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황제의 등극
백현은 실시간으로 상대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미니맵에 들어오는 정보.
공격 예상 경로는 물론 위치변화까지, 모든 정보가 미니맵에 표시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백현의 보호막 파편이 여우의 몸통을 제대로 노렸다.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파편에 깜짝 놀란 여우가 몸을 수그리며 반대쪽으로 회피했지만, 이미 칼날 같은 파편이 신체 일부분을 긁고 지나갔다.
알렉산더는 펫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듣고 안개를 걷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우의 아홉 개의 꼬리 중 물줄기를 내뿜던 꼬리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반대로 불을 뿜어내던 꼬리의 빛은 점차 더 강렬해졌다.
안개가 기화되며 점차 옅어지는 가운데, 강백현의 모습을 확인한 알렉산더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온몸에 보호막을 두르고 있는 상대방의 펫.
그 덕분에 후각으로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던 자신의 펫이 오히려 불리한 형국이 되어버린 것.
안개로 위치를 가린 채, 후각으로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고 공격하는 승리의 공식이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었을 줄이야…….
그런데 녀석이 어떤 능력을 사용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은 후각? 아니면 소리? 어떤 방법으로 위치를 파악하는 걸까?
그때 알렉산더는 자신의 펫이 고유권능을 사용한 것을 알게 되었다.
상처가 입으면 동물의 본능을 잃고 이성을 되찾는 고유권능 《침착》.
『로드, 어떻게 된 겁니까?』
『정신이 돌아온 거야?』
『네.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던 모양입니다. 현재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서 설명해주십시오.』
여우 인간은 거인의 말을 구사하며 알렉산더와 의사소통을 시작했다.
이를 보며 앨버트가 강백현을 향해 말했다.
『공격해! 서로 대화하지 못하게 시간을 주지 마!』
『오케이!』
강백현은 보호막 파편 수십 개를 날리며 여우 인간에게 접근했다. 그런데 녀석이 아까까지는 볼 수 없었던 고속 이동을 선보였다.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펫.
그러면서 강백현을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도 거인어를 할 줄 아는 모양이군요. 어디 국가 소속입니까? 중국입니까? 아니면 일본입니까?』
강백현은 상대방의 질문에 차분하게 응답했다.
『한국이다. 너는 어디에서 왔지?』
『저는 스페인 출신입니다. 아쉽게도 모국어를 쓸 일은 없겠군요.』
보호막 파편을 모조리 피해내는 여우인간의 움직임. 피하지 못할 경로로 파편을 날리더라도 꼬리에 붙은 불꽃이 보호막 파편을 녹여버렸다.
『공격이 굉장히 단순하군요. 이런 패턴이라면, 당신이 저를 이길 확률은 현재로선 제로에 가깝습니다.』
녀석의 말에 강백현이 혀를 차며 말했다.
『공격이 단순하다고?』
파편이 아닌 거대한 검의 형태로 된 보호막이 백현의 손 위에 올려졌다.
이기어검.
인간의 검술은 팔의 움직임이나 팔목의 꺾이는 정도가 정해져 있어 일정한 패턴으로밖에 운용할 수 없다.
하지만 백현은 검의 형태로 만든 보호막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패턴이 없는 공격. 자유롭게 휘둘러지는 검술. 바로 이기어검.
예측할 수 없는 최강의 검술이었지만, 상대방은 당황하지 않았다.
『훌륭한 전술이지만, 상성이 안 좋군요. 이미 보호막에 대한 대비는 해둔 상태입니다. 다른 전술은 없습니까?』
녀석의 꼬리의 불꽃이 보호막으로 만들어낸 검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녹아내리는 검이 힘을 잃고 액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거대한 불꽃을 담은 꼬리가 휘둘러질 때마다 백현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백현은 분신을 만들어내 그들과 함께 육탄돌격을 시도했다.
슈트의 강화된 신체능력을 이용한 타격. 하지만 꼬리에서 만들어내는 불꽃과 물줄기의 힘이 그런 신체능력을 가볍게 압도했다.
접근하는 백현을 물줄기로 밀어내고,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파악되면 아홉 개의 꼬리에 모은 불꽃을 한 번에 발사해 태워 죽이는 전법이었다.
여기에 이성을 되찾고 발휘하기 시작한 고속이동까지 더해지자, 백현의 현재 능력으로는 도저히 돌파구가 없어 보였다.
『벌써 포기입니까? 저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알렉산더는 동물의 본능에서 벗어나 이성을 찾은 자신의 펫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로드, 끝장내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해.』
『예스. 마이 로드.』
녀석이 고속 이동을 통해 백현에게 접근했다.
물과 불의 기운을 담은 꼬리. 거기에다 양손에 담은 푸른 구슬과 분홍색 구슬이 모조리 백현을 노렸다.
백현은 죽음 앞에서 이길 방법을 떠올려냈다.
분명히 강한 상대였고, 1:1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가장 강력한 아군이 바로 옆에 있었다.
강백현이 보호막을 치고 시간을 벌며 외쳤다.
『앨버트! 밟아! 밟아 죽여 버려!』
알렉산더는 강백현의 지시에 당황했다.
한순간 의식하지 못했던 앨버트가 측면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여우인간은 모든 공격을 일순간 강백현에게 쏟아낸 참이었는데 그 빈틈을 타고 앨버트가 접근했다. 그리고 퉁퉁 부어오른 발을 힘껏 휘둘렀다.
거인의 체중을 실은 발차기, 그 힘이 고스란히 여우인간에게 전달되었다.
예측하지 못한 공격을 방어할 방법이 없는 여우 인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체중이 실린 발차기에 장기가 출렁이고, 시야가 좁아졌다.
잠시 후 쾅 소리와 함께 등 쪽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 갑자기 동공이 확장되더니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결계에 부딪힌 탓일까? 뇌를 울리는 진동이 커다란 고통을 수반했다.
이윽고 결계에 부딪힌 몸이 유리를 적시고 흘러내리는 물처럼 혈흔을 남긴 채 스르륵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로드…….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마지막 말과 함께 눈에 초점을 잃고 축 늘어지는 펫.
그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알렉산더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알았다.
『크으.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어!』
알렉산더는 너무나 허무한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본래 거인은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아니, 나설 수 없었다.
거인간의 분쟁은 서로의 펫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분쟁종료 후 떠오른 메시지.
《신디아 대륙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이제 율리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위대한 지도자의 길이 열렸습니다.]
[신디아의 황제로서 동료와 함께 데이터 아일랜드의 시련에 도전하십시오.]
[남은 시간 187일 5시간 35분 33초…… 32초…… 31초.]
반면, 앨버트는 이렇게 간단히 이길 줄은 생각도 못했는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알렉산더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절대 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펫이 상대방의 펫도 아닌 거인의 공격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검은 구체는 거기에 대해 아무 경고도 하지 않았다.
거인의 룰로 거인끼리의 다툼은 금지하면서, 왜 펫의 전투에 거인이 참여하는 것에는 아무 제약도 하지 않는가.
이건 반칙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이런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분명 잘못됐어. 검은 구체가 기능을 잃은 거야!’
본래라면 검은 구체가 거인의 룰 위반으로 녀석을 분해하는 광선을 쏘았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은 기능오류. 즉, 검은 구체가 제대로 규칙의 집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
앨버트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알렉산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서시죠. 저 또한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 바키우스에게 전하시죠. 무역을 재개하라고, 원래대로 돌리라고 말씀만 전해주십시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날카로운 칼을 뽑아 앨버트에게 달려들었다.
예측하지 못한 알렉산더의 공격에 앨버트는 피한다고 뒤로 물러섰지만, 칼날은 어느새 복부를 파고들었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지만 코웃음을 치는 알렉산더.
『바보는 자네야. 지금 상황으로 판단해볼 때, 거인의 룰은 작동하지 않지. 자네가 분쟁조정에 끼어든 게 바로 그 증거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황제의 자리를 뺏길 수 없는 알렉산더의 판단이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앨버트를 공격해도 검은 구체는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검은 구체는 알렉산더와 앨버트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가 무릎을 꿇었다가 앨버트를 기습하는 장면이 반복재생되었다. 이윽고 경고음을 내는 검은 구체.
《거인의 룰 위반 사항 발생, 피의자 『알렉산더 폰 베르키하트.』, 혐의 : 거인의 룰 1 위반에 따라 피의자를 구속합니다.》
검은 구체가 검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빛은 끈적끈적한 검은 액체로 변하여 알렉산더의 몸을 감쌌다.
알렉산더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이게 왜 위반이야! 왜 나만 위반이냐고!』
그러나 검은 구체는 앨버트를 향해 식칼을 찌르는 알렉산더의 모습을 반복재생할 뿐이었다.
검은 액체가 알렉산더의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고기 타는 냄새가 주변에 진동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음에 노출된 알렉산더가 발악을 해보았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스르륵, 검은 액체에 녹아버린 알렉산더의 신체를 검은 구체가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앨버트는 구역질나는 장면에 고개를 돌렸고, 강백현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순식간에 절명한 알렉산더는 액체에 녹아들어 구체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구체의 몸집은 아까보다 2배는 커져 있었다.
‘설마! 구체는 거인의 신체를 녹여 만든 거였어?’
끔찍한 비밀을 또 하나 알게 된 백현.
거인의 신체가 구체가 된다.
어떻게 보면 거인의 신체는 모두 쓰이는 곳이 있었다.
놀란 것은 앨버트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던 율리만.
율리만의 실체를 알면 알수록 끔찍하기만 할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들의 시체로 만든 거였어?』
앨버트의 자조 섞인 목소리에 강백현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율리만! 율리만! 나와! 나와!』
『소용없어. 우리의 부름에 응할 리가 없어.』
율리만과 대화하려면 황제가 되어야 한다. 율리만 섬에 가야만 그와 대화할 수 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까지 누구의 말에도 응답하지 않았던 율리만이 강백현의 말에 응답한 것이다.
검은 구체가 메시지 대신 기계음의 음성을 내뱉었다.
『인간 강백현.』
『율리만? 네가 율리만이야? 네가 내 동생이 말하던 그분 맞아? 그분이 맞냐고!』
『예스. 또 다른 질문은?』
『지구로 돌려보내줘. 우리가 원래 살고 있던 세상으로! 크기도 원래 크기로 돌려놓고!』
검은 구체가 기계음으로 대답했다.
『길게 말하지 않으마. 도전해라. 데이터 섬으로 와서 너의 소원을 이루어라. 네가 원하는 결과는 그곳에 있으니…….』
치지직. 기계음성이 종료되고 검은 구체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구체가 검은 액체를 토해냈다.
앨버트와 강백현은 액체 속에 있는 물건들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알렉산더의 살가죽.
백현의 크기에 딱 맞는 기능성 슈트.
그리고 능력이 담긴 두루마리.
알렉산더를 소화하고서 검은 액체를 토해낸 구체가 두루마리와 슈트에 대한 정보를 게시했다.
《위장이 가능한 슈트》, 그리고 《조종》 능력이 담긴 두루마리.
《조종》이란 능력에 대한 설명을 읽은 앨버트와 백현은 서로를 마주보며 대화를 나눴다.
『이곳은 방주였어. 거인을 보호하기 위한 노아의 방주……. 더 큰 세계와 더 큰 존재가 바깥에 있었던 거야.』
『그래. 그리고 우리는 조종사들이야. 조종 능력을 통해 외부의 무언가를 조종해서 세계를 지키기 위한 구원자였던 거야.』
세상의 비밀이 밝혀지고 있다.
세상의 일부분이었을 뿐인 거인 세계.
그리고 그 바깥의 세계.
그에 대한 비밀을 어렴풋이 알게 된 앨버트와 강백현.
그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말했다.
『가자! 율리만 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