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87화 (387/425)
  • 그 시즌? (1)

    뜬금없었던 이즈미의 방문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난 후.

    현재 와르다의 별은······ 핑크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그 덕에 독자들의 팬레터를 많이 받은 정미자는 요즘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얘기도 한다.

    물론 실버야 뭐, 평소와 다르지 않고.

    괴물 같은 작업능력은 곧 데생 쪽에서도 발휘되는지, 정미자의 화실과 이곳을 번갈아 들락거리며 모두 다 잘 해내고 있다.

    이대봉은 그런 실버를 보며.

    “역시 노가다 꾼이야!”

    라고 말하고, 다른 이들도 그런 이대봉의 말에 수긍했다.

    실버 스스로도 그런 사실은 인정하는 분위기고.

    어쨌건 정미자와 실버의 첫 협업 작품이 잘 풀렸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솔직히 최근 정미자 쪽 화실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해서 걱정이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도 공짜로 스토리작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정미자와 실버도 바라지 않는 것이라.

    그럼에도 꽤나 반응이 좋아서, 원고료가 오른다는 얘기가 있었고, 기존의 단행본들이 와르다의 별 효과로 인해 추가발행이 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아무튼, 덕분에 조만간 정미자는 작업에서도 거의 손을 뗄 테지만, 문제는 없어 보인다.

    머신건 잭의 경우는, 새로운 존재들의 등장이후 계속 인기가 상승중이다.

    솔직히 요즘 머신건의 설정은 대부분 내가 살던 시절에 몰입하던 게임들이 바탕이 된 것이다.

    덕분에 이 시대엔 꽤나 새롭다는 느낌은 강하겠지.

    아무튼, 늘 느끼는 거지만 일본에서의 인기와는 달리 여기 한국에서는 참 조용하고 평화롭다는 느낌이다.

    물론 곧 있을 올림픽 때문에 나라전체가 시끌벅적 이라서 내 만화가 만약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어도 별로 주목을 못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모처럼 일하는 시간임에도 나는 스토리를 구상한다는 핑계로 거리로 나왔다.

    선희가 학교에서 돌아왔다면 쫄래쫄래 날 따라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혼자다.

    가끔은 이렇게 혼자가 되는 것도 기분이 전환되고 생각할 것도 많아서 좋긴 한데.

    역시 길을 걷다보면 금방 지루해진다.

    그러다가 허름한 2층의 만화방 간판이 눈에 띄었다.

    “팔억만화라······. 책이 8억 권 일리는 없고.”

    호기심에 만화방을 올라갔다.

    올라가는 계단측면 벽에는 대본소만화 포스터가 더덕더덕 붙어있다.

    그나마 만화방주인이 관리는 잘 하는지, 대부분 깔끔하긴 하지만, 오르막 계단은 어두컴컴해서 찜찜한 기분이 들게는 한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럭저럭 널찍한데다가 하늘색의 개인 소파, 그리고 분위기도 아늑하니 좋다.

    처음 이 시대에 왔을 땐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쩐지 이런 분위기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기분이기는 한데.

    나도 슬슬 구닥다리가 되어가는 걸까.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담배냄새가 확 밀려들었다.

    “어서 오세요.”

    주인아줌마가 머리를 돌리지도 않고, 습관적인 느낌으로 인사를 했다.

    아니, 아줌마라고 생각했는데 부스스한 머리에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젊은 여자다.

    20대 중반쯤의 느낌이랄까.

    만화책을 보느라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기척은 본능적으로 잘 느끼는 모양이다.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엔 좀 젊어 보이는 걸 보면, 알바거나 아니면 부모님 일을 돕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모습이 뿌연 담배연기가 가득 찬 만화방과는 묘하게 어울리는 느낌.

    뭐야?

    관계도 없는 여자에 대해 쓸데없는 망상에 빠지다니.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느 샌가 담배연기가 익숙해져있다.

    화실에서야 담배냄새를 맡을 일은 없지만, 밖으로 나가면 대부분의 실내장소에선 담배연기가 가득하다.

    길거리야 뭐 말할 필요도 없이 담배피우는 사람들은 수두룩하고.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오랜만에 나도 덕후로서 만화책을 보는 즐거움에 빠져볼까?

    신간을 모아둔 곳부터 책을 살폈는데, 뭔가 미묘하다.

    뭐가 그런가하면, 익숙한 만화가들임에도 익숙하지 않은 제목의 만화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이 시절 만화가를 몽땅 다 본건 아니어도, 이름이 알려진 만화가들이 출시한 제목들은 어느 정도 꿰고 있다. 그럼에도 생소한 제목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한권씩 꺼내 봤더니, 내용이 익숙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역시 내가 이 시대로 넘어오면서 이래저래 한국만화계에도 영향을 많이 끼친 모양이다.

    “저기, 그렇게 오래 보시면 곤란한데요.”

    뿔테여자가 여전히 머리를 돌리지도 않고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아, 이런.

    여긴 서점이 아니지.

    스윽 훑어봐도 한권 정도는 금방 보게 되니까.

    그런 얌체족이야 많이 접해본 모양이다.

    “아,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만화제목을 이리저리 살피다, 묘하게 익숙한 느낌의 만화를 발견했다.

    제목이 ‘진정한 남자’라고 적혀있다.

    진심의 남자가 떠오르는 제목.

    그런데 표지그림도 익숙하다.

    키도의 그림체와 상당히 닮아있다.

    해적만화인가?

    일단 열권을 뽑아 돈을 지불하고 나서 적당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적이고 나발이고, 오랜만에 진심의 남자를 처음부터 보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해석의 수준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고.

    의외로 이 시절에 나온 해적판 만화들의 번역수준이 나중에 나온 정식판보다 훨씬 수준 높은 게 많기도 했으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책을 펼치려는데, 뿔테여자가 야쿠르트 한 병을 내 앞에 놓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만화방에서 아이스크림을 주는 곳도 있었고, 쿨XX라는 음료수를 주는 곳도 있었는데.

    아무튼 나는 야쿠르트를 쪽쪽 거리며 책을 펼쳤다.

    읽어나가자마자 해적판만화는 아니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저, 키도의 그림체를 흉내 내고 제목도 비슷하게 만든 만화라는 것을.

    하지만, 문제는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트레이싱 장면이었다.

    스토리는 분명 키도의 만화와는 다르지만, 기본 컨셉이나 진행, 그리고 주인공의 성격과 캐릭터는 거의 같다고 봐도 될 만한 만화였다.

    참 묘한 것이, 이런 건 그냥 표절만화라고 밖에 할 수 없는데도 이렇게 버젓이 대본소에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하기야, 표절 부분은 내가 살던 시절에도 자주 터지던 문제긴 하지만.

    어쨌건 익숙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통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아서 몇 권 읽다말고 만화책을 덮어버렸다.

    내가 봐도 꽤 불편했는데 키도가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 양반 성격에 ‘역시 한국은 만화 후진국’ 이라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닐 테지.

    어쩌면 ‘역시 써니 같은 천재가 한국에서 나온 건 기적이라는 건가.’라며 낄낄거렸을지도.

    아무튼, 찝찝함을 간직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오랜만에 덕후로서의 기분을 내며 만화나 보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괜한 것을 본 탓에 더 이상 만화를 볼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저기요.”

    뿔테여자가 날 불렀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대답했다.

    “네?”

    “책, 안보시고 그냥 가시는 건가요? 재미가 없어요?”

    “아, 뭐. 그냥요.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역시, 그 만화 이상하죠?”

    “네?”

    설마 키도 만화를 적당히 뒤섞어 만든 표절작이라는 걸 아는 건가?

    “이상하잖아요. 내용이. 내용이 두서없고. 그림은 그럭저럭 잘 그리긴 했는데.”

    “아.”

    표절작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이상하다는 뜻이었구나.

    하긴, 그냥 만화장면을 트레이싱해서 이리저리 뒤섞어 놨으니 내용이 이상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니까.

    내가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는 머리를 끄덕이자, 뿔테여자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그 만화를 고르실 때부터 좀 걱정했어요. 제가 하나 추천해 드릴까요?”

    추천?

    곧 내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됐어요. 그냥······.”

    “돈은 안 받을게요.”

    “······.”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뿔테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만화책이 모여 있는 곳을 이리저리 뒤적거린다. 그리고는 책 한권을 뽑아들더니, 내게 불쑥 내밀었다.

    “혹시 이거 보셨나요?”

    일반 대본소용 만화가 아닌, 연재잡지에서 발행하는 코믹스 만화다.

    대본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만화긴 하지만······, 그보다.

    익숙한 만화라 깜짝 놀랐다.

    바로 강용철이 소년경양에 연재했던 데뷔작 ‘오리온의 표범’이었다.

    이거 박상식과 내가 스토리를 썼던 초기작품이다.

    책은 좀 팔렸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렇고 묘하게 추억 돋네.

    그런데 뿔테여자가 그런 내 표정을 살피더니 곧장 물었다.

    “어? 아시는 작품이에요?”

    “아, 네. 조금요.”

    실은 많이 알지.

    만화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사라진 수많은 이야기까지.

    여자가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물었다.

    “이거 괜찮죠?”

    “아, 뭐. 괜찮기는 하죠.”

    내입으로 말하기엔 좀 쑥스럽긴 하네.

    “역시, 작품을 알아보시네요.”

    그렇게 말하다가 만화책을 보는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자 뿔테여자가 다시 작게 말했다.

    “몇 권 나오지 않고 끝난 게 아쉽다니까요. 이런 건 좀 많이 나와 줬으면 좋았을걸.”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처음엔 좀 냉랭해 보이더니, 의외로 살갑게 구는 스타일이구나.

    하긴, 이런 곳에서 거친 남자들만 상대했을 테니.

    “그러게요.”

    초기 작품이고, 제법 인기가 있기 했다고 들었지만 아직 이걸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SF임에도 말이다.

    그런데 뿔테여자가 뭔가 떠올랐는지 이번에도 책꽂이에서 뭔가를 찾더니 다시 코믹스로 보이는 책 두 권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다시 그걸 내밀었다.

    “오리온의 표범 그린 만화가가 그린 다음 작품인데, 혹시 이건 보셨나요?”

    “네.”

    당연히 봤다.

    하나는 보물성에 연재중인 ‘스페이스 제너럴’이고 다른 건 어깨동문에 연재중인 신작 ‘블랙스타’이다.

    특히 블랙스타의 경우엔 강용철의 오리지널 스토린데, 꽤 반응도 좋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그나저나 이 여자 강용철의 팬인가?

    강용철이 이 얘기를 들으면 엄청 기뻐할 텐데.

    그 형이 올해 나이가 벌써 38살이던가?

    내가 살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 시대는 상당한 노총각이다.

    요즘 돈도 예전에 비해 잘 번다면서 연애나 좀 할 것이지.

    갑자기 생각하니까 강용철이 걱정되긴 하네.

    내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선지 뿔테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이건 재미가 없었나요?”

    흠칫 놀란 내가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아니요, 재미있어요.”

    “그런데······.”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아.”

    뿔테여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묘하게 만족한 표정이 된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럼 다른 만화도 괜찮은데, 골라보실래요?”

    “다른 건 추천 안 해주나요?”

    “다른 것도 괜찮은 건 많아요. 적당히 골라보세요.”

    뭐야, 강용철이 그린 만화 말고는 듣보잡 취급인가?

    내가 웃으며 물었다.

    “강용철 만화가만 추천하신건가요?”

    내 말에 여자가 깜짝 놀랐다.

    “어? 강철 만화가의 본명도 아세요?”

    “······네. 뭐.”

    “와아, 정말 팬이시구나. 좋아하시겠어요.”

    “네?”

    무슨 말이지?

    좋아하다니 누가?

    그런데 그때였다.

    만화방의 문이 열리더니 남자 한명이 들어왔다.

    “나 왔어.”

    그런 그를 보며 여자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오빠.”

    “어. 그래.”

    그렇게 말하던 남자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와 내가 동시에 놀랐다.

    “어?”

    “······!”

    그는 바로 방금 뿔테여자와 이야기하던 만화가인 강용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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