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갈등
미나가 율리만이 된 시점에서 평행우주가 또 하나 생겨났다.
새로운 분기점. 모두가 살아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율리만은 어떻게 된 거야?』
백현이 일부러 거인어로 질문하자 미나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잠들었어. 하루에 20만 거인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게 수백 년이야. 한계에 이른 거지.』
『율리만이 원한 건 우리의 생존이었지?』
『응. 오빠! 근데 거인어 왜 이렇게 잘해?』
『생존이 걸려 있었으니까. 많이 노력했어. 생각 안 읽어?』
『오빠가 읽지 말라고 했으니까.』
잠시 후, 거대한 유리벽이 있는 원형의 구조물이 상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성 구체가 분리되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걸 보며 김아람이 미나에게 물었다.
“이대로 바로 떠나는 거야? 다른 생존자들은 어떻게 하고?”
“생명보조활동장치가 작동할 거예요. 남아 있는 구체들이 작아진 인간들을 구해 외부로 나가게 되겠죠.”
“외부엔 뭐가 있는데?”
“인간들이 거주하는 최후방 기지, 제주도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래요.”
“제주도? 서귀포시, 제주시 있는 그 제주도?”
“네. 한라산 있는 그 제주도요.”
김아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탈출이라니.
일단 나가게 되면 유리벽 안쪽에 갇힌 부모님과 볼 수 있게 된다.
수억 명의 사람들이 바깥에 나갈 수 있다.
율리만 섬 중앙에 깔려 있던 텅스텐 판들이 녹아 액체가 되기 시작했다.
미나는 그걸 보며 동료들에게 설명했다.
“저 텅스텐들이 길을 열어줄 거예요.”
영화 터미네이터의 T1000 로봇이 액체로 변하듯, 텅스텐 판들이 액체로 변하더니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하늘로 솟구치며 하나의 커다란 산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산은 쉴 새 없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더니 나뭇가지처럼 천장을 찌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광경을 보며 넋이 나갔다.
깡! 소리와 함께 대륙 전체에 금속 특유의 기계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또 깡 소리와 함께 대륙 전체에 진동이 울렸다.
율리만 섬을 둘러싸고 있던 텅스텐 금속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그걸 보며 미나는 감격스런 얼굴로 말했다.
“헤븐 스피어. 하늘을 뚫는 창.”
“헤븐 스피어?”
“응. 율리안 박사님이 고안해놓은 노아의 방주를 빠져 나오는 방법.”
텅스텐이 천장과 만나 융합하기 시작한다.
천장은 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기를 차단하는 텅스텐과 은이 만나 합금을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전기적 특성이 변화하여 그간 차단되어 있던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백현은 한동안 사용할 수 없었던 능력이 점차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텅스텐이 고유의 효과를 잃어서 그래. 이제 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능력을 쓸 수 있게 됐어.”
“응.”
능력을 차단하는 물질인 텅스텐은 다른 금속과 합성되는 순간 성질을 잃고 만다.
이때 김아람이 의문을 제시했다.
“미나야. 근데 밖으로 나가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제주도로 간다고 해도 우리 몸은? 작아진 현재 몸은?”
“언니, 몸은 점차 원래 크기로 돌아올 거예요.”
“그래?”
의문스러운 점이 한가득이었지만, 원래의 체형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은 희소식이었다.
합금으로 된 기둥을 잡고 올라가는 사람들.
다행히 헤븐 스피어는 35도 정도 기울어진 채로 천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미나는 율리만의 기억을 전달받았기에 동료들에게 경고해두었다.
“바깥은 위험해요. 나가면 돌이킬 수 없어요. 지금이라도 선택해야 해요. 여기 남아서 바깥세상이 안전해지길 기다릴지, 아니면 나가서 싸울지 다들 선택하세요.”
미나의 말에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다.
“싸우다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럼 과거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야?”
“네. 분명 돌아갈 순 있어요. 그 방법을 율리안 박사님은 알고 계시고요. 하지만 쉽게 보내주진 않을 거예요.”
“안 보내준다니?”
바깥에는 나갈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보내주질 않는다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미나의 말에서, 왜 그들이 인간들을 과거로 돌려보내지 않으려 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졌다.
“우리만이 능력을 쓸 수 있어요. 우리만이 초대형 거인들을 죽일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도록 놔둘 리가 없죠.”
“어? 우리만 능력을 쓸 수 있다고?”
“네. 3cm로 작아진 덕분에 유전자 오염을 피한 우리들은, 바깥에서 유일하게 능력을 쓸 수 있는 존재들이에요. 아,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뿐만은 아니네요. 여기 살고 있는 동물들도 배운 능력을 쓸 수는 있죠. 다만, 컨트롤이 되지 않으니 문제겠지만요.”
“그들의 목적은?”
“거인들을 죽이는 거예요. 자세한 내용은 율리안 박사와 만나 이야기를 해 봐야 해요. 율리안 박사와 율리만 박사는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은 지 무려 200년이 넘었으니, 율리안 박사가 지금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는 저도 모르거든요. 일단은 나가서 상황을 봐야겠죠. 그럼 이제 정해요. 누가 남고, 누가 나갈 건지.”
“다 나가면 되잖아. 수십 억 인구가 여기 있는데!”
“그럴 순 없어요. 이곳에서 우리는 크기가 작은 대신,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바깥은 그런 보장이 없어요. 일단 최소한의 인원만 밖으로 나가서 제반 상황을 확인하는 게 좋다고 봐요. 위험하긴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이죠. 누가 저랑 같이 나가실 거죠?”
고민의 순간이었다.
율리만의 기억을 이어받은 미나의 말에 백현은 일단 손을 들었다.
“나는 따라갈래.”
“백현아, 나도 간다.”
김만철도 손을 들었다.
“나도 갈래.”
김아람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나도!”
박윤수가 손을 들자, 미나가 손을 저었다.
“윤수는 남아.”
“누나!”
“윤수야. 너는 좀 더 엄마랑 같이 있어도 돼. 아직은 응석 부릴 나이잖아. 누나는 허락 못해.”
“으앙. 싫어! 싫어! 싫어!”
윤수의 말에 미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윤수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는 율리만의 기억으로부터 잘 전달받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 정의로우며 때론 비정할 정도로 냉정한 판단력을 가진 윤수.
‘분명 도움은 되겠지. 하지만 여기 남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미나는 자신의 목적을 떠올렸다.
방주의 생명유지장치는 4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걸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누군가 바깥에 나가 에너지를 공급받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동안 그 역할을 했던 것이 율리안 박사.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오래 전부터 에너지 공급이 중단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해결방법은 방주 바깥으로 나가 직접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방주 바깥으로 나가면 작아진 몸이 원래 크기로 되돌아온다.
그러면 방주 안으로 되돌아올 수가 없게 된다.
수백 가지의 선택 중 최선의 것을 찾기 위해 미나는 한계까지 사고를 가속시키고 있었다.
어느 것이 최선일까? 바깥 정보를 모르니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일단 나가야 해. 나가야 무슨 수가 생겨.’
그때, 최형우가 윤수를 말렸다.
“윤수야. 여정은 여기까지야. 할아버지랑 같이 돌아가자.”
“싫어요! 나도 가고 싶단 말이에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위험해.”
“할아버지! 할아버지! 응?”
“…….”
미나는 최형우에게 물었다.
“형우 아저씨는 여기 남으세요?”
“그래. 그래야지. 내 마누라도 살아있는 걸 확인했으니까. 모두가 나갈 수 없다면,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네. 다른 분은요?”
각자의 역할이 정해지기 시작했다.
남을 사람과 방주 바깥을 향해 떠날 사람.
미나는 버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버키 님?』
『응.』
『율리만의 의지는 확인했습니다. 율리만은 당신들을 위해 존재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실험체로 생각했던 거죠.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아니야.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지.』
『모든 진실을 당신에게 전하겠습니다. 거인들의 삶은 버키 님께 맡기겠습니다.』
미나의 마인드 리딩 능력을 통해, 그동안 율리만이 자행했던 모든 일들이 버키의 머릿속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끔찍했던 거인들의 역사.
그리고 이제는 멈춰버린 검은 구체의 이야기도.
『거인들의 룰은 이제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거인들을 옥죄던 펫 시스템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응……. 생각 좀 정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네. 바키 님과 함께 천천히 생각해주십시오.』
강백현은 버키와 미나의 대화를 보고 미나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앨버트한테도 써 줄 수 있어?”
“응. 한 번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아.”
“고마워.”
앨버트에게도 마인드 리딩을 쓰는 미나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걸려 있었다. 능력 과부하로 인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쓰러져 있던 앨버트는 미나에게 기억을 전송받고 허망한 듯 중얼거렸다.
『진실이 이거였던 거야? 우리는 결국 실험체였다고?』
『앨버트……, 원래 진실은 알면 불편한 거야.』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강백현은 앨버트에게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그래서 너희 선조들은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율리만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이곳이 죽은 거인도 살릴 수 있는 희망의 장소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의 과거를 기록하는 곳이며 축소된 인간의 복제품을 보관하는 냉동시설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과거 거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앨버트도, 강미나도, 강백현도, 다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곳으로의 접근을 꺼렸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 신디아 대륙만 온 건가? 아니, 신디아랑 아르케 대륙에서만 여길 온 거야?』
『함선으로 돌아가. 돌아가서 율리만을 만나고 왔다고 전해. 그리고 진실을 알리고 말고는 네가 결정해야 해.』
강백현의 말에 앨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금으로 이루어진 가지가 하늘까지 뻗어 있었다.
천장까지 연결된 경이로운 현상을 바라보던 앨버트가 강백현에게 물었다.
『가는 건가?』
『그래. 다시 보기는 힘들지도 몰라.』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건 아니지?』
『걸어서 올라가야겠지?』
백현의 대답에 앨버트가 손을 내밀었다.
『올라타. 동료들도 모두. 내가 최대한 높이까지 올라가 줄게.』
높이만 무려 3km, 환산높이 150km.
3cm가 된 인간은 올라갈 수 없으나 앨버트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의 도움을 받는 게 낫다고 강백현은 생각했다.
그런데 미나가 만류했다.
『괜찮아요. 앨버트 황제님.』
『어?』
『저희는 차 타고 왔거든요. 그거 타고 올라오면 돼요. 버키 님이 태워주실 거예요.』
버키가 씩 웃었다.
『앨버트? 이번에 황제가 됐다고는 들었습니다. 걸어서 올라가신다고요?』
『누구?』
『아르케 지역의 새로운 황제, 지니어스 타워의 주인이 된 버키입니다. 무식하게 걸어 올라가는 것보다는 저희 차량 타는 게 낫겠죠? 날 수 있는 기능도 있으니까요.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