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황제의 자리
건물 옥상, PC방 영업을 정리한 알렉산더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작하실까요?』
앨버트는 긴장에 긴장을 거듭했다. 황제는 물론 왕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희대의 살인마. 그 녀석이 지금 앞에 있었다.
그의 펫은 여우. 인간 여성과 결합한 키메라 형태였다.
인간의 체형이지만, 9개의 꼬리와 6개의 수염을 가진 요염한 얼굴, 거기에 반짝이는 원형 구슬을 들고 있었다.
백현은 인간과 흡사한 외양의 그녀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저기요? 제 말 들리세요?”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키야! 하고 여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알렉산더는 백현의 말을 단순한 펫의 울음소리라고 여겨 무시하고 자신이 할 말을 내뱉었다.
『싸우기 싫었는데 말이야. 지금이라도 못 본 척하고 돌아갈 순 없겠지?』
그의 말에 앨버트가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와서 되돌리긴 힘들 것 같은데요?』
웃음 뒤에 흐르는 긴장감.
분쟁조정이 시작되고 검은 구체가 펫과 펫이 싸울 수 있는 전장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앨버트가 검은 구체가 만들어낸 경계면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알렉산더가 앨버트에게 외쳤다.
『분쟁조정이 처음은 아닐 텐데? 그 안에 있으면 위험해. 나오지 그래?!』
그러나 앨버트는 경계면 안쪽으로 들어간 채, 결계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이제 분쟁조정이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는 상태.
알렉산더가 혀를 찼다.
『설마 매복이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거야? 그렇게 생각해서 한 판단이라면 인정해주지. 하지만 자네는 생각이 너무 많아.』
확실히 분쟁조정 중에 다른 자의 펫이 거인을 공격하면 무방비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앨버트가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얼굴은 곧 진지해졌다.
『설마, 내가 고립된 건가?』
그런데 주변을 둘러봐도 그런 낌새는 없었다.
오히려 딱딱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앨버트의 얼굴이 인상적일 뿐이었다.
백현과 여우인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백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보호막을 펼치며 자신의 안전을 살폈다.
그때, 여우 인간이 들고 있던 구슬이 백현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보통이라면 보호막에 막혀야 하는 게 정상인데, 구슬은 보호막을 물 흐르듯 통과하여 백현의 신체를 타격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구슬의 크기는 백현의 3배는 되어보였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백현이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여우인간을 쳐다보았다.
그때, 여유롭게 백현을 노려보는 여우인간의 손에는 방금 자취를 감추었던 구슬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투명한 보호막도, 넓게 친 보호막도, 두꺼운 보호막도 구슬의 궤도를 바꿔낼 순 없었다.
몇 번의 공격을 받아낸 끝에 백현은 구슬의 능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보호막을 부수는 게 아니라 뚫고 들어오는 힘.
그렇다면 예상되는 성질은 투과.
백현은 일단 보호막으로 막는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며 시간을 벌기로 결심했다. 도망친 곳은 360도 쉴 새 없이 회전하는 환풍구 방향이었다.
그 뒤로 숨어 모습을 감추고 공략법을 찾는 게 백현의 해법이었던 것이다.
백현이 몸을 뒤로 빼고 모습을 숨기자 알렉산더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앨버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현에게 물었다.
『상처 심한데 괜찮겠어?』
백현은 앨버트의 말에 깜짝 놀라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도망치기 전에 몇 번의 공격에 노출되었던 다리에서 혈흔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아-』
그제야 통증이 올라왔다. 백현은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 알아챈 앨버트가 서둘러 말했다.
『일단 분신으로 시간을 벌어.』
『응.』
분신, 그러나 백현이 만들어낸 분신을 본 알렉산더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상처 입은 본체와 달리 분신은 모든 게 멀쩡했다. 먼지 하나 뒤집어쓰지 않은 깨끗한 피부는 물론이고, 상처 하나 없이 완전한 상태로 2명의 백현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체와 분신을 한눈에 구분할 수 있었다. 여우는 분신을 무시하고 본체를 노렸고, 백현은 다시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백현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날카로운 궤도로 날아오는 구슬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백현의 분신들이 구슬의 궤도에 끼어들어 자신을 희생했다.
그 덕에 2번의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백현 자신의 체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렉산더는 승리를 자축했다. 상대의 펫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어 숨을 몰아쉬고 있지 않은가.
계속 날아드는 구슬.
승리를 기다리는 알렉산더.
그러나 이 순간, 앨버트가 무릎을 꿇고 구슬을 막아섰다. 알렉산더는 그 모습을 목격하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는 거지? 죽으려고 작정한 건가?』
공격을 막아낸 것은 앨버트의 종아리였다.
커다란 구슬을 발로 차며 직접 몸으로 받아낸 것.
하지만 구슬의 힘이 거인의 발차기에 담긴 힘보다 컸기에, 앨버트는 종아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내질렀다.
『크으……』
앨버트는 볼링공을 발로 찼을 때와 비슷한 느낌에 충격을 받았다. 구슬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그걸 작은 몸으로 받아낸 백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물론 알렉산더는 앨버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네?』
『고작 저런 하급종을 위해 목숨을 버릴 생각인가? 아니면 어차피 내가 이기면 자네를 죽일 거라고 생각한 거야? 지금 와서 말하기도 뭐하지만, 황제와 왕자를 죽인 건 내가 아니야. 자네가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어.』
알렉산더의 말에 앨버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목숨을 버리려는 게 아니라, 이번 승부에서 이기려는 겁니다.』
『이런 멍청한! 펫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의 생명은 하나야. 다치면 누가 보상하는데? 괜한 짓 하지 말고 비켜! 분쟁조정은 금방 끝내 줄 테니까!』
하지만 앨버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부가 보여준 동영상에서 사부는 자신의 펫을 가족처럼 생각했다. 동거동락하며 평생을 함께해 온 펫. 사부는 펫과 전투도 함께 했었다.
황제와의 비공식 전투에서 이긴 방법은 바로 펫과 함께 싸우는 것.
이곳 거인의 세계에서는 절대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사부는 이를 고수했고 결국 황제까지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얻었다.
그랬다.
펫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신은 뒷짐을 지고 안전을 도모한 채 모든 것을 펫에게 맡기는 전투방식은 어떻게 보면 비겁하기도 하고, 치사한 짓이기도 했다.
깨달음. 그리고 거기에 따라 전투방식이 전면적으로 변화했다.
강백현은 앨버트의 행동을 통해 거인도 펫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나올 수 있었으면 진작에 그랬어야지. 왜 처음에는 머뭇거린 거야?』
강백현의 질문에 앨버트가 씩 웃었다.
『당연히 이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앨버트의 답에 자존심이 상한 강백현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소리 높여 항변하지 않은 것은, 상대방이 아직 실력의 일부분밖에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알렉산더가 자신감을 과시했다.
『혹시 내가 실력이 없어서 피해다닌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잘못 생각한 게야. 내 펫의 능력은 4개나 되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우인간이 들고 있던 구슬의 색깔이 분홍색으로 변했다.
이를 보며 앨버트가 강백현에게 경고했다.
『현혹이야. 저 구슬에 노출되면 통증도 못 느낄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져. 그 후에는 죽는 거지.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해.』
앨버트가 경고한 분홍색 구슬이 백현에게 향했다.
앨버트는 자가치유 능력으로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강백현에게 시간을 벌어주고자 손바닥을 내밀어 분홍색 구슬을 막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분홍색 구슬은 앨버트의 손을 투과해 백현을 향해 정직하게 날아갔다.
앨버트는 처음 구슬과는 달리 자신의 신체마저 통과하는 분홍색 구슬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분홍색 구슬도 보호막은 뚫지 못했다. 보호막과 충돌하더니, 분홍색 가스를 주변에 흩뿌리고는 그 자리에서 소멸하고 만 것이다.
그 다음 공격도, 그 다음 공격도 마찬가지. 앨버트의 신체는 통과하지만, 백현의 보호막은 뚫지 못했다.
백현은 그걸 통해 녀석의 패턴을 파악했다.
처음의 커다랗고 파란 구슬은 신체에는 막히는 반면 보호막을 투과할 수 있고, 분홍색 구슬은 신체는 통과해내는 반면 보호막에는 가로막히는 단점이 있었다.
알렉산더는 차분하게 대응하는 앨버트와 강백현을 보며 박수를 쳐댔다.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군.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지만, 이번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을까?』
녀석의 펫이 두 개의 다른 성질을 지닌 구슬을 동시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왼손에는 처음의 커다랗고 푸른 구슬을, 오른손에는 작지만 현혹 가스를 담을 수 있는 분홍색 구슬을.
그걸 보며 앨버트가 비웃으며 말했다.
『나눠서 막으면 됩니다. 푸른 구슬은 내가, 분홍색 구슬은 백현이가 막으면 끝나죠. 어차피 무한정 쓸 수 있는 능력도 아니잖습니까? 현혹 가스는 저한테 통하지도 않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알렉산더는 앨버트의 작전을 듣곤 코웃음을 쳤다.
『설마 정직하게 예상되는 경로로 던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실망이거든.』
여우의 아홉 꼬리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과 물줄기.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네 번째 능력이 밝혀졌다.
꼬리에 담아둔 불과 물의 힘을 개방하자, 녀석의 주변에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승리패턴을 공개한 알렉산더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열감지 안경을 꺼내 착용했다.
『여우는 원래 후각이 좋지. 거기에 인간의 뛰어난 지능, 판단력이 더해진 내 펫은 위기대응능력도 수준급이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공격, 과연 너희들이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앨버트는 결계 안을 꽉 채우는 안개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코앞은 물론 강백현의 위치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막을 수가 없는데? 어디서 공격이 날아오는지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위치도 보이지 않는다.
앨버트는 당황했다. 상대방의 수를 모르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
『어떻게 해야 하지? 방법이 없어!』
그런데 알렉산더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푸른 구슬의 궤도를 파악한 듯한 효율적인 움직임.
분홍색 현혹 가스가 퍼진 부분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한 끗 차이로 피해가는 백현의 동선.
그러고는 점차 흐릿해지더니, 결국 강백현은 그대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어떻게 피하는 거지? 무슨 요술을 부리는 거야? 어디 갔어? 어디 갔냐고!』
그때, 강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버트, 걱정하지 마.』
『응?』
『난 다 보여. 상대방의 위치도, 공격 경로도.』
강백현이 미니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장 안의 분홍색 가스의 위치와 구슬이 날아오는 경로. 거기에 상대방의 위치까지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미니맵. 미니맵은 강백현으로 하여금 30분간의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하고 있었다.
“이제 반격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