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부-
“어머! 자기, 언제 온 거예요? 어제는 금방 올 것처럼 하고 나가더니...... 툭 하면 그런 식으로 사라져 버리고......”
새벽에야 퇴근하는 사람이니 아직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인기척에 잠을 깬 듯 세미가 눈을 비비고 있었다.
기찬은 마담에게 다가가 눈가에 입을 맞춰주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는다.
“아이 참, 세수도 안 했는데 입을 맞추고 그래요?”
“후훗, 뭐 어때? 금방 왔어. 그나저나 어제 여진이가 뭐라고 안 그래? 미라네 오빠 아파트 사줬다는 말을 듣고 도끼눈을 뜨기에 슬그머니 피한 건데......”
“피...... 아닌 게 아니라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더라. 술을 한 잔 하더니 나한테 막 하소연 비슷하게 하더라고...... 알기도 자기가 먼저 알았는데 미라한테 많이 밀린다고 생각하나 봐요. 따돌림을 당한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고...... 잘 좀 달래줘요. 기찬 씨하고 친구 관계를 떠나서 앞으로 방배동 사업을 꾸려가려면 꼭 필요한 아이들인데 여진이 같은 애들 상처 주면 안 돼요.”
“하! 이것 참......”
“참! 오늘 무슨 동창회 모임이 있어서 나간다던데, 자기랑 동창이라면서 기찬씨는 그런 연락 못 받았어요?”
“동창회? 나야 중퇴를 했으니 그런 연락이 올 턱이 없지. 참! 그러고 보면 여진이도 현재 휴학생이니까 그런 연락이 올 리가 없는데......”
“후훗, 그럼 확인도 할 겸 전화를 해 봐요. 어쨌든 빨리 달래 주는 게 오해도 덜고 기찬 씨한테 유리할 테니까...... 호호호......”
세미는 욕실로 들어가며 웃음을 흘리고, 겸사겸사 난감해지기도 한 입장이니 할 수 없이 전화기를 꺼내 발코니로 걸음을 옮긴다.
“여진이니?”
“......”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진아......”
“왜 그래? 말 해......”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선뜻 대답을 해 오지 않으니 기찬으로선 매우 난감한 노릇이었다. 정작 앞으로 추진할 사업은 둘 째 치더라도 이미 오래 전 애틋하게 생각했던 여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는 기찬이었다.
“너, 왜 그러니? 혹시 미라 오빠한테 아파트를 사 줬다고 해서 그러는 거야?”
“......”
“그건......”
“누가 그것 때문에 그렇대. 공연히 사람 치사한 계집애 만들고 있어. 그런 일이 있었으면 귀띔이라도 해 줄 수 있는 건데......”
“하하, 그럼 그렇지. 여진이가 그럴 리가 있나? 여진이 가족 중에 누가 그런 입장이 됐다고 하더라도 내가 똑같이 했을 텐데......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피...... 순 말로만......”
“그럼 여진이 앞으로도 뭐라도 하나 해 줄까? 그럼 믿겠어?”
“어머! 정말이야? 그럼 시골에 있는 우리 엄마도 집 한 채 사 줄 수 있어?”
“나, 이런...... 그래, 알았어. 그럼 됐지? 적당한 때가 오면 그렇게 할 테니까 이젠 오해 풀고...... 참! 그리고 동창회는 무슨 소리야?”
“어머! 그건 어떻게 알았어?”
“나, 지금 마담 집에 와 있어. 마담한테 들었지.”
“어머머! 기찬이 너...... 나중에 박 상사님 알면 어쩌려고......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야?”
“에헤이, 또 쓸 데 없는 소리. 동창회가 무슨 소리냐니까......”
“아! 그거...... 내가 동창회 사무실에 전화를 했어. 사실 휴학생인데 복학할 것도 아니니까 이대로 영영 그만인데 혹시라도 동창회에 임의로 가입할 수 없냐고......”
“그건 왜?”
“후훗, 손님 확보 차원이지. 뭐......”
“으응? 아! 하하하...... 난 또 뭐라고...... 하긴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다. 아닌 게 아니라 늘 있는 술자리에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동문이 있는 집을 찾아주겠지.”
“후훗, 그럼 같이 가 볼래? 혼자 가기 쑥스럽기도 한데......”
“같이?......”
“으응, 그래. 같이 가 보자. 너도 결국 동문이니까 중퇴지만 자격은 나하고 비슷한 거잖아. 그럼 그동안 나 따돌린 거 용서해 줄 테니까......”
“얼씨구? 따돌린 거 아니라니까......”
“알았어. 그럼 같이 가는 거다? 알았지?”
“알았다. 그럼 거기가 어딘데......”
“그럼 나중에 카이로 앞에서 만나. 점심때쯤...... 아니다. 점심시간에 가면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지 모르니까 한 열 한시 어때? 미리 동창회 일 보고 점심 먹으러 가면 되지 않을까?”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그리고 너 혹시라도 마담이 어쩌니 하고 입 함부로 놀리면 안 된다. 알았지? 혹시라도 박상사가 오해하면 큰일이니까......”
“핏, 오해는 무슨 오해. 벌써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군. 그래?”
“에그, 전화 끊는다. 나중에 보자.”
어느 새 다가온 세미가 등 뒤에서 허리를 안아온다. 따뜻한 가슴 감촉이 등을 압박하고, 장미 향기가 코로 스민다. 처연한 느낌을 주는 만큼 갈수록 다감한 여자였다.
“잘 했어요. 그렇게 안아주다 보면 여진이도 자기한테 더 잘 할 거예요. 이제 방배동 일을 하다보면 점점 더 서로에 대한 일들을 속속들이 많이 알게 될 텐데...... 누가 알아요? 그렇게 사소한 것 때문에 나중에 속을 끓일 일이 생기게 될지......미리 미리 처방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후후, 그렇지. 벌써 우리 사이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으니...... 세미 씨는 나한테 서운한 거 뭐, 없어요? 있으면 세미 씨도 말해요.”
“어머! 아니에요. 호호호...... 무슨 말을 못해. 나는 지난 번 서교동 호텔에서 금주 언니 남편 만난 자리에서 나를 안 붙이고 여진이를 불러 낸 것만 해도 벌써 감격하고 있답니다. 기찬 씨가 당신 여자로 인정해 준 것만 같아서...... 어서 준비해야 되겠네요. 여진이 만나러 가려면...... 여기 남태령 고개 차 많이 막혀요.”
“아! 이런...... 여기까지 와서 이게 뭐야? 엉뚱한 일에 휘말려서......”
“호호, 그러니까 여자 관리 잘 하세요. 자칫하면 한 여름에도 서리 맞는 수가 있으니까...... 이 홍 세미는 질투 같은 건 안 할 테니까 안심하시고...... 호호호......”
“그래, 그럼 갈게......”
“고마워요. 오늘 와 준 거......”
“이렇게 나를 잘 이해해 주는 건 세미 씬데...... 그러지 말고 우리 확 결혼해 버릴까?”
“어머머! 오늘 왜 이렇게 나를 감격을 시키실까? 됐네요. 서방님. 어서 가 보기나 하세요. 나중에 가게에서 봐요.”
그렇게 어린아이 달래듯 엉덩이를 두들기는 마담과는 진한 입맞춤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그나마 세미에게는 여러 가지로 점수를 후하게 받은 셈이었다.
카이로 앞, 여진을 기다리고 있자니 세미와의 입맞춤 뒤여서인지 알싸한 양치 후의 느낌이 아직도 입안을 겉돌아 미소를 짓게 하고, 거리에 서 있는 것이 공연히 머쓱해 가게 안에 들어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어머! 기찬아...... 기다려.”
“아! 어서 와. 으응? 누구야? 이 분은......”
숨이 턱에 차서 달려 온 여진이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쫓아왔을 다른 아가씨가 한 명 더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잔뜩 멋을 부려 정장을 갖춰 입은 아가씨는 일견하기에도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으니 기찬으로선 관심이 가는 일이었다.
“으응, 아이 숨 차...... 내 친구야. 내가 일전에 말했잖아. 결혼했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애들 있다고......”
“아! 그럼 결혼을 하신 분? 하하하, 이렇게 봐선 전혀 모르겠는데......”
“칫! 결혼을 하면 뭐,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닌다든? 괜히 띄워주고 난리야......”
여진은 아직도 기찬에게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애교를 부리는 것인지 여전히 툴툴거리고 있었지만, 마담 세미에게 코치 아닌 코치를 받고 보니 그것마저도 귀엽게 보이기만 할 뿐, 역시 감싸안아줘야 할 내 여자라는 느낌만이 강하게 자리를 잡는다.
“하하하, 그래. 그래. 알았다.”
“사실 며칠 전부터 일을 하겠다는 걸 요즘 자기가 나한테 하는 게 미워서 박 상사님한테 붙일까 했다가 특별히 데리고 온 거니까 네가 알아서 잘 관리해 줘. 뭐, 이제 보니 어차피 마담 언니도 자기랑 한 통속인 것 같기도 하고......”
“풋! 너 정말 많이 화가 났던 모양이구나?”
“흥! 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정말 미라하고 둘이서 나를 따돌린 게 아닌지......”
“하하하, 그래. 그래. 그건 어찌 됐든 본의 아니게 네가 마음 상했다니까 내가 사과할게.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여진이 너는 내 첫사랑이나 다름없다는 거 알고 있지? 내가 너를 가슴 아프게 할 이유가 없잖아.”
“피......”
“자,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움직이자. 동창회 사무실에도 가야 할 것 아냐?”
“어머! 참, 유라는 조금 있다가 무슨 약속이 있어서 거기 먼저 가 봐야 하는 모양이야. 두 사람은 잠시 후에 다시 만나서 머리를 올리든지 하고...... 그럼 어떻게 하지? 음...... 유라, 네가 나중에 볼 일 다 보고 나나 기찬 씨한테 전화를 할래?”
“으응, 그, 그럴까? 저...... 마스터님, 그렇게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아! 이름이 유라 씨에요? 그럼 그럽시다. 전화기 이리 줘요. 내 번호도 입력해 줄 테니까......”
“네, 여기요. 저는 장유라에요.”
“네, 장유라 씨......”
휴대전화에 그렇게 번호와 이름을 입력해 두고는 잠시 얼굴을 바라본다. 어쩌면 얼굴이며 몸매, 어느 한 가지 부족할 것이 없는 여자들은 왜 그리 술집으로, 술집으로 모여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즐겨가며 쉽게 돈을 벌 수 있으니 그도 그럴 것이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퀭하니 뚫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유라 씨는 어느 방면으로 갑니까? 같은 방향이면 모셔다 드릴 테니까......”
“어머! 이제 말씀 낮추세요. 제 마스터님이신데...... 호호호......”
“호호, 그래. 기찬 씨, 조금 있으면 서로 살 섞을 사이에 무슨 존대야? 그래, 그러면 우리야 뭐 사실 바쁜 일도 아니니까 유라 약속장소에 내려주고 가자. 우린 회현동 쪽으로 가야 하는데, 넌 어디라고 했지?”
“으응, 잘 됐네. 나도 그쪽 방면이니까 적당한 데서 내려주면 돼. 그 근처 호텔이니까......”
“호텔? 어머! 그럼 너, 아직 마스터도 없이 벌써 몰래바이트 하고 다니는 거야? 그러다 고약한 놈 만나서 큰 일 나려고......”
“아, 아니야. 그런 일...... 그냥 잠시 얼굴만 내밀면 되는 건데......”
이미 기찬은 차를 몰아 회현동 방면으로 길을 잡고 있었지만, 관심은 온통 유라에게 쏠리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일로 또래의 새로운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것이 이른 바 결혼한 남의 여자라는 것이니 잠시 후면 머리를 틀어달라며 자신에게 수청을 들 사이라는 것이 새삼 전율을 일으킨다.
잠시 후, 다시 만날 것을 당부하며 유라는 인파 속으로 총총히 사라지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기찬에게 여지없이 여진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아주 넋을 잃고 봐요. 아예 데리고 살지?”
“으응? 아! 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이런 미인을 옆에 앉혀두고......”
다시 차를 몰아 길을 가는 중, 느닷없이 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여진은 기찬을 바라본다. 아마도 종종 그런 일이 있었으니, 전화를 핑계로 또 빠져나갈 궁리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표출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전화는 지난 밤 연경의 일로 작업을 해 두었던 사내의 전화였으니 기찬으로선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억을 호가할 수 있는 주택의 권리를 이전받는 일이니 삼수, 갑산을 가더라도 만나야 할 일이었고, 곁에서 통화내용을 들은 여진으로서도 만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갔다가 다시 올 수 있는 거야? 점심이라도 모처럼 함께 먹고 싶었는데...... 칫, 조금 있다가 유라 계집애가 머리 올려달라고 하면 또 거기로 가야 될 거 아냐?”
“하, 이거 참...... 일단 시간 봐서 여진이 너한테 꼭 전화를 해 줄 테니까, 우선은 먼저 가서 볼 일을 보고 있어. 동창회 가입이 나도 가능하다면, 네가 알아서 나도 가입시켜 주고...... 뭐, 조건이 안 돼서 기부금 같은 거라도 필요하다면 그건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너, 정말이지? 그럼 내 돈도 네가 내 줘야 한다.”
“그래, 그래. 알았어. 그것뿐이겠니? 지금 가는 일이 잘 마무리되면 시골에 계신 우리 장모도 새 집 한 채 떡하니 사 드릴 테니까 그것도 기대하고......”
“어머머! 기찬 씨, 너, 그 말 정말이지?”
“그래, 이 계집애야.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살갑게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툭하면 질투나 하고......”
“호호......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어. 그래, 다신 안 그럴게......”
사내를 만나기엔 아무래도 항상 움직이는 공간이 편할 것 같아 삼각지 여관으로 불러들인다. 역시 낯 설은 환경은 누구에게라도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일이고,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조용한 환경은 작업을 꾸려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니, 마침 이야기가 끝날 무렵, 전화가 울려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는다.
“네......”
“으응, 기찬아. 나야. 지금 전시장에 금주하고 위원장님 와 계신데, 올 수 있어? 뭐, 상의할 것도 있으신 모양이던데......”
“아! 누님?......”
유라가 아니면 여진의 전화일 것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생각지도 않은 지수의 전화를 받는다. 가구 전시장 개점 축하를 핑계대고 왔겠지만, 금주의 남편이 자신에게 상의할 일이 있다면 방배동 일일 것이니, 만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갑자기 꼬이는 문제가 기찬의 발등을 내리찍는다.
“아! 이것 참, 한꺼번에 일을 너무 많이 벌려뒀어. 소공동에는 언제 가 봤는지도 모르겠고...... 그나저나 여진이는 어떻게 한다?......에이, 모르겠다......”
할 수 없이 금주와 그 남편은 근처에 있는 지영의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점심접대를 하도록 하고, 기찬은 여진이 있을 동창회 사무실 방면으로 차를 몰아간다.
“계집애, 근근이 화를 풀어서 마음을 돌려놓았는데, 여기서 또 어긋나면 얼마나 갈지 모르니 우선은 여진이부터 챙겨야 할 일이지.”
차를 몰아가는 기찬의 마음은 바쁘기만 하였다. 벌써 점심시간은 지나 한 시를 육박하고 있는데, 시장기가 돌 무렵, 여진이 잔뜩 내천 자를 그리고 이맛살을 구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차를 막아서는 신호등이 야속할 뿐이었다.
신호에 밀려 정차하는 순간, 담배를 꺼내 무는 기찬의 눈에 기이한 풍경이 들어온다.
“으응?......”
자신의 앞에 선 몇 대의 차 앞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그 무리 속에 형수 보라의 얼굴이 있었으니 기찬은 고개를 뽑아 그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아! 그래, 여기가 대양 호텔 앞이었지...... 벌써 상견례를 마친 모양이군.”
하지만, 잠시 후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곁에 사돈댁의 식구들을 에스코트하듯이 둘러싸고 가는 인물들 중에 조금 전에 인사소개를 받은 유라의 모습이 섞여있었던 것이었다.
“어, 어라! 저건 또 뭐야? 유라가 왜 저기 있지? 그, 그러면 유라가 혹시 소라의 시누이 감?......”
뒤에서 경적을 눌러대는 차들로 인해 할 수 없이 떠밀려 차를 몰아가지만, 기찬의 머릿속은 매우 복잡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여진을 만나러 가는 일도 잠시 미룬 채, 한 곁에 차를 대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것 참, 그러면 유라가 어찌 됐든 소라의 시댁 식구 중 하나라는 말인데......”
동서간이 될는지 시누이, 올케 사이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사돈인 소라의 일이 결국 이런 식으로 엮여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으니, 과천에서 만났던 소라의 얼굴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여보세요?”
“아! 유라 씨?......”
“네, 마스터 님. 저 볼 일 모두 마쳤거든요. 지금 어디에 계세요? 여진이도 함께 있나요?”
어차피 여진의 동창회 일은 기부금이 필요하다면 그것마저 부담해 주기로 했고, 무엇보다도 시골에 계신 모친에게 집을 사 주겠다고 했던 것이 주효했으니, 이렇게 되면 잊어도 좋은 일이었다.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른 소라와 유라의 관계가 무엇보다 궁금한 일이었으니, 그녀의 전화에 또 하나의 내밀한 사연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즐거움으로 기찬은 차를 돌린다.
“후훗, 소라 계집애, 제 언니 뿐 아니라 자기 시댁 식구하고도 이런 사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나중에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찬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되고, 이미 지나오면서 그녀를 보아 두었으니 그 방향으로 차를 몰아가다가 적당한 장소를 지정해 유라를 픽업한다.
“어머! 근처에 계셨던 모양이에요. 금방 오셨네요?”
“아! 마침 바쁜 일이 생겨서 여진이는 혼자 보냈어요. 그나저나 유라 씨는 볼 일 잘 보셨나요?”
“아이 차암, 이젠 반말을 하시라니까요. 제가 더 불편해서 못 견디겠어요.”
“아! 하하...... 그럼 그럴까? 뭐, 여진이하고 친구라면 나하고도 친구인 셈이니 그러지. 그럼......”
“호호호...... 그래도 저는 존대를 할 거니까, 마스터님만 편하게 하세요.”
유라는 이내 친한 척 기찬의 허벅지에 팔을 얹으며 교태를 흘려온다. 아직 살만 섞지 않았을 뿐, 이제부터 기찬은 자신의 남편보다도 자신을 속속들이 점령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남편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지?”
“네, 건설회사 일을 하는데 현장 관리직이라서 지금은 삼 년 계약으로 이집트에 가 있어요.”
“아! 그렇군. 그러면 현장 소장이라는 건가? 그거 돈벌이가 제법 짭짤하다고 들었는데......”
“네, 그런 편이지만, 그래도 어디 저희들 씀씀이가 워낙 크다보니...... 호호호......”
“그래, 아기는 아직 없고?......”
“하나 있어요. 이제 두 살......”
“그럼 아기는 누가 보나?”
“집에 도우미가 한 명 있어요. 같이 살고 있으니까 아기는 늘 도우미가 보고 있죠. 월급이라야 며칠만 열심히 일 해도 마련해 줄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느덧 차는 지영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뒤의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머! 마스터님, 아직 식사 못하셨나 봐요?”
“으응, 뭐 간단하게라도 한 그릇 해야 되겠어. 자, 들어가지. 유라는 식사했으면 음료수라도 한 잔 하고......”
“네......”
마침 이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지수와 금주, 그리고 그 남편은 들어서는 기찬 뒤에 미모의 아가씨가 따라 들어서자 모두들 눈이 동그래진다. 하지만 이미 그의 사업이 다양하고 그 발 넓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식당의 주인인 듯 보이는 여자가 친한 척 기찬에게 다가서는 것이 더 의아했을 것이었다.
“후훗, 저기 저 쪽에 있는 손님들 대화를 들어 보니 자기 손님인 것 같던데......”
“아! 네, 맞아요. 나는 뭐 간단하게 요기할 것 좀 주고, 우리 아가씨는 주스를 한 잔 보내줘요.”
“네, 알았어요. 가 계세요. 그리고 저녁에 꼭 집에 오는 것 잊으면 안돼요.”
“으응, 알았어.”
돌아서 테이블을 향하는 기찬에게 팔짱을 걸어오며 유라가 눈을 빛낸다.
“어머! 사모님이세요?”
“으응? 아, 아니야. 하하...... 그럴지도 모른다면서 이렇게 보란 듯이 나한테 팔짱을 걸어오는 건 한 번 해 보자는 선전포고인 셈인가?”
“어, 어머! 아,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유라는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파악했는지 얼른 팔을 빼 내고 있었다.
“하하하, 뭐 그렇다고 또 팔을 빼 낼 건 뭐야? 하하하......”
지수의 입장을 고려하자니 편의상 유라는 소공동 사무실의 직원이라고 둘러 댄 뒤에 모두가 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의례 오고 가는 개점에 대한 공치사가 지난 후, 본격적인 이야기는 기찬의 짐작과 달리 방배동 건이 아니라, 전세사기를 치고 간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미 서교동 호텔에서 금주의 남편에게 이야기를 전한 바가 있었으니 그 실마리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 그러니까 그 사람도 미국 측에 지인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네, 마침 그 인간관계가 얽혀서 서로 좋게, 좋게 해결했으면 하는 분위기던데, 강 사장님께서 한 걸음만 양보하셔서 처벌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해 주시면, 민사 사건은 그렇게 유야무야 해 버리고, 형사 사건은 자기들이 알아서 무마시키겠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그러면 그렇게 하지요. 그 사람 콩밥 먹여서 내게 득 되는 것도 없는 일이고, 이 쪽 일은 제가 설득해서 소를 취하하라고 할 테니까, 돈만 제대로 반환되도록 힘 써 주시면 되겠습니다. 사실 그 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사기를 당했다는 건 자존심 문제 아니겠습니까?”
“하하, 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여간 그 건은 그렇게 수 일 내로 마무리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이제 유라와의 숙제를 풀어가야 할 일이었으니, 아직도 데면데면하기만 한 지수와 금주를 뒤로 하고 바쁜 일이 있는 척, 금주의 남편을 따로 불러내 작별인사를 한다.
“자, 위원장님.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텐데, 요즘도 자금이 많이 힘드시죠?”
“허허, 뭐, 아직은...... 당비가 나오는 것도 있으니까......”
“이번에 미국에서 송금을 해 오면 그건 위원장님이 쓰도록 하십시오. 아파트 한 채 값이니 방배동 사업을 시작하기까지는 위원장님도 당분간 부족함이 없어야겠지요.”
“아! 그렇게 많은 돈을......”
“우리는 동업자 아닙니까? 그 대신 제가 사업을 벌여 둔 것이 많으니까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위원장님을 자주 뵙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업에 관해서 틈틈이 금주 누님에게 이런 저런 일을 부탁 드려도 괜찮을지...... 하하, 그게 누님 인건비라고 생각하셔도 좋고......”
“아! 하하하, 물론입니다. 강 사장님께서 얼마든지 필요하면 불러내십시오. 그래도 저 사람이 아버님 회원 관리를 자주 해 봐서 일머리는 보기보다 제법입니다.”
“네, 하하하, 물론이지요. 장차 위원장님도 국회의원 출마를 하셔야 할 테니까 우리가 그 단초를 한 번 잡아나가 봅시다.”
“강 사장님,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한 번 밀어 주십시오. 그 은혜는 내가 잊지 않을 테니......”
금전과 달콤한 언어유희로 금주의 남편을 휘두르는 것은 기찬에게 있어 식은 죽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미 정도를 벗어나 신기루를 쫓는 것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탄과도 같은 것이니 그 끝을 두고 볼 일이었다.
“어, 어머! 마스터님. 하시는 사업이 많으신 모양이에요. 만나시는 분들도 모두 기품이 느껴지는 미인들뿐이시고......”
“하하, 미모로 봐도, 젊기로 봐도 유라에게는 모두 안 되겠던데......”
“어머! 아, 아니에요. 호호호...... 저, 정말 마스터님께 반했어요. 저, 버리시면 안 돼요?”
“하하하, 그거야 유라가 하기 나름이지. 정말 내 여자가 될 것인지......”
“아유, 물론이죠. 저는 이제부터 마스터 님 거라니까요? 여진이보다 더 잘 하도록 노력할게요.”
“그래, 기대할 테니까 열심히 해 봐. 일은 오늘부터 당장 할 수 있는 건가?”
“아직 마담 언니에게 인사도 드리지 않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제 지명 손님을 데리고 오는 것도 아니라서 다른 아가씨들 눈치도 보이고......”
“음, 그건 내가 마담에게 말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가씨들에게는 케이크나 아이스크림이라도 돌리면 되지 않겠어?”
차는 어느덧 삼각지를 향해 가는 듯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그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게 됐지만, 횡단보도에 여러 사람이 잔뜩 모여서 가던데 오늘 만난 사람들은 누구였어?”
“네?...... 아! 네......”
기찬은 현재 보라와의 관계로 소라에게 덜미를 잡힌 상태에 있으니, 형수 보라가 뭔가 소라와 상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과는 별개로 소라의 근황을 알 수 있는 정보를 갖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뭐, 별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 유라는 내 여자라고 했으니 내게 뭐든지 숨김이 있어서도 곤란하겠지? 여진이와 내 관계를 봐서 알겠지만, 나는 내 휘하의 아가씨들을 그냥 돈벌이로만 생각하지는 않는 사람이야.”
“아! 네...... 마, 말씀 드릴게요. 사실 제가 아는 언니가 한 분 있는데, 전에 신세를 졌던 일도 있고 해서 그냥 도와 드린 거예요. 누가 선을 보는데 가족인 척하고 얼굴 좀 내밀어 달라고 해서......”
“으응? 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가족인 척 해 달라고 했다니 그것은 어차피 결혼을 하게 되면 거짓이라는 게 들통 날 일인데, 더군다나 가족이 없다는 것이 남자에게 결격사유일 수도 없는 것, 무엇 때문에 가짜 가족을 만들어 상견례를 한다는 말인가. 알 수 없는 유라의 말에 한주의 궁금증이 그 도를 더해 간다.
“허허 참, 그건 왜지? 그 사람이 식구들이 없다는 게 흉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 그 언니가 곤란한 입장에 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진 게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걸 제대로 갚아나가지 못하다 보니까 할 수 없이......”
“할 수 없이...... 뭐?...... 요즘 벌어먹고 사는 방법들이 다양하니 중매쟁이로 나섰다는 건가? 그게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말하기가 뭐 그리 어려워?...... 아! 아니지?...... 그러면 왜 굳이 가짜 가족을 만들어서 나갔을까?”
“사, 사실 그거 사기결혼이거든요.”
“사기 결혼?......”
기찬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아직 알아내야 할 것이 더 있으니 본능처럼 안색을 유지하는 기찬이었다. 소라가 아무리 얄미운 짓을 한다고 해도 기찬 자신에게는 가족이었다. 소라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보라 역시 편치는 않을 일, 그녀를 위해 무언가 해 줄 일이 생겼다는 마음 한 구석으로 종전에 형수를 겁탈하려던 가구공장 박 사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하하...... 정말 벌어먹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군. 그래...... 그래, 재미있는데 계속 해 봐. 사기를 친다면 어떻게 사기를 친다는 거지?”
차는 어느덧 삼각지 여관의 천막을 쓸어가며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는 기찬을 종종걸음으로 따라 들어서는 유라에게서 계속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뭐, 방법은 많다고 하던데요. 일단 정상적으로 총각을 앞세워 결혼했다가 다른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도록 하고, 몇 차례 지난 뒤 간통으로 몰아서 위자료 뜯어내고 이혼을 시키는 방법도 있다고 하고...... 오늘 만난 사람은 여자였지만, 결혼 상대가 남자일 경우에는 더 쉽지요. 그 남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여자는 차고 넘치니까......”
“......”
“뭐, 학력이나 재산 정도 따위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거니까 중매쟁이도 별로 어려울 게 없는 일이지요. 다만, 그 대상들을 물색해서 찾아내는 게 수고롭다면 수고랄 수 있는 일이지요.”
“음, 그러면 오늘 만났던 사람들은 어땠어? 이야기가 잘 될 것 같아? 하하하...... 잘 하면 유라도 콩고물 좀 만질 수 있겠네?”
“어머! 아니에요. 저는 순전히 그 언니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나갔던 거고, 제가 뭘 요구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 조만간에 다시 만나 날짜를 잡자고 그러는 것 보니까 잘 되어 가는 모양이에요. 아까 그 자리에서 서로 예물 교환하는 문제까지 거론하더라고요. 호호, 곧 울고불고 할 것도 모르고 서로 검소하게 하자고 그러는 게 좀 안돼 보이기도 했어요.”
보기보다 상황은 발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혼식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남아있는 일이었고, 이미 자신이 알게 되었으니 사연이 무르익어가기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후훗, 요즘 내가 일진이 좋은 편인가? 연경이는 집을 한 채 몰아오고, 유라는 또 기가 막힌 정보를 전해 주는군. 그래......”
“네? 마스터님...... 뭐라고 하셨어요?”
“으응? 아, 아니야. 그저 혼자 한 소리야.”
이미 정장 치마의 지퍼를 풀어 내리는 유라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희디 흰 셔츠 밑으로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이 자리하고, 그것마저도 이내 바닥으로 흘러내려 그 유실은 기찬의 앞에 첫 선을 보이고 있었다.
정숙해야 할 남의 부인이라는 점이 기찬을 새로운 감각의 경지로 몰고 갈 모양이었다. 이미 남의 부인이라는 것에 매료될 단계는 지나버린 기찬이었지만, 순전히 제 발로 걸어와 품에 안기며 몸을 의탁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여자가 샤워를 하며 쏟아지는 물줄기를 정수리 머리카락부터 받아 적시는 것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겠다는 의미라던가...... 필시 미장원을 다시 가든지, 오랜 시간이 걸려야 건조를 시킬 수 있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파트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흐윽......”
느껴지는 기찬의 손길이 차가웠을까, 물줄기를 맞던 유라는 다급한 숨결을 들이킨다.
“후훗, 유라는 참 예쁜 가슴을 갖고 있군. 하하, 누가 유라를 아기엄마라고 하겠어?”
“아이, 이젠 침대로 가요. 우리......”
“그래, 그럴까?”
언젠가 여진과의 첫 정사에서도 그랬을 것이었다. 처지가 그렇다는 것에 공연히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줄 수는 없었다. 객관적으로야 자기 몸뚱이를 함부로 굴리는 계집애들 무에 보호해 줄 것이 있겠는가마는 여진의 경우처럼 아련한 추억은 없더라도 향후 기찬의 금고를 살찌울 계집애니 소중히 다룰 필요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악...... 간지러워......”
혀를 동원해 찾아든 그곳은 선명한 분홍빛으로 기찬을 향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부드러운 꽃잎을 헤쳐 감로수를 들이키고, 그 향에 취한 듯 안주라도 씹을 요량으로 돌기를 물어간다.
“으윽...... 아파......”
팽팽한 다리는 마치 대리석처럼 고운 빛깔로 빠르게 종아리로 쏟아지며 그곳을 가리려 애써 보지만, 진작 기찬에 의해 구부러져 방초 고운 신비지를 온통 그 앞에 드러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배를 타고 오르는 기찬의 혀 놀림에 유라는 이미 오감을 열고 그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듯 그윽한 시선을 들어 자신의 새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 보...... 어서요......”
“그래......”
이 순간, 소라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 잔뜩 불거져 터질 것 같은 혈관을 좁디좁은 동굴 안으로 밀어 넣으며 식혀야 할 일이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쥐어오고 자신의 샅을 찾아 안내해 가는 이 손길은 유라의 것이었고, 유라가 전해주는 서늘함만큼 몰입에 부족함이 없음에도 알 수 없이 소라가 떠오르고 있었으니 그것은 소라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하악......”
뻐근한 동통을 느끼며 유라의 눈은 흰자위를 드러낸다. 그 봉긋한 가슴의 유실을 물어가며 허리를 움직이는 기찬은 한 번도 이성으로 생각지 않았던 소라의 모습이 머릿속을 차지하자 내심 당혹하고 있었다.
“뭐, 뭐야? 설마 내가 형수 말대로 소라를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디에 선 보여도 부족함이 없을 여자를 안아가며 이 순간, 기찬은 또 다시 다른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할 수 없는 기찬의 지병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