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남이 아니에요 (2)
미치코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미리 말씀을 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없으셨구나.”
“내가 무슨 폭탄인가요? 무슨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건데?”
이즈미가 불퉁한 표정으로 미치코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이즈미.
이 여자가 미치코와 같이 우리 화실에 찾아온 것이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화실 식구들이 크게 놀랐다.
특히나 선희와 신경전을 벌인 이력이 있던 탓에 혹시나 싶어서 선희 쪽을 힐끔거려봤는데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평소와 다름없이 주변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그런 선희의 반응에 이즈미도 조금 안심한 표정이다.
역시 선희를 꽤 많이 의식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보다 이 여자는 도대체 왜 온 거지?
“······.”
나뿐만이 아니라 화실 사람들 모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이즈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치코의 경우는 실버나 내게 이번 와르다의 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즈미는 도대체 왜 왔는지 상상도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주변의 분위기를 느꼈는지 이즈미가 콧등을 찌푸렸다.
“역시 불청객 취급이네.”
어이없는 말에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환영행사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이정도로 차갑게 대할 줄 몰랐을 뿐이지.”
당연한 반응인데?
그나저나 진짜 온 목적이 뭐지?
또 무슨 꿍꿍이가 있을까 싶어서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이번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표정으로 미치코를 돌아봤다.
내 시선을 받은 미치코가 어색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젠, 나카야 씨도 저희 회사와 한 식구가 되셔서······.”
뭐가 됐다고?
식구?
“엑! 진짜요?”
그때 커피를 들고 나오던 경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러자 이즈미의 얼굴이 경희 쪽으로 돌아가더니 방긋 미소 짓는다.
“그럼요. 이젠 한 식구죠.”
경희는 눈알을 데굴거리고는 곧바로 물었다.
“식구라면······, 역시 만화가는 그만두시고 출판사에 취직하신 거예요?”
“출판사에 취직이요?”
“아, 아닌가?”
이즈미가 재벌집 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커피를 두 사람 앞에 내려놓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이즈미가 곧 턱을 바짝 세웠다.
저거, 저거 뭔가 거들먹거리려는 준비동작인데.
이번엔 뭐로 위세를 떨려고.
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취직이랑 전혀 다르지만, 관계가 생긴 건 맞아요.”
“어떻게요?”
“뭐 그냥 회사 일부를 샀어요.”
무슨 두부 한조각 사는 주부처럼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그게 결코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아들었다.
“일부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뜬 경희가 묻자, 이번엔 실버가 끼어들었다.
“주식을 샀다는 거겠지.”
“주식이요? 정말?”
경희가 깜짝 놀라며 이즈미를 돌아봤다.
그 순간 이즈미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실버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뭔가 떠오른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 이번에 와르······, 뭐랬죠? 제목이?”
이즈미가 미치코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흠칫 놀란 미치코가 실버의 눈치를 보더니 이즈미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그제야 머리를 끄덕인 이즈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와르다의 별. 그거 작화를 맡으셨다고 하셨죠?”
주주가 되었다면서, 아니 그보다 그렇게 머리 좋다고 떠들던 이즈미가 그 몇 자 되지도 않는 제목을 까먹었었다고?
그 놈의 자존심이 또 어색한 연기를 하게 만드는 거다.
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분명 실버에 대해 충분히 조사도 하고 왔을 거면서.
아무튼 그런 그녀의 말에 실버가 작업을 멈추고 머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즈미를 쳐다봤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실버의 냉랭한 말에 움찔거린 이즈미가 팔짱을 끼며 허세를 부렸다.
하긴 이즈미 정도 되니까 저런 실버의 살기 앞에 멀쩡하지, 일반적인 여자였으면 기겁했을 거다.
아무튼 이즈미가 당찬 음성으로 말했다.
“문제없어요. 그냥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평소에도 그렇게 다른 사람 질문에 비딱하게 말하나요?”
“난 별로 비딱하게 말한 적 없는데.”
그때 경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에이, 저 오빠 평소에도 저런 식으로 말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하긴 해요.”
“오해가 아닌 것 같은데.”
“오해 맞아요. 정말인데.”
경희가 열심히 실드를 치자, 곧 상관없다는 듯 팔짱을 끼며 머리를 끄덕였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죠.”
그렇다고 치는 건 또 뭐야?
어? 실버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래도 곧 실버의 얼굴이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요즘 정미자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예전에 비해 많이 참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런 사정이야 알 리 없는 이즈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구로다.”
“네, 아가씨.”
노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아무튼 존재감을 지우는 능력은 거의 어쎄신, 아니 닌자급이다.
“그거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노인이 밖으로 나갔다.
뭘 가져오려는 모양인데.
그리고 잠시 후, 화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노인이 들고 온 물건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실로 다시 들어온 노인이 그것을 들고 실버에게 다가갔다.
실버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올려다봤다.
“뭡니까? 그걸로 날 요절이라도 내려고 그래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건 저희 아가씨께서 실버 선생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네?”
실버가 얼음처럼 굳었다.
그런 실버에게 노인이 칼집에 잘 꽂혀진 일본도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내밀었다.
정말 일본도다, 일본도.
저런 걸 그냥 세관에서 통과시켰을 리도 없으니, 뭔가 다른 방식으로 들여온 것이겠지.
그보다 저런 걸 선물로 준다니, 내 등골이 다 서늘해진다.
다른 화실 식구들의 반응도 나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선희 혼자만 빼고.
오히려 선희는 일본도를 보더니, 관심을 가지는 표정이다.
“아실지 모르겠는데, 이건 코테츠가 남긴 진품이에요. 물론 손잡이랑 칼집은 새로 만든 거고요.”
코테츠가 누구야?
실버의 표정이 딱 그렇다.
나도 궁금하다.
그보다 칼, 검 같은 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하사품이 아닌가?
나보다 그런 건 실버가 더 잘 알고 있으니, 실버도 별로 반갑다는 표정은 아니다.
그런데 이즈미도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별 뜻은 없어요. 제가 이제 2대주주로 들어온 시점에 가장 멋지게 성공한 작품이라 기념으로 드리는 거니까. 참고로 이 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물건이라는 것만 아시면 되요.”
그때 인상을 쓰고 있던 실버가 이즈미 쪽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주시는 거니까, 잘 받도록 하죠.”
어?
뭔가 한마디 따끔한 말을 던질 줄 알았는데, 실버의 입에서 자본주의에 굴복한 자의 말이 튀어나왔다.
모두 황당한 얼굴로 실버를 봤지만, 실버는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로 일본도를 받았다.
역시 실버도 진정한 가장으로 거듭났구나.
자존심 따윈 개나 줘버리라는 듯.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고, 그것이 시작이었는지 다른 어시들도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저 이즈미만이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무튼, 칼을 들고 실버의 어깨에 얹는 작위 수여식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당신을 귀족급 만화가로 임명합니다.’
상상만 해도 너무 웃길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화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곧 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역시 이곳의 분위기는 잘 모르겠네요. 적응도 안 되고.”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이 쓰이니까, 그러죠.”
“그럼 뭐 할 수 없지만.”
“······.”
또 불만이라는 얼굴이다.
뭐, 딱히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렇게 듣기 좋은 말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갑자기 왜 미쯔다쇼텐의 주주가 될 생각을 하신 거죠?”
내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이즈미가 곧 얼굴을 폈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크게 될 회사로 생각했으니까요.”
“점프의 슈에이샤가 더 낫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 회사는 이미 덩치가 너무 커서 별로 끌리지 않네요.”
“그런가요?”
“당연하죠. 앞으로 이 회사는 엄청 클 거예요. 요즘 제가 부동산으로도 꽤 돈을 많이 벌었는데, 앞으로도 투자를 늘릴 생각이에요.”
그렇게 말한 이즈미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날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내가 뭘요?”
“방금 그 표정이요. 뭔가 꺼림칙한데.”
나도 모르게 이상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앞으로 부동산의 투자를 늘린다고 말했으니 어쩌면 당연히 내 표정이 이상해지긴 했겠지만.
그때 근처에 있던 경희가 끼어들었다.
“오빠는요, 몇 년 안에 일본의 부동산이 엄청나게 폭락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야, 쓸데없는 말을······.”
가족에게는 무의식중에 지나가듯이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경희가 그런 기억을 떠올려 말할 줄이야.
역시 묘한 눈빛으로 이즈미가 날 쳐다본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로 선희의 콘티노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이즈미의 시선이 날 향했다가 곧 거두어졌다.
“일본의 부동산은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어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텐겐 씨가 그렇게 말했다니까 어쩐지 신경은 쓰이네요.”
윽.
“뭐, 그건 그렇고. 이렇게 왔으니, 여러분에게 한 말씀 드리죠.”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즈미에게 쏠렸다.
“아시겠지만, 여러분이랑 저는 남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열심히 해주세요. 여러분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그 말에 모두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이대봉이 깜짝 놀라더니 박소미에게 물었다.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그렇다니까. 나카야 씨 만화가 그만두고 집안 가업을 이어 무슨 투자 같은걸 시작했다더니, 이렇게 다른 입장으로 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그녀의 말에 이대봉 곧 크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찔끔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그 유별난 정신세계.”
“그건 오빠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에이, 난 그 정도는 아니지.”
“만만치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니라니까. 그치, 실버.”
“네가 더 이상한 놈이야.”
그 말에 이대봉이 쀼루퉁한 얼굴로 실버를 쏘아봤다.
“사무라이 칼 받았다고, 그세 비호 하냐?”
“사무라이 칼이 아니고 일본도.”
“그게 사무라이 칼이지.”
“무식한 놈.”
“아니지, 그 무식한 건 너지. 살인 병기를 그렇게 넙죽 받아서 어디에 둘 건데? 너 그러다 잡혀가.”
“안 그래도 그거 박물관에 기증했다.”
실버의 말에 이대봉이 깜짝 놀랐다.
“엥? 박물관?”
아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나 역시 마찬가지.
만약 이즈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난리법석을 칠지 걱정도 된다.
“그래. 내가 그런 흉악스러운 걸 가지고 뭘 하게. 괜히 이렇게 뒤숭숭한 시국에 끌려가면 미자 씨는 누가 돌보······. 크음. 아무튼 내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역시 가정을 먼저 생각하는 가장이었군.
그보다 그거 공짜로 기증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