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00화 (400/425)
  • 만화왕 (5)

    “후우. 싸늘하네.”

    모두 퇴근하고 난 저녁시간.

    화실의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추석이 지난 덕분인지 이젠 낮과 밤의 기온차가 제법 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입고 나올걸.

    그런데 다시 들어가는 건 귀찮고.

    그래도 차가운 공기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나쁘지는 않다.

    따뜻한 실내에서만 있다 보니, 뭔가 집중이 잘 안 되는 기분이라 나온 건데.

    실은 최근 들어 갑자기 잡념이 많아져서 그런가, 스토리가 잘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아서 이렇게 저녁이면 혼자 생각이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지금 흐름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늘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좀 더 이야기를 재미있게 진행시키고 싶은데, 이런 생각이 부담되는 것인지 스토리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 더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문제인걸까.

    지금 진행 중인 신들과의 전쟁 파트는 솔직히 쉽지가 않다.

    물론 머릿속에선 뭔가 희미하게 그려지기는 하지만, 역시 그것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게 어렵다.

    선희에게 부탁한 각양각색 스타일의 신 캐릭터 그림을 테이블에 깔았다.

    턱을 괴며 그것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런. 어두워서 잘 안보이네.”

    마당으로 비추는 등만으로는 그림이 잘 보일 리 없지.

    그냥 2층 테라스로 올라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거실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커피 줘?”

    창문 사이로 머리를 빼꼼 내민 경희가 웃으며 물었다.

    “그럼 땡큐지.”

    머리를 끄덕이던 경희가 움찔 놀랐다.

    “어? 공기가 차갑네. 오빠는 안 추워?”

    “조금.”

    실은 꽤 많이 춥다.

    “잠깐만.”

    그렇게 말한 경희가 잠시 후 모포 한 장을 들고 밖으로 나오더니 그것을 내게 건네줬다.

    “자, 이거.”

    “고마워.”

    마침 잘 됐다싶어서 받자마자 어깨를 모포로 감쌌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으이그, 조금이 아니네. 그렇게 추웠으면 가져다 달라고 말하지. 아무튼.”

    경희의 잔소리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아우, 추워. 난 들어가야겠다.”

    경희는 팔짱을 끼며 호들갑을 떨더니 다시 후다닥 화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두꺼운 옷으로 무장한 뒤 커피를 들고 나온다.

    머리엔 방울이 달린 털모자를 쓰고.

    누가 보면 한파라도 몰아친 줄 알겠다.

    경희가 커피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자, 삼삼삼 커피.”

    “땡큐.”

    “뭘요.”

    히죽 웃으며 대답한 경희가 멈칫하더니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그림이 보여?”

    “아니.”

    “손전등이라도 가져다줄까?”

    “괜찮아. 별로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알았어. 적당히 고민하고 들어와. 감기 걸리겠다.”

    “그래.”

    머리를 끄덕거렸더니 경희가 곧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백설기가 머리를 불쑥 내밀더니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어머,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던 경희가 백설기를 보며 펄쩍 뛰었다.

    “놀랐잖니!”

    경희가 잔소리를 했지만, 백설기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평소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문 사이를 빠져나온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경희가 어이없어하더니 곧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들어갔다.

    평소에도 이 녀석은 늘 들락날락거렸으니, 뭐 특별한 일은 아니니까.

    아무튼 밖으로 나온 백설기가 어쩐 일인지 평소와 달리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보통 때라면 그냥 날 무시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을 텐데.

    내게 간식이라도 기대하는 건가?

    그런 녀석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 커피 밖에 없어.”

    하지만 백설기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내가 앉은 자리 맞은편의 의자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로 머리를 내밀더니 날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왜 이러지?

    녀석이 평소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해서일까, 좀 신경이 쓰인다.

    “뭐 바라는 거 있냐?”

    농담처럼 물었는데도 묘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날 계속 쳐다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느낌이라면 내가 이상한 걸까?

    아무튼 녀석의 시선 때문인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예전엔 저런 눈빛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그래도 자주 본 탓인지 이젠 그렇게 거부감이 드는 건 아니지만.

    잠시 동안 그렇게 백설기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웃었다.

    “내가 이겼다. 눈싸움.”

    나도 참.

    고양이에게 뭐라는 건지.

    그런데 시선을 거둔 백설기가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경희의 음성이 들렸다.

    “오빠, 아카기 씨 전화!”

    창문을 열고 소리친 경희를 바라봤다가 다시 테이블 아래로 머리를 숙였다. 이미 백설기는 보이지 않는다.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새 사라진 것이다.

    재빠르기도 하지.

    “오빠, 전화!”

    경희가 확인하듯 부르자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그래. 알았어.”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실 안으로 들어가서는 전화기를 들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늦은 시간에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지로의 음성과 함께 전화기 너머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온다.

    어디 공장인가?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아, 네. 방금 머신건 잭, 9권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아.”

    주변이 왜 그렇게 시끄러운가했더니, 인쇄공장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드디어 책을 찍어내기 시작했나보다.

    갑자기 많은 양을 한꺼번에 찍어야하는 통에 새로운 공장을 찾아야한다더니, 이제야 찾은 건가.

    “인쇄공장을 찾았나보네요.”

    -아뇨. 공장에 새로운 인쇄기를 추가로 들였습니다.

    “추가요?”

    -네. 나카야그룹에서 어제 아침에 보내왔던 모양입니다. 공장에서도 임시천막을 지어 곧장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또 나카야그룹인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쏟아 붓는 게 아닌가 싶기는 한데.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머리를 내저었다.

    성준희의 말처럼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니까.

    -안 그래도 새로운 인쇄기가 필요했는데, 덕분에 공장에서도 반가워하더군요.

    “그럼 다행이지만.”

    -이거 말고도 나카야그룹에서 지원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더군요. 광고를 포함해서.

    “지원 치고는 지나친 감이 있죠.”

    그 말에 지로가 웃었다.

    -그렇긴 하죠.

    아무튼, 전부터 인쇄공장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었다.

    요즘 소년 히어로의 인쇄물들의 발행부수가 부쩍 늘어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연재중인 만화들의 단행본 출판양도 엄청나고.

    전에 일본에 갔을 때 인쇄공장을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찍어낸 책을 쌓아둔 창고를 보고는 경악했었다.

    그냥 가볍게 100만부니, 200만부니 떠들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봤더니 그 양이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거기다 더 충격적인 건, 책을 파쇄 하는 모습이었다.

    재고로 쌓인 책들을 기계로 갈아내는 것도 엄청난 광경이었다.

    어쨌건 단행본 230만부를 찍어내고 파는 건 그만큼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닥터슬럼프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을지, 감도 안 온다.

    그러고 보니 요즘 길거리에 버려진 만화책 중 소년 히어로도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원래도 버려지는 책이 많은 일본이니 그 양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겠다.

    일본에서 재생지 사용을 권장하는 이유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그 책들 중 꽤 많은 양이 한국에 들어와 판매되고 있을 것이지만.

    “아무튼, 늦은 시간인데 수고가 많으시네요. 이제 퇴근하시는 겁니까?”

    -서너 시간은 더 머물러야 합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좀 더 있거든요.

    “저 때문에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인데요. 다른 편집자들도 의례 하는 일이고요.

    “그래도 쉬면서 하세요. 그러다가 몸이 상할 수도 있는데.”

    지금의 일본이나 한국의 직장인들은 너무 회사 일에 혹사당하고 있다.

    실제로 과로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좀 그래서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로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머신건 잭 9권이 출간이 되는 날 아침.

    도쿄의 대형서점엔 평일임에도 아침부터 신간을 사려는 사람이 잔뜩 줄을 서고 있었다.

    최근 TV 광고에서 꽤 자주 등장한 탓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것이다.

    기존 단행본들도 상당히 팔려나가고 머신건 잭 애니의 시청률도 상당히 올랐다.

    서점 앞에 트럭이 도착하고 서점 직원들이 나와 트럭에 실려 있던 책들을 들고 들어갔다.

    대부분 머신건 잭, 단행본이다.

    잠시 후, 직원이 소리쳤다.

    “머신건 잭, 판매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길게 늘어져있던 줄이 빠르게 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서점 주변엔 만화책을 보는 사람들이 흔하게 보였다.

    * * *

    키도의 확실.

    밖으로 나갔던 키도가 들어오자, 어시들의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아침에 사모님께서 밖으로 나가셨다더니. 아침부터 어디 다녀오셨어요?”

    “응. 근처 서점에.”

    “서점이요?”

    “설마 머신건 잭 사러 가셨던 거예요?”

    “맞아.”

    그렇게 말하더니 종이가방을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다 뭐예요?”

    “만화책.”

    “만화책이요? 그게 다?”

    “그래.”

    얼핏 봐도 상당한 양이다.

    “살게 많으셨나보네요.”

    “이거 다 머신건 잭이야.”

    “네?”

    어시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키도가 피식 웃더니, 종이가방에서 머신건 잭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충 50권 정도다.

    “그 많은 걸 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떻게 하긴, 너희들도 한권씩 주고 아는 사람들에게도 나눠줄 거야.”

    “저희들은 이미 샀는데요.”

    “네.”

    그렇게 말하며 모두 책을 들어보였다.

    그 모습을 본 키도가 깜짝 놀랐다.

    “어? 너희들 언제 그걸 샀어?”

    “아까 마츠다가 나가서 사왔는데요.”

    “······쩝, 뭐 그럼 할 수 없지.”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사셨어요? 갑자기.”

    “왜긴 사고 싶었으니까.”

    “전엔 한권씩만 사셨잖아요.”

    “뭐, 그냥.”

    그렇게 말하지만 실은 이번에 머신건 잭의 초판이 230만부라는 사실은 어시들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처음 230만부를 초판으로 발행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키도가 좋아하면서도 걱정을 많이 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화실 문이 열리며 니시다가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키도 선생님.”

    “또 왔나?”

    “또라니, 좀 반갑게 맞아주시면 어디 문제라도 생깁니까?”

    “너무 자주오니까 그렇지.”

    “가끔 올 때도 반가워하지 않으셨잖아요.”

    “그걸 알면 오지 말던가.”

    “······.”

    그런데 들어온 니시다의 양손에 커다란 종이가방이 들려져있었다.

    “어? 그거 설마 머신건 잭이냐?”

    그 말에 니시다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이거 선생님에게도 좀 나눠주려고······, 응?”

    그 순간 니시다의 시선이 소파 테이블 위에 쌓여있는 만화책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놀란 표정으로 키도를 쳐다봤다.

    “저거······ 설마 머신건 잭입니까?”

    “······그래.”

    “선생님은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많이 사셨어요?”

    “아마 너랑 같은 생각이겠지.”

    “······.”

    두 사람은 서로를 잠시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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