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Chapter 57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
권능을 이용하여 공간을 왜곡한 사도들.
그 왜곡된 공간 속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여섯 사도는 일사도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죽음을 먹는 군대가 전멸했으며, 그들을 제물로 하여 탄생시킨 본 드래곤 크릭챠마저 소멸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칠사도가 일어난 일을 명시했고.
「…믿을 수 없군.」
「저것이 정녕 선택받지 못한 자의 힘이란 말인가?」
나머지 사도들 또한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죽음의 군대를 제물로 한 크릭챠의 전력이 어느 정도로 상정되어 있었지?」
「성룡(成龍)과 겨뤄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으니 에인션트 드래곤과 비슷하다고 평을 내린 적이 있었다.」
일사도의 물음에 칠사도가 답했다.
「…….」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비록 정확하진 않으나 에인션트 드래곤 정도의 전력이라고 하면, 능히 국가 하나를 쓸어버릴 정도가 아닌가.
그런데 그 대단한 권능을 지닌 본 드래곤 크릭챠가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소멸한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그는 강하다.」
일곱 사도 중 가장 먼저 현실을 파악한 칠사도가 말을 이어 갔다.
「선택을 받지 못한 녀석 따위가?」
삼사도가 말했다.
사도가 아닌 모든 이들에 대한 무시가 저변에 깔린, 지극히 사도다운 말.
「물론 사도는 모든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비하여 우월하다. 하지만 그의 강함은 진짜다. 어쩌면 그는 그분이 말했던 ‘법칙을 비튼 자’일 수도 있다.」
「법칙을 비튼 자라…….」
「생각지 못했지만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
세계를 구성하는 법칙을 비틀어 탄생한 괴물들.
그들이라면 사도라는 영광을 누리지 않고도 능히 사도보다 더욱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저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려면 고위험군인 ‘회귀자’일 수도 있겠군.」
「내 생각도 같다, 일사도여.」
그중에서도 특히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회귀자일 가능성을 점쳤다.
「으음,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회귀자라고 한다면 수많은 세월을 돌아와 절대적인 힘을 손에 넣은 이. 그를 감당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택받지 못한 이라며 무시하던 삼사도가 침음하며 말했다.
「물론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일곱 사도 모두 조금 당황한 모습만 보일 뿐,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일사도여, 아무래도 ‘그것’을 꺼낼 때가 된 것 같다.」
「흐음…….」
칠사도의 제안에 일사도는 턱을 매만지며 고심에 빠졌다.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회귀자가 나왔다면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그것이 유일하다.
스윽- 그리 말한 일사도는 품속에서 불길한 오라를 내뿜는 보옥(寶玉) 하나를 꺼냈다.
「대륙의 파괴를 위한 그분의 병기를 지금 여기서 사용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순간.
쩌저적!
마치 거울처럼 반짝이던 보옥의 표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
“화, 확인했습니다.”
손을 흔드는 내 행동에 트리탄은 갑자기 존대하기 시작했다.
뭐, 괴물 같은 힘을 확인했으니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제대로 한몫 벌었겠지?’
나름 강력하다는 뼈다귀 용가리를 쓰러뜨렸으니 꽤 많은 금화를 만질 수 있으리라.
「그런데 걱정이로군요, 마신왕 폐하.」
왼쪽 어깨에 있던, 잠에서 깨어난 1,315호가 의지를 전했다.
“뭐가?”
「과연 이 영지가 본 드래곤 처치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줄 수 있을지 염려가 되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수의 왕이시여. 본 드래곤이 만수의 왕께는 하찮은 존재이나 저 인간들 무리로 보자면 아주 강력한 존재. 이 작은 영지의 사정으로 그 정당한 보수를 챙겨 주는 게 힘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녀석들이 우려되는 바를 말했다.
“물론 알고 있어.”
나도 바보가 아닌데 그걸 모를까.
“정당한 보수는 받기 힘들어도 최대한 많이 받아야지.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실력의 일부를 드러냈으니 랭크도 빨리 승급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용가리 뼈다귀도 처리했으니 이제 저 녀석들을 정리할 차롄가.’
나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공간.
물론 남들에게는 그리 보일 테지만, 지금 내게는 공간을 왜곡하여 그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보수야 벌 만큼 벌었으니 이제 녀석들을 처리…….
콰콰쾅!
…하지는 못할 것 같다.
강렬한 폭발과 함께 존재감을 드러내는 녀석이 있었다.
「크흐흐, 드디어 빌어먹을 봉인에서 풀려났다!」
쿠르릉!
상당히 강력한 의지를 실은 외침이 천둥처럼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것 봐라?’
그 의지에 실린 힘을 느끼며 흥미롭게 전방을 응시했다.
뼈다귀 용가리가 마지막 패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강력한 패를 숨겨 둔 모양이다.
쿵, 쿵!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대지가 요동친다.
폭발의 여파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4개의 뿔과 박쥐 날개, 그리고 염소의 얼굴과 사자의 몸이 뒤섞인 괴물이었다.
「바포메트?」
가장 먼저 반응한 건 1,315호였다.
“누군지 알아?”
「어찌 모르겠습니까. 과거 질서를 원하는 72마신들께 반기를 들었던 반란의 일족 중 하나입니다. 질서의 전쟁에서 패하며 자취를 감추었다고 들었는데, 설마 중간계에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아!”
질서의 전쟁이라는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오직 무질서만이 존재하던 과거의 마계. 힘의 논리만으로 움직이는 마계에 질서를 잡은 게 초대 72마신이었다.
그들은 계층을 나누고, 그곳의 관리자를 자처하면서 각자가 원하는 방향의 세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에 반기를 든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반란의 일족이라 불리는 태초의 귀족들이었다.
마계가 생성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막강한 힘과 권력을 휘두르던 그들은 신진 세력인 72마신과 충돌하였고, 질서의 전쟁을 일으켰다.
물론 승리는 72마신 쪽이었다.
태초의 귀족에 비하면 근본도 없는, 어떻게 보면 신진 세력들의 놀라운 활약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당연한 말이지만, 이 전쟁에서 패한 태초의 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물론 후환을 없애기 위해 뿔뿔이 흩어진 그들을 척결하기도 하였으나 칠계 곳곳에 몸을 숨긴 그들을 모조리 찾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
그리고 지금 그 반란의 일족 중 하나, 태초의 귀족 중 하나인 바포메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흐으, 강렬한 생명이 요동치는군. 그럼 맛있게 먹어 볼까?」
염소 괴물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슈우우욱!
놀라운 흡입력이 발생하여 생명의 영혼을 끌어오기 시작했다.
“으읍!”
“으아악!”
흡입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마치 독이라도 먹은 것처럼 픽픽 쓰러졌다.
그리고.
웅웅!
그들의 육신에서 하얀 구체와 같은 게 떠올랐다.
‘영혼을 흡수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나 보네.’
아마 이대로 방치한다면 흡입력에 의해 끌려간 영혼을 염소 대가리가 섭취할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발을 디딘 순간.
콰앙!
곧장 염소 대가리를 지척에 둘 수 있었다.
「꺼져라!」
그 움직임에 전혀 개의치 않은 녀석이 해골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콰콰콰!
지팡이에 실린 힘이 보통이 아니다.
“꺼질 건 내가 아니라 너지.”
콰앙!
주먹과 지팡이가 충돌했고.
「큭!」
거력을 감당하지 못한 염소 대가리 녀석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무슨 힘이……?!」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 동그란 눈이 찢어질 듯 확장된다.
“놀라긴 아직 이를 텐데.”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그것은 모든 것을 꿰뚫고, 또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필살의 창이라.」
츠츠츠츠츠!
필중, 그리고 필상의 창 궁니르를 생성했다.
「이, 이런!」
보통의 인간과는 달리 궁니르에 깃든 절대의 의지를 깨달은 녀석이 권능을 발휘했다.
부우웅!
모든 권능을 다 때려 박은 보호막이 녀석의 주위를 감쌌다.
“응. 그래도 못 막아!”
궁니르는 반드시 관통하고 마는 필중의 창.
그 의지를 거스를 수 있는 건 신격을 얻은 존재뿐이다.
팟!
나의 손에서 뻗어 나간 적빛 궤적이 그대로 염소 괴물의 대가리를 관통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등장은 화려했으나 퇴장은 쓸쓸하다.
파스스- 필중의 창에 깃든 힘을 견뎌 내지 못한 녀석은 그대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고대의 악마가 이리 허무하게 소멸하다니…….」
일련의 광경을 똑똑히 확인한 1,315호가 경악한다.
「만수의 왕이시다. 고작 고대의 악마 따위가 상대가 될 것 같으냐.」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으스대는 그라시아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스팟!
염소 대가리를 관통한 궁니르는 힘을 잃지 않은 채 그대로 쭉쭉 나아갔고.
콰챠챵!
왜곡된 공간을 그대로 꿰뚫었다.
「헙!」
「어, 어떻게?!」
그리고 은밀히 숨어 있었던 관음증 변태들이 나타났다.
“왜곡된 공간에 몸을 숨기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보지?”
경악하는 그들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분명 느릿하게 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간을 축약하여 그대로 뛰어넘는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
꽈악!
「커컥!」
눈앞에 보이는 녀석의 멱살을 움켜쥔 채 그대로 들어 올렸다.
「꿇어라!」
그리고 의지를 실어 외쳤다.
털썩, 털썩!
「크, 크윽…….」
절대의 의지에 저항하지 못한 녀석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녀석들을 한 차례 살폈다.
단지 바라본 게 아니라 그들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며 괴이한 기운의 정체를 파악하였다.
오호라.
설마 여기서 이 기운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런 걸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던가?
나는 씨익 웃었다.
“사도로군.”
「!」
그 한마디에 그들의 감정이 격하게 요동친다.
“이 피에 절은 기운이라면 살육의 신인가?”
「대체 네 녀석의 정체가 무엇이냐. 어떻게 위대하신 분의 신명을…….」
사도라는 것을 눈치챈 것으로도 모자라 녀석들이 모시는 이의 신명까지 맞추니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지.
“궁금해할 필요 없어. 내가 네 녀석들이 모시고 있는 신격과 조금 사이가 안 좋아서 말이야.”
그리 말하며 손에 멱살을 잡은 녀석의 품속을 뒤졌다.
「커윽…….」
녀석은 발악하려고 했으나 그게 가능할 턱이 없다.
이미 내 의지의 영역에 있는 녀석은 발버둥도 치지 못한 채 내 손길을 허용해야만 했다.
웅웅웅!
녀석의 품속에서 꺼낸 건 구불구불한 검신의 단검.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과거에는 힘이 부족하여 놓칠 수밖에 없었던 존재.
슥, 스슥!
나는 그 단검을 어지러이 휘둘렀고.
「컥!」
「끄윽!」
단검에 육신이 찔린 녀석들은 모두 덧없이 목숨을 잃었다.
웅웅웅웅!
사도들의 목숨을 취한 단검은 더욱더 강렬한 검명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굳이 단검을 사용하여 일곱 사도의 목숨을 모두 취했다는 것.
그것은 신격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 어서 그 더러운 모습을 보여라, 살육의 신.”
쿠아아앙!
마치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단검에서 형용할 수 없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