없는 거잖아. 그리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오빠랑 같은 존재가 둘이 있는 건 어떻게 할 건데?”
“너 거짓말하는 거 아닌 거지? 미래를 바꿀 수는 없는 거지?”
“그래. 확실해.”
“알았어. 생각 좀 해 볼게.”
* * *
같은 날, 백현은 찰스와 맥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신체 전이 능력 사용 후, 여기에 도착할 10살 백현과 아무 대화나 해달라는 것.
신체를 다시 되돌린 후 자신의 머릿속에 10살 백현이가 겪었던 기억이 생겨난다면, 과거를 통해 현재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만일 맥스와 찰스가 10살의 백현과 대화한 후에도 그 기억이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면, 과거를 바꾼다고 미래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강백현 사용자의 요청대로, 과거에서 온 어린 강백현 사용자와 대화를 시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응. 혹시 모르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홀로그램의 조력을 받으며, 백현은 다시 한 번 10년 전의 신체와 바꿔치기를 했다.
다시 돌아온 2009년, 백현은 씩 웃었다.
편의점 앞.
10살의 백현은 동생과 함께 편의점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으아아아아앙.”
갑자기 넘어진 미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스크림이 엎어지고 미나의 팔에는 상처가 났다.
“괜찮아?”
“으아아아앙.”
동생과 손을 잡고 걸어가던 길이었던 듯하다.
백현은 재빨리 불투명한 보호막을 씌워 타인으로부터 자신과 미나의 모습을 감추었다.
슈트를 입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다.
백현이 미나의 왼쪽 손목에서 나는 상처에 보호막을 감싸 출혈을 막자, 미나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요술이야?”
“아니, 보호막 응용기술이야.”
“키키키, 재밌어.”
“바보, 너 지금 다쳤거든? 움직이지 마.”
“알았어. 근데 오빠 이름이 뭐야? 우리 오빠는 어딨어?”
“오빠가 오빠야. 백현 오빠가 오빠고, 오빠가 백현 오빠고.”
그런데 시간이 다 된 것 같다.
체력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지 지속시간이 짧았던 것.
2009년에 다녀온 강백현은 불과 1분도 안 되는 시간인 걸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실패입니까? 10살의 강백현 사용자는 저희 홀로그램을 보고 굉장히 신기해했습니다. 아바타라는 영화를 언급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저희를 바라보더군요. 혹시 기억이 입력되지 않으신 겁니까?》
맥스의 질문에 백현이 고개를 끄떡였다.
“응. 기억이 없어. 미나의 말대로, 과거의 나를 바꾼다고 해서 미래의 내가 바뀌진 않아. 시간을 되돌려봐야 미래 자체가 변하진 않는 거야.”
《그렇다면 현재의 이 시간을 바꿀 수는 없겠네요. 다만, 강백현 사용자가 2009년으로 돌아가 그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있을 것 같습니다. 모선이 우주선 모두를 모은 이유가 강백현 사용자의 예상대로 과거로 가는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서라는 게 밝혀졌거든요.》
“그래?”
《네. 하지만 지금은 그 계획이 파기된 상태입니다. 최종 결정권자인 강미나의 직권으로 현재 그 계획은 완전 파기되었고, 과거로 가는 시간이동 기술도 전면 폐기된 상태입니다.》
“그렇구나. 결국 미나는 지금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거네.”
《그렇습니다. 제가 판단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닙니다. 그 결정은 많은 데이터의 소거를 뜻하니까요.》
생체 기반 AI.
누가 프로그램 기반 아니랄까 봐, 데이터의 소거라고 표현하는 맥스.
그리고 그런 그를 지켜보는 찰스.
강백현은 아쉬움에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이 연구도 끝이구나.”
《네. 고생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행동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과거를 바꾸면 그 분기점을 통해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뿐, 현재의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는 평행우주이론을 증명해보이신 거니까요. 저는 AI인데도 불구하고 해당 경험을 함께 공유하게 된 점, 강백현 박사님에게 정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박사는 무슨 박사야. 그냥 능력 한 번 쓴 것뿐이지.”
《아닙니다. 인류를 위해서, 그리고 저희 AI를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다. 해당 업적은 제 메모리 안에 최우선 순위로 보존하여 후대에도 계속해서 알릴 수 있도록 할 겁니다.》
맥스의 말에 강백현이 씩 웃었다.
결과가 나오니 모든 게 허무해졌다.
과거를 바꾼다고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니.
결국 지난 1년간의 엄청난 경험들을 무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엄마가 죽고 아빠가 죽고 또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인류는 찬란한 문명을 잃고 재건하는 중이지만, 지난 200년간 후퇴한 문명이 회복될 때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수많은 경험이나 발전했던 문명은 언젠가는 복구될 것이다.
어떤 것들은 21세기보다 더 발전할 테고, 어떠한 것들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으리라.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강백현은 허망한 표정으로 짐을 정리했다.
“맥스, 3일 뒤에 난 우주선을 떠날 거야.”
《네. 어떤 음악을 재생할까요?》
“클래식, 조용한 음악, 쇼팽으로 틀어줄래?”
* * *
쇼팽의 음악,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단조를 듣던 백현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목표를 잃은 시점,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밀려왔다.
이제는 쇼팽처럼 음악가나 작곡가가 될 수도 없고, 미나처럼 소설가가 될 수도 없고, 최형우 아저씨처럼 경비원이 될 수도 없다.
세상이 멸망한 뒤, 사람들은 현재에 적응하는 중이다.
《혹시 아직 정하신 게 없다면 방주를 관리하는 건 어떠십니까?》
“방주?”
《네. 현재 이성이 있는 수많은 거인들이 방주에 남아 있습니다. 우주선에 남아있던 에너지로 관련한 에너지를 충당하는 중이죠. 현재 그들을 관리할 제도나 법규가 없는 상황이므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강백현 사용자는 방주에서 생활했던 경험도 있으니 율리만의 빈자리를 충분히 메울 수 있다고 전 판단하고 있습니다.》
찰스의 말에 강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들은 스스로도 잘 해결해 나갈 테지. 그들의 삶을 내가 정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해.”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럼 그 뜻을 아르케 지역의 버키라는 거인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거인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자니까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
버키.
버키와 바키 형제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앨버트는?
확실히 그들은 인간들과 많이 닮아있었다.
이성이 있는 존재.
그러니 더더욱,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파괴하긴 싫다. 함부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10살 미나의 미래가 걱정스러워졌다.
이대로 놔두면 자신과 같은 경험을 겪게 되겠지.
엄마, 아빠가 크로커라는 이종의 생명체에 의해 죽어버리고.
작은 세상이라는 무자비한 살육 현장에 노출된 채, 잔혹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동료들이 앞에서 죽어나갈 것이다.
친구들도 죽어나가고, 사람들은 문명인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떠올려 보니, 그런 끔찍한 일이 그녀에게 일어나지 않길 빌 수밖에 없었다.
비록 과거의 엄마와 아빠.
그들이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해도 부디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과거를 바꿔야 해. 백현이를 데려와서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알려주고, 그 모든 것에 대처할 수 있게 해야 해.”
백현의 말에 찰스가 대답했다.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아무것도……. 미나를 통해서 기억을 전달하면 과거의 내가 알아서 대처할 거야. 그게 나한테는 최선이겠지.”
《알겠습니다.》
* * *
백현은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해 미나를 불러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손목 밴드와 화사로운 꽃무늬 블라우스, 치마를 입고 나타난 동생.
그녀를 향해 백현이 말을 건넸다.
“미나야. 네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동생인 미나는 그 계획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니, 난 반대야. 오빠 말이 안타깝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차원에 끼어드는 것은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밖에 안 돼. 난 오빠 의견에 동의 못해.”
미나의 반대.
하지만 백현은 호소하듯 설득을 계속했다.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어야 하잖아. 너 엄마, 아빠 죽는 거 듣고 엄청 힘들어했잖아. 과거의 네가 그렇게 고통 받지 않을 수 있어. 비록 너와 난 그렇게 안 됐지만, 얘네들 세상에서는 아무 전쟁 없이, 아무 고통 없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있는 거야. 한 번만! 응? 내가 과거의 백현이를 데려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기억만 전달해주면 돼.”
백현의 계획은 간단했다.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는 미나가 과거에서 온 10살 백현에게 기억을 전달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린 백현은 모든 미래를 알고 어느 정도의 대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럼 적어도 그들 세상의 미래가 지금처럼 최악이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미나가 완고한 표정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오빠, 안 된다면 안 돼! 어? 내가 안 된다고 했다!”
흥분한 미나가 뒤돌아서자 백현이 그녀의 손아귀를 잡았다.
“강미나!”
“놔! 놓으라고!”
미나가 거칠게 반항하는 탓에 강백현이 당황하며 손을 놓쳤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서 밴드가 떨어졌다.
그리고 밴드 안쪽에 남아있는 선명한 흉터.
백현은 깜짝 놀랐다.
10년 전 과거로 돌아갔을 때 어린 미나가 넘어졌었다.
넘어진 후 찢어진 부위와 똑같은 부분에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이다.
“강미나? 야! 이 흉터 뭐야! 너 이 흉터 언제 생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