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무력함
백현은 자신의 보호막을 벗겨낸 거인 앞에서 무력함을 느꼈다.
거인이 입을 벌린 것뿐인데, 그 압도적인 크기에 압도되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린다.
팡!
머리가 울리며 강백현은 무언가와 부딪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갈대밭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자신을 인식할 수 있었다.
백현이 겨우 중심을 잡으며 자신이 있던 장소로 고개를 돌렸다.
“으아아아아아악!”
그의 시야에 잡힌 것은 거인의 입에 물려있는 김만철이었다.
거인에게서 백현을 살리기 위해 김만철이 몸을 던진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
거인의 입에 물려 죽을 위기에 처한 김만철을 구하기 위해 김아람이 소리질렀다.
“놔! 놓으라고! 놔 이 괴물 자식아!”
김아람은 염력을 사용해 거인의 입을 억지로 열었다.
그런데 거인의 입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거인이 고개를 쳐들자, 김아람도 자신의 몸을 띄우며 거인을 쫓았다.
김만철을 구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하지만 8등급 거인에게는 김아람의 능력이 닿지 않는다.
김만철은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백현이를 구한 것만으로도 자신의 역할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인의 팔이 김아람을 내려쳤다.
피융!
파리가 인간의 손에 충돌해 바닥으로 떨어지듯 김아람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한다.
너무 빠른 속도에 김만철이 분노를 토해냈다.
“아람아! 김아람! 야!”
김아람의 몸이 갈대밭에 떨어지더니 퉁! 퉁!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몇 번을 튕기며 날아가 버린다.
김만철은 결국 아까와는 다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밖에 없어. 내가 구해야만 해.’
김만철이 비정한 각오로 자신의 팔을 반대쪽 손날로 내리쳤다.
강화된 손으로 거인의 치아 사이에 낀 팔을 반듯하게 절단한 것이다.
주루루륵.
바닥으로 떨어지는 몸.
김만철은 떨어지면서 자세를 바꾸어 균형을 유지했다.
완벽한 착지자세를 잡은 그는 거인의 입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김아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게 김만철을 더욱 더 위기로 내몰았다.
출혈을 감지하고 피 냄새를 추적하는 거인.
팔이 잘린 김만철의 어깨 절단면에서 나오는 출혈로 인해 거인이 새로운 목표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만철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를 유지하며 튕겨나간 김아람을 찾았다.
그런데 분명히 자리에 있어야 할 김아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람아! 아람아!”
그때 강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여기로! 여기로!”
“어?”
“여기로 오라고요! 당장! 빨리!”
강백현이 김만철을 향해 소리 지른 곳은 하수구였다.
하수구 안, 얼마나 오래 물이 고여 있었는지 썩은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강백현은 그곳이 거인에게서 탐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피를 흘리고 있는 김아람을 그쪽으로 빼돌렸던 것.
김만철은 슬라이딩 하듯 하수구 방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강백현은 곧바로 보호막을 펼치며 자신과 만철, 아람이에게서 나는 피 냄새를 지우고 기척을 감추었다.
김만철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생각보다 멀쩡한 김아람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람아, 괜찮니?”
“네. 다행히 백현이가 탄성이 높은 보호막으로 받아줘서 충격이 덜했어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과도할 정도로 몸이 튕겨나간 것은 백현의 보호막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람이가 정상일 리는 없었다.
“컥-컥컥컥.”
김아람은 내부 출혈이 심했는지 피를 토해냈다.
“괜찮아?”
“응. 버틸 만해. 백현이 넌 다친 데 없지?”
“응. 난 괜찮아.”
“다행이다.”
김아람은 피식 거리며 웃었다.
“웃기지? 짜증 나! 난 능력을 가지면 거인 정도 아무렇지 않게 제압할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짜증나. 진심 완전 짜증.”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백현은 김만철의 상처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팔은 괜찮아요?”
“응.”
“기다려 봐요. 잠깐 출혈 막아드릴게요.”
보호막을 얇게 펴서 팔의 절단면을 압박하자 출혈이 점자 줄어들기 시작했다.
김만철은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띤 얼굴로 백현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일단은 돌아가야죠. 방주로 돌아가서 치료해요.”
“사람들이 산다는 곳은 어디인데? 그쪽으로 가봐야지.”
“형하고 아람이 치료가 먼저예요. 윤수한테 가서 치료 받고 가도록 해요.”
“그래. 근데 방주는 괜찮니? 미나하고 윤수, 태우 아저씨는 일단 남겨두긴 했는데……. 불안해서. 크윽, 아.”
기껏 지혈된 절단면에서 다시 출혈이 일어나는 게 보인다. 아람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억울해했다.
“어떡해! 어떡해! 아저씨 어떡해!”
김아람의 내부출혈도 그렇지만 김만철의 절단된 팔은 보기만 해도 너무 끔찍하게 아파 보인다.
그런데 숨은 채로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김아람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추워. 백현아, 안아줘. 나 너무 추워. 너무 추워.”
“춥다니, 추울 리가 없잖아.”
“거짓말 아니야. 너무 추워. 추워…….”
아람이는 체온조절 능력에 이상이 생긴 듯했다.
몸의 이상이 자율신경 기능에 영향을 미친 것.
이 상황이 오래되면 반드시 죽는다.
절망적인 상황.
강백현은 미니맵을 띄워 상황을 지켜보았다.
거인은 목표를 잃고 하수구 위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다행히 방주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한 것.
거인이 지능이 낮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인류는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런데 미니맵에서 문제가 생겼다.
거인들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기껏 사방으로 퍼트렸던 거인들이 활주로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안 돼!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김만철이 한쪽 눈이 풀린 상태로 물었다.
“백현아,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네. 만철이 형, 거인들이 다시, 기껏 흩어놓았던 거인들이 활주로를 점령했어요.”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일단 제가 해볼게요. 제가 알아서 해봐야죠.”
아까까지만 해도 김만철이 더 심각해보였는데, 지금은 한쪽 팔을 스스로 잘라낸 김만철보다 내부출혈이 심한 김아람이 더 위험해 보인다.
그렇기에 지금은 모든 것을 백현이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강백현의 귀에 한국말이 들려왔다.
《무슨 목적으로 방문하셨죠? 아니, 그보다 이 장소는 어떻게 알았죠?》
하수구 안에 또렷하게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
강백현이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피커가 보인다.
갑작스런 상황, 강백현은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제1경비구역에서 서기백 대장의 소개로 이곳의 존재를 알고 찾아왔습니다.”
《기다리세요. 지금 사령관님한테 출입 관련 승인 받는 중이니까.》
* * *
기적이 일어났다.
활주로에 있던 거인들이 남쪽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수구 안쪽에서 사람들이 들것을 가지고 걸어나왔다.
“아-으. 냄새!”
코를 막고 눈을 찡그리는 소년들.
그런 아이들을 어른들이 다그친다.
“빨리빨리! 응급처치 요령 배웠지? 다들 배운 대로 움직여!”
“네!”
어른들은 모두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독려해서 김만철과 김아람을 들것으로 안전하게 옮겼다.
“일단 빨리 안쪽으로.”
하수구 안쪽 깊은 곳과 연결된 곳은 다름 아닌 벙커였다.
그곳은 일종의 빈민촌과도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아람과 김만철을 옮기는 소년들.
강백현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그중 리더로 보이는 여성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는 말투로 여성들을 지휘했다.
“선영이 넌 빨리 뜨거운 물 가져와! 재연이는 깨끗한 수건 챙기고, 항생제 남은 거 다 가져와! 이 남자분한테 항생제 다 들이부어야 하니까 있는 거 다 가져와! 알겠니?”
“네. 언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빈민촌의 여성들과 아이들.
먼저 항생제를 김만철의 절단된 팔에 붓고, 뜨거운 물에 수건을 담가 그걸로 절단된 팔을 꽁꽁 싸맸다.
그 옆에서 아이들이 두 손을 모아 김만철의 생존을 응원한다.
“아람이는 내부출혈이 심해요. 그래서인지 계속 춥다고…….”
“네. 알았어요. 기다려요.”
내부출혈은 최악의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크게 조치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김아람의 정보를 캐물었다.
“이 환자분 혈액형이 뭐야?”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요.”
“아~ 그래? 알았어. 얘들아! 주목!”
“주목!”
그녀의 말에 어린 아이들을 비롯한 모두가 시선을 그녀에게 집중한다.
“혈액형 O형 다 모여. 여기 환자 살리려면 O형 혈액이 최대한 많이 필요하니까 다들 헌혈할 준비해 알았지?”
“네!”
다행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아람이에게 수혈이 시작되었다.
번갈아가면서 아람이에게 혈액을 공급하는 아이들과 여성들.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아람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강백현은 김만철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잘 버텨주고 있다.
“백현아, 괜찮아. 난 괜찮아.”
“네. 괜찮아야죠. 괜찮아지실 거예요. 잠시 쉬고 계세요. 아람이 다시 확인해보고 올게요.”
다시 아람이에게 시선을 돌리는 강백현.
그런데 모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아람의 몸이 새파랗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아람아! 아람아!”
리더 여성이 반쯤 포기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최선을 다했는데…… 여기까지인 것 같아. 못 버티고 있어. 더 힘내서 버텨야 할 텐데, 그래야 하는데.”
“포기하지 마세요! 아람이 꼭 살려야 해요. 얘 없으면 나 못 살아요.”
“알아. 아는데…….”
강백현이 말을 끊고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어디 가! 바깥으로 나가면 안 돼! 위험해! 거인들 풀어놨단 말이야.”
“치료 능력자가 있어요. 데려오면 아람이를 살릴 수 있을 거예요.”
박윤수, 윤수만이 언제나 희망이었다.
윤수만 데려오면 아람이도 살릴 수 있고, 만철이 형의 팔도 재생시킬 수 있다.
윤수는 그래서 중요했다.
“그게 정말이야?”
“네. 시간 없어요!”
“잠깐! 그렇다면 방법이 있어.”
“네?”
리더로 보이는 여성이 갑자기 방송실로 이동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조잡해 보이는 화면.
그러나 확실히 작동은 하고 있다.
여성이 화면 아래쪽의 어딘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강백현의 미니맵에서 거인들이 활주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활주로에서 고속도로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어떻게…… 거인들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거예요?”
백현의 질문에 여성이 대답했다.
“나중에! 빨리 그 애 데려와. 여자친구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빨리 데려와!”
강백현은 쉼 없이 뛰었다.
이미 방주에서는 미나가 날개 능력을 활용해 윤수를 데려오고 있었다.
“오빠, 미안해. 빨리 가려고 했는데 너무 위험해서 갈 수가 없었어.”
“괜찮아. 윤수야! 빨리 형이랑 가자!”
“응!”
미나의 얼굴은 눈물로 가득했다.
윤수도 마찬가지였다.
누나가 울고 있으니 자신도 이미 어떤 상황인지 깨달은 탓이다.
강백현이 더욱 속도를 냈다.
아람이를 살리기 위해 윤수를 등에 업고 전속력으로 움직이는 강백현.
제2경비구역에 도착하니 그들을 기다리는 여성들과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염원과 기도 덕분일까?
잠시 후, 윤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나는 고쳤어. 금방 깨어날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빠는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