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뒤늦은 후회
백현은 윤수를 업은 채로 슈트를 이용해 최대한 빨리 이동했다.
미나도 마찬가지였다.
미나는 백현의 슬픔을 느끼고 아무 말 없이 뒤따라갔다.
‘이렇게 오빠의 감정이 메마른 적은 처음이야. 정말 아저씨가 돌아가신 거야?’
오빠의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최형우 아저씨의 모습을 확인해보는 미나.
그런데 갑자기 읽던 모든 기억이 차단된다.
백현의 머리를 둥글게 감싸는 보호막.
‘기억을 차단한 거야? 내가 기억을 읽는 것도 싫다는 거야?’
백현은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아람이 혼자 보내는 게 아닌데!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백현은 최형우의 죽음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현재 그가 서두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람이를 살리는 것. 더 이상 무모한 희생이 생기지 않는 것.
현장에 도착한 미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 죽어! 죽어! 죽어버리라고!”
이미 이성을 잃고 폭주한 김아람이 30m짜리 대형거인의 팔과 다리를 잘라내고, 목을 비틀고 있었다.
그녀의 슈트는 이미 한계를 넘어선 듯 보글보글 기포를 올리며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었으며, 뿌리부터 점차 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강백현이 이를 보고 미나에게 말했다.
“미나야. 기억 지워서 폭주 멈춰.”
“응.”
강미나는 김아람을 막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김아람이 강미나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손짓 하나에 강미나가 50m 이상 날아가 바닥에 처박히고, 강백현이 소리 질렀다.
“강미나! 괜찮아? 괜찮아?”
“으…… 으응.”
그러나 미나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슈트를 입으면 일반인보다 방어력이 좋아지긴 하지만 무적인 건 아니다.
슈트가 아니었으면…….
미나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아람이가 얼마나 폭주했는지 짐작케 해주었다.
“오빠, 다시 해 볼게.”
“안 돼. 아람이의 공격범위가 너무 넓어. 네가 접근하기 힘들 거야.”
“하지만!”
“미나야. 일단 넌 쉬어. 내가 다 정리할게. 윤수야?”
“응.”
“형아가 부탁할게. 미나 누나 좀 치료해줄래?”
“응! 당연하지.”
강백현은 자신의 주변에 보호막을 치고 아람이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아람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주하며, 죽어있는 거인을 향해 모든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대로 더 있다간 제 아무리 윤수가 치료한다고 해도 죽을 거야. 슈트가 한계에 이르렀어.’
강백현은 굳은 결심을 하고 몸을 날려 김아람에게 접근했다.
그때 뒤쪽에서 김만철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미나야, 윤수야!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말도 없이 여길 왜 왔어?”
“아저씨! 형우 아저씨가…… 형우 아저씨가…….”
“형우 아저씨가 왜?! 무슨 일인데?”
미나의 말에 김만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최형우의 잘린 다리가 김만철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늘어난 슈트와 함께 잘려나간 다리, 그리고 거대해진 손가락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상공에는 김아람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있다.
죽은 거인과 최형우로 보이는 절단된 시체. 그리고 폭주한 아람의 모습.
모든 게 최악, 최악이다.
“미나야. 네가 아람이를 막을 수 없었던 거니?”
“네. 언니가 저를 접근하게 내버려두지 않아요. 오빠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이대로 놔두면 스스로 지치지 않을까?”
“아닌 것 같아요. 언니의 신체는 진작에 한계에 이르렀어요. 슈트가 몸을 보호하지 못하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버렸어요. 지금쯤 장기가 망가지기 시작했을 거예요. 제 생각이지만, 1분만 더 지체되면 언니는 죽고 말아요.”
미나의 말에 윤수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강미나가 윤수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오빠가 다 해결할 거야.”
한편, 백현은 고전하고 있었다.
“김아람! 김아람!”
처음에는 백현을 눈치채지 못했던 김아람이었지만 곧 알아채고 미나처럼 염력으로 던져버렸다.
하지만 강백현의 앞에는 보호막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강풍이 콘크리트벽을 허무는 게 쉽지 않듯, 백현의 보호막은 미나가 만들어내는 염력을 막아낼 수 있었다.
강백현은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속사정은 달랐다.
‘엄청난 힘이야. 보호막을 최대로 펼쳤는데도 이렇게 힘든 거야?’
머리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러나 아람이라도 구하려면 어쩔 수 없다.
“죽어! 다 죽어버리라고!”
아람이는 30m 거인을 조각조각 낸 후, 그 사체를 사방으로 뿌렸다.
그야말로 짐승.
짐승 이외에 그녀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이를 지켜보는 백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삭아들기 시작했다. 한계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 얼마 없어.’
백현은 보호막을 유선형으로 만들어 염력의 돌풍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아람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백현을 극도로 경계해서 주변의 모든 것을 백현에게 쏟아부었다.
밑동이 잘라진 나무들이 백현에게 날아들었다.
유선형의 보호막은 돌풍을 흘려보내는 데는 유리했지만, 물체를 막아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백현의 손이 보호막을 더욱 크고 굵게 만들어냈다.
‘이대론 안 돼! 이대로는!’
강백현은 보호막을 생성하는 동시에 분신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분신들이 상황을 금세 이해하고 주변으로 흩어졌다.
아람이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본체가 안쪽으로 접근할 수 있게 도우려는 것이다.
그런데 아람은 강백현이 몇 명이든 상관없이 다 날려버릴 태세였다.
평소라면 불가능하지만, 폭주 상태의 그녀는 자신의 몸을 제물삼아 밑도 끝도 없는 파워를 낼 수 있었다.
강백현은 전략을 바꾸었다.
슈트만 간신히 감쌀 법한 최소한의 보호막을 남겨두고 최대속도로 아람에게 접근했다.
‘아람이를 기절시켜야 해! 그 방법밖에 없어.’
백현이 날아오르고 그 손에서 날카로운 창이 생성되었다.
그러나 김아람의 간단한 손동작에 백현의 몸이 순식간에 훅 날아가버린다.
강백현은 화가 났다.
동료를 살릴 수 없다는 데 화가 났다.
“야! 너 죽어! 이대론 죽는다고!”
그러나 백현의 목소리는 아람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백현은 이미 탄력을 잃고 쭈글쭈글해지는 중인 아람이를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람아…… 아람아…….’
그런데 김만철이 엄청난 속도로 아람이에게 몸을 날렸다.
아람의 간단한 손동작에 튕겨나가고 마는 김만철.
하지만 그는 포기를 몰랐다.
수십 번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몸을 날리고, 또 날린다.
“아저씨! 그러다 아람이 더 빨리 죽어요. 생각 좀 하시고 저랑 연계를 하세요!”
“너나 시선 끌어!”
“네?”
“아니야. 오빠, 다 끝났어. 내가 왔으니까.”
김아람이 갑자기 정신을 잃고 공중에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김만철이 도약하여 그녀를 받아냈다.
그리고 윤수는 곧바로 김아람의 치료에 돌입했다.
“으-으. 잘 치료가 될지 모르겠어.”
윤수가 불안한 얼굴로 능력을 발휘하고, 남은 이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인 채 지금의 상황을 되짚고 있었다.
* * *
시간이 흘렀다.
침대에서 번쩍 일어난 김아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니, 일어났어요?”
“응. 어떻게 됐어? 형우 아저씨는 어떻게 됐어?”
미나는 김아람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나야. 미나야!”
“언니, 몸부터 추슬러요.”
“응?”
온몸에 붕대가 감겨 있는 김아람.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나가버리는 미나.
거기에 자신을 힐끗 쳐다보고 뒤로 숨는 윤수까지.
모든 상황이 어쩐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김아람은 자신의 소꿉친구를 불렀다.
“백현아! 백현아!”
그러자 앞쪽에서 그녀가 부른 남자가 나타났다.
“응. 깨어났다며, 괜찮아?”
“응. 형우 아저씨는?”
“잊자.”
“어?”
“잊자고. 우리 다 형우 아저씨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기로 했어. 그러니까 다시는 그 이름 언급하지 마.”
“백현아? 왜 그래? 너 왜 이렇게 쌀쌀맞은데?”
“너한테 쌀쌀맞은 거 아니야.”
“설마! 형우 아저씨! 설마! 설마!”
백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김아람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통스러울 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윽.”
“윤수의 치료능력으로도 다 치료할 수 없을 만큼 내장이 손상됐어. 무리하지 마. 너까지 잃으면 우리들 정말 견디기 힘드니까.”
“흑흑흑. 진짜 그런 거야? 아저씨 돌아가신 거야? 그런 거냐고!”
“응. 그래.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변하지 않을 거야. 3시간 뒤 출발하니까, 마지막 인사 하려면 하고, 밖에 모셔두었으니까.”
“강백현…….”
강백현이 나가고, 아람은 온몸의 통증을 참아내며 방주 바깥으로 나왔다.
커다란 무덤이 바로 앞에 보인다.
그 앞에는 김만철이 고개를 숙인 채 펑펑 울고 있었다.
김아람은 염력을 이용해 그의 옆에 착지했다.
“아저씨.”
“깨어났니?”
“형우 아저씨예요?”
“그래. 참 좋은 분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인사드리고 올라와. 금방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아저씨! 옆에 있어줘요. 나 외로워. 무서워. 힘들어. 힘들단 말이에요!”
“다 힘들어. 어리광부리지 마.”
“아저씨! 아저씨!”
아람이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아람이를 위해주지 않았다.
죽음은 서로를 향한 감정을 갈라놓을 뿐.
김아람은 최형우 아저씨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의식이 없던 자신을 빛의 기둥까지 목숨을 걸고 옮겨주었다.
케이블카에서도 자신이 폭주하는 걸 차분하게 달래서 이끌어준 사람도 최형우 아저씨였다.
어찌 보면 김아람은 최형우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아저씨가 없었다.
믿고 마음을 열 수 있던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 진짜 돌아올 수 없다고 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방주에 돌아온 아람은 온전치 못한 몸을 이끌고 미나를 찾으러 갔다.
“미나야.”
“네. 언니.”
“언니가 미안해! 제발! 제발 아저씨 살려줘. 응?”
“못 살려요 언니. 아시잖아요.”
“과거로 돌아가서 한 번 더 되돌리면 되잖아. 너 할 수 있잖아. 응? 네가 율리만 박사니까 다시 반복해서 아저씨 살릴 수 있는 거잖아. 응?”
김아람의 말에 강미나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답했다.
“언니…… 저번과는 말이 다르잖아요. 전 율리만 박사가 아니에요. 그와는 별개의 인격체라고요.”
“미나야! 미나야!”
“네. 언니 듣고 있어요. 언니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다 알고, 무슨 생각 하시는지도 다 알아요. 그러니까 일단은 지켜봐요.”
미나는 김아람의 말을 듣다 말고 일어나 백현에게 향했다.
“오빠.”
“응?”
“출발하자. 시간 아까워. 하루라도 빨리 갔으면 좋겠어. 최태우 선생님?”
닥터 최태우가 대답했다.
“응.”
“출발해도 될까요?”
“그래. 이륙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