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자경단
에반은 피곤해 자고 있는 백현을 사무실에 두고, 바깥 공기를 마시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정겨운 풍경, 도르시안의 사막과 다르게 넓은 초원과 대지가 살아 숨쉬는 장소, 어릴 적부터 뛰놀던 그리운 공간이 에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문소 앞에 있던 건물들은 전부 폐허가 되어버렸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자주 찾았던 빙수가게도, 그림책을 그릴 도구를 사려고 몇 번인가 왔었던 문구점이나 아버지께서 항상 책을 읽으라 하여 같이 들리곤 했던 서점조차 문을 닫았다.
《Sold out!》
덩그러니 놓여있는 팻말.
거기에 깨진 유리창과 거친 바람에 빛바랜 내부 가구들이 더해진 풍경이 에반으로 하여금 씁쓸함을 느끼게 했다.
『울적하십니까?』
『어떻게 4년 만에 이렇게 될 수가 있지?』
『그러게 말입니다. 한때는 아르케 다음으로 번영한 도시가 저희 신디아였는데, 지금은 뭐…….』
둘의 대화를 듣던 나타샤가 끼어들었다.
『당장 가요. 소생의 돌인가 뭔가 숨겨진 장소로 당장!』
하지만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먼저 황제의 위치를 알아야 해.』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숨겨진 장소로 가는 키를 뺏겨버렸거든.』
『그럼 결국 싸워야 하잖아요. 그 괴물이랑 싸워서 어떻게 이기려고요?』
앨버트도 궁금했다.
행방불명되었던 에반 왕자가 4년 만에 돌아왔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분이셨으니까. 뭘 하나 해도 똑 부러지게 준비하는 분이셨으니까.
그때 에반이 옷의 안주머니에서 파피루스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쳤다.
그걸 본 앨버트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동안 이걸 구하려고 죽은 척하고 계셨던 겁니까?』
에반이 꺼내든 키메라 조합법.
그걸 보자 나타샤의 얼굴에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대단해요. 사실 도르시안의 황제도 키메라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제조 기술은 없어요.』
『그래? 그럼 그건 어떻게 얻은 건데?』
『율리만이 요구하는 슈트를 제공하는 대가로 얻었다는 게 정설이죠. 율리만은 3cm짜리 수천만 개의 슈트를 만들도록 도르시안의 황제에게 요구했다고 해요. 그 대가로 날개달린 사자, 즉 키메라를 얻었다는 게 정설이고요.』
나타샤의 말에 에반은 깨달았다.
모든 흑막은 율리만이라는 것을.
『사실 나도 고백할 게 있어.』
『네?』
『우리 황족들은 능력을 보관할 수 있는 두루마리를 만들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 앨버트는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습니다. 왕자님, 그 제조 기술은 극비로서, 황제와 그의 피를 물려받은 왕자님들만이 알고 계셨죠.』
아르케는 키메라 합성 기술을, 도르시안은 슈트 제작 기술을, 신디아는 능력이 담긴 두루마리 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타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우리 신디아 대륙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거죠? 더 이상 나라 없는 슬픔을 겪지 않아도 되는 거죠?』
『키메라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진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나는 최강의 펫을 만들기 위해 여기로 돌아온 거니까.』
에반은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분명 그 똑똑한 펫이 다른 강력한 생물과 합쳐진다면, 그 말씀도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키메라를 단번에 성공시킬 수 있을까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많은 실험을 해야 할 테고. 자금과 인력도 많이 필요할 거야.』
에반의 말에 앨버트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거라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왕자님, 사실 고향에 남은 동료들도 많습니다. 지금은 수입품이나 공산품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자급자족하느라 뿔뿔이 흩어졌지만, 왕자님이 돌아오셨다고 하면 바로 모일 녀석들입니다. 왕자님의 계획이 그러하다면, 바로 녀석들을 소집하도록 하겠습니다.』
앨버트의 말에 에반이 잠시 과거의 추억에 젖어들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황권. 그러나 자신을 떠받치던 수많은 부하와 백성들이 지금 뿔뿔이 흩어져 고통받고 있다.
『그래. 일단 모이자고.』
『네.』
한편, 나타샤는 어릴 적에 동경했던 황족의 진정한 모습을 에반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국가를 원망했고, 황제를 원망했고, 그의 가족인 황족들을 원망했다.
자기들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자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음직스러웠다.
비록 아직 크게 보여준 건 없지만, 그래도 커다란 희망과 포부를 지닌 에반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내 펫 앞에서는 비밀로 해. 우리 말 다 알아들으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는 거인들. 그런데 문제의 그 펫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에반! 돌아가야 돼. 아르케로 당장! 지금 당장!』
『갑자기 무슨 일인데?』
『이거 봐! 아르케 녀석들이 내 동생한테 현상금을 걸었어. 나 이대로 못 있어. 나! 여기서 더 못 있겠어! 못 있겠다고!』
에반은 강백현이 가리키는 수배자 명단을 바라보았다.
다른 인물들은 다 자신과 같은 거인인데, 유일하게 펫으로 적혀있는 한쪽 칸에 사진이 붙어 있다.
거인어로 써져 있는 동생의 이름.
○ 현상수배 안내
펫 이름 : 강미나
사유 : 가자 연구소에서 탈출
마지막 목격장소 : 아르케 1-8지역 가자 연구소.
크기 : 약 3cm
종 : 휴먼 (합성종 : 키메라로 추정됨.)
능력 : 상대방의 생각을 알아들음.
특징 : 우리말을 할 줄 앎.
생포시 가자 연구소에서 현상금 2,000,000제니를 지급합니다.
※ 반드시 생포해서 잡아와야 현상금을 지급합니다.
『에반! 에반! 왜 대답이 없어? 내 동생! 내 동생 구해줘. 구하러 가자고! 어?』
에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백현에게 말했다.
『보호막 해제.』
『뭐?』
『진정하라고. 잠시 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에반이 품속에서 수면가스를 꺼내들었다.
칙! 칙!
강백현을 향해 뿌려지는 수면가스.
강백현이 이를 악물고 졸음에 저항하며 소리쳤다.
『에반! 에반! 에반!!!』
하지만 보호막 없이 수면가스를 버틸 순 없었다.
강백현은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거인들 간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가끔 저렇게 제어가 안 돼. 앨버트, 혹시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할 수 있는 펫을 가지고 있는 자를 알아?』
『왕자님, 지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최대한 빨리. 깨어나기 전에 기억 좀 지웠으면 좋겠네.』
* * *
같은 시각.
거주지에서는 강미나에게 현상금을 건 거인들의 행동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얼른 내보내야 합니다. 200만 제니라니! 거주지가 위험해요. 그 금액이면 빌딩도 살 수 있는 금액이에요.”
“아니에요. 협상을 하죠. 거인에게 그 여자를 넘기고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아~ 불안해! 마스터는 왜 저런 애를 데려온 거야? 불안해 미치겠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인간에게는 처음으로 내걸린 현상금. 그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강미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며 골칫거리로만 치부했다.
하지만 마스터는 달랐다.
“자~자! 다들 조용하세요! 누가 이렇게 떠듭니까? 대형사고라도 났어요? 누가 죽었어요?”
“…….”
김건우는 이진기의 죽음을 애써 무시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하자는 마스터의 말이 걸렸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여러분께 밝혀두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구해온 강미나는 영혼의 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돌이 여기 있습니다. 이 돌이 있으면 죽은 사람도 한 번 되살릴 수 있죠. 다들 알 거예요. 이 돌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인들도 만들 줄 모르고, 우리도 만들 방법을 모르죠.”
마스터의 설명에 사람들이 경청하기 시작했다.
“거인들이 소생의 돌과 영혼의 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소생의 돌과 영혼의 돌은 모두 거인의 소유였지, 펫이 직접 가지고 있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 전에 그런 일이 있었든 없었든, 표면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죠.”
“그래서 대화로 하자는 거 아닙니까? 마스터! 불안해 죽겠습니다.”
“정말 불안해요. 저희 거주지 들키면 어떻게 해요? 앞으로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겠어요.”
생산조 중 일부가 반기를 들고 장명훈의 의견에 반대했다.
하지만 마스터 장명훈은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그들이 우리를 인격체로 인정해줄까요? 그들은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우리를 인격체로 인정했다면 현상금이 아니라 대화나 성명 발표를 했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거인들만 볼 수 있는 거인들의 채널과 전단지로 인간들을 연구자원으로 명백히 못 박았습니다. 지금 대화로 풀자고요? 죽으려고 환장했습니까? 지금은 시간이 지나길 기다려야 합니다. 숨죽이고 지켜봐야 할 때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공표하지 않은 한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인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지금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다들 조용히 해주시고 때를 기다려주십시오.”
거주지의 대표, 마스터 장명훈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사람들의 불만이 누그러졌다.
여전히 맘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적어도 마스터의 앞에서 바로 내뱉진 않았다.
정선희는 강미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이것 봐. 마스터는 좋은 사람이라니까.”
“네. 언니.”
하지만 미나는 마스터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다 자기 복수심 때문이잖아. 복수하려고. 살인계획 세우고 있는 거잖아.’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이곳에선 그가 왕이기에.
수년간에 걸쳐 절대적인 권력을 형성했기에, 그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은 여기 사람들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았다.
마스터는 작전조와 정보조 사람들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계획을 설명했다.
“오늘 좀 놀랐지? 다른 계획이 있다는 거. 건우와 태석이 빼고는 아무도 몰랐을 거야.”
김건우와 한태석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스터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바키우스 암살 계획에 대해 설명할게. 아르케의 실질적인 황제 바키우스는 최강의 펫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 펫은 너희들이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의 배신자야. 우리랑 같은 인간이고, 또 한국인이지.”
마스터 장명훈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조윤아? 조윤아 사모님 말하는 거야?”
“사모님 이야기를 왜 꺼내! 미쳤어?”
“아니, 바키우스라잖아. 그 펫이 조윤아 맞잖아! 우리 가족들 다 배신하고 자기만 살아남은 독한 년! 그 여자 맞잖아!”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장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윤아 맞아. 내 전 와이프였기도 했고.”
“마스터! 마스터!”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금기.
조윤아에 대한 이야기가 마스터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자, 작전조와 정보조의 대원들이 다 같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래. 다들 나만 믿어. 너희 부모님들, 가족들, 자식들 복수 내가 반드시 해 줄 테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마스터!!!!!!”
장명훈을 향해 쏟아지는 함성.
장명훈은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을 보며 결심했다.
이번 계획은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조윤아를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