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 블랙 (2)
콘티노트에서 눈을 뗐다.
음······.
마지막 대사 때문에 살아난 아이는 AI라는 뜻인가?
이야기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살아난 존재는 여자아이의 몸을 가진 AI인지, 그게 아니면 AI와 여자아이가 같은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건지.
선희를 돌아봤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눈빛은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거 여기서 완전히 끝나는 거야?”
“응.”
마지막 살아난 여자아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
선희에게 물어볼까하다가 관뒀다.
어쩌면 모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냥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어쩌면 선희는 저번 에피소드처럼 별다른 생각 없이 마음 가는 데로 진행시켰는지도 모르니 물어봐도 확실하게 대답할 것 같지도 않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AI가 여자아이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난 것이라면, 그리고 성격마저 같다면.
그건 AI가 여자애의 육체를 점령한 것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여자아이가 살아난 걸로 봐도 무방할까.
얼핏 생각하면 인간의 탈을 쓴 AI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기억과 성격을 가진 상황이라면 본체인 여자애와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상관이 없는 걸까.
물론 주변사람들이 이런 자세한 사정을 몰랐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에······.
여자애가 같은 기억과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뭔가 묘하게 다른 느낌을 풍긴다면.
그렇다면 가족들은 의심하게 될까.
아니면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조금 변한 것 정도는 그냥 받아들여질까.
나라면 어땠을까?
가족 중에 한명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평소와 약간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면.
물론 평소 성격도 비슷하고, 제대로 모든 것을 기억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괜찮다고 넘어갈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하면 의심하는 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나저나 선희의 콘티를 읽다보니, 문득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전에도 작은집 식구들과 같이 있을 때 묘하게 소외되는 느낌이었는데.
진짜 가족들의 유대감이 내게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지금 선희의 이 이야기를 보며 묘한 기분이 빠져 들었다.
다시 살아난 저 여자아이와 내가 다른 건 뭘까?
아, 저 아이가 기억을 가지고 있고, 성격이 같다는 면 나보다 훨씬 나은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더 처진다.
만약, 내 본체 녀석은 이미 죽어 없어졌고, 그 자리를 내가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때도 날 가족처럼 여겨줄까?
본체 이윤환의 정신은 이미 이 몸에서 빠져나간 지 오래고, 미래에서 엉뚱한 놈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 가족이 좀 더 부유해진 건 사실이고, 더불어 몇 년간 정이 쌓였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걸까?
기분이 묘하다.
어쨌거나 나와 묘하게 오버랩 되는 무언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에피소드는 상당히 재미가 있다.
나랑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없이 몰입해서 볼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 내게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선희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재미가 없어?”
선희가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
“엉망이야?”
두 번째 물었을 때야 정신을 차린 내가 허겁지겁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 재밌어. 굉장히.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꽤 놀라고 있는 중이라 네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
선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선희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표정을 살폈다.
이젠 나도 선희의 작은 표정에서도 기분이나 작은 감정 정도는 읽을 수 있다.
호기심과 걱정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스토리에 어떤 의도 같은 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초기엔 날 조금 이상하게 생각한 시절이 짤게나마 있긴 했었지만, 언제부턴가 날 진짜 오빠로 받아들였고, 그 이후로 선희는 철석같이 날 오빠로 따르고 있으니까.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아니, 그냥 스토리를 받아들이면 되는데, 여기에 뭔 의도가 있다는 것인지.
내가 생각해도 한심해서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다.
선희의 신작 에피소드를 가지고 너무 확대해석 하는 내가 바보인 거지.
하기야, 선희가 이렇게 깊은 뜻을 숨겨두고 스토리를 만들었을 것 같지도 않고.
선희가 불쑥 물었다.
“복잡해?”
“응? 뭐가?”
“지금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
선희가 만화에만 열두하고 있을 뿐 결코 감각이 예민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방심할 수 없는 앤데.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
“머신건 잭?”
“그런 것도 있고.”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장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단편 제목은 생각해 뒀어?”
갑작스런 내 질문을 받은 선희가 움찔거리더니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역시 생각해 두지는 않은 모양이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잠시 생각에 빠졌던 선희가 입을 열었다.
“음······, 안나와 블랙.”
안나와 블랙이라.
단순하지만 나쁘진 않다.
그래도 아직은 대사라든가, 장면에 허술한 부분도 조금 보인다.
다시 콘티노트를 들고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초반 비오는 도시의 장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첫 장면의 비속 AI 모습이 좀 더 처량하게 보이면 좋겠어. 캐릭터도 조금은 호감 가는 모양으로. AI에 홀로그램이니까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좀 더 감성적이니까. 이야기가 꼭 현실적일 필요는 없어도 될 것 같은데. 어때?”
내 말에 생각에 잠겼던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리고는 새로운 연습장에 즉석으로 AI 홀로그램 속 캐릭터를 그린다.
처음보다 눈과 머리를 키워서 귀여움을 강조했다.
“귀엽기는 한데, 몰입하기 힘든 형태 같은데.”
“알았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여러 개를 한꺼번에 그렸다.
그 중에서 골라보라는 듯 날 쳐다봤다.
내 손가락이 하나를 골랐다.
“난 이게 좋은데.”
선희가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나도.”
어쨌든 캐릭터가 정해지자마자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말이지······.”
나름 보면서 아쉽게 느껴진 부분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내 생각을 말해줬다.
선희의 감성이기 때문에 알아서 걸러 들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선희와 얘기하고 있는데, 그때 경희가 내 등을 툭툭 건드린다.
“왜?”
“시계 좀 봐봐.”
“······?”
시계를 올려다봤더니, 밤 12시가 훨씬 넘어있다.
집이 그리 멀지 않기는 하지만, 애들을 데리고 돌아다니기엔 좋지 않는 시간인 것만은 분명하다.
“방금 엄마한테 전화도 왔었어. 안 오냐고.”
“응? 전화가 왔었어? 못 들었는데. 넌 들었냐?”
선희도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경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집중력 좋은 건 알겠고요. 빨리 집에 가자.”
“안 무섭냐?”
“무섭지.”
“그럼, 엄마에게 전화 걸어. 그냥 오늘은 화실에서 자자.”
“여기서?”
“그래. 난 여기서 소파에 누워 잘 테니까, 너희들은 2층에 가서 자든, 아니면 옆방에서 자든 알아서 해.”
“우리도 여기 소파에서 잘래. 화실에서 자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여기 먼지 많아. 매일 여기서 얼마나 많은 지우개가루가 생산되는지 몰라?”
“에이, 그딴 거 누가 신경 써. 그리고 화실은 하루에 청소만 두 번하는데, 뭘.”
하기야, 지금 시절엔 미세먼지 따위의 개념도 별로 없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긴 하지만. 거기다 경희의 말대로 화실청소는 평소에도 철저한 편이고.
“이집은 묘하게 무섭단 말이야. 그냥 여기서 잘래.”
“뭐, 그럼 그러던가.”
“아싸.”
경희가 좋아라하며 옆방으로 가서 얇은 이불이랑 베개를 챙겨온다.
선풍기도 소파 쪽으로 향하게 세팅을 하고는 잠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네.”
“어떤 기분?”
“수학여행 같잖아.”
“수학여행이랑은 전혀 다른 것 같은데. 거기다 달랑 셋뿐이고.”
“기분이 그렇다고, 기분이. 오빠는 감성이 말랐다니까.”
“그런 거냐?”
“그런 거지.”
“그렇다고 해두자.”
이런 걸로 싸우면 경희에겐 이길 수 없고, 이길 생각도 없다.
아무튼 경희가 호들갑을 떨며 소파를 침대로 변신시키고 있을 때, 뭔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벽에 붙어 있는 액자 속 사진.
얼마 전에 길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며 구해온 건데,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노을을 마주보고 앉아있는 고양이와 소녀의 모습이다.
저 사진만 보면 경희가 ‘가을바람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이러면서 동요를 부르기도 한다.
몇 년 전에 꽤나 TV에서도 많이 흘러나왔던 노래라 나도 알고 있는 노래다.
아무튼 그 노래도 떠오르고 해서 사온 거라는데······.
그보다 저 사진, 이상하게 눈에 새겨지는 기분이다.
그러다가 실버 자리에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옛날 명작이라며, 빌려온 건데 실버가 깜빡 두고 간 모양이다.
제목이······ ‘안나 카레니나’다.
내가 살던 시절에 리메이크 된 영화가 있었던 것 같지만, 본건 아니다.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이걸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묘하게 익숙하다.
나도 모르게 선희의 자리 쪽으로 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집중하며 선희의 자리에서 주변을 스캔하듯 탐색해 나갔다.
그리고 선희의 자리에 있는 잉크.
거기엔 영어로 'Black'이라고 적혀있다.
갑자기 머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진 속 고양이와 소녀.
안나.
블랙.
설마 싶어서 다시 눈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선희의 자리에서 보이는 김달부의 책상.
거기엔 그가 평소 좋아하는 책들이 보인다. 그리고 책상에 보이는 마술사의 사진.
하얀 천을 덮은 여자를 공중에 띄우는 외국 마술사의 모습이다.
하얀 천을 뒤집어 쓴 여자.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류타니의 책상 위엔 스타워즈의 대표 드루이드인 R2D2의 사진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에피소드4에 레아공주의 홀로그램 영상을 비춘 바로 녀석이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에 등장한 공주의 크기는 대충 여자애들 인형 크기로 기억한다.
아, 나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이거······, 뭐지?
그 순간 다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며칠 전에 비가 많이 오던 날, 백설기 녀석이 창밖에서 문을 두드렸던 게 떠오른다.
그때 선희가 현관문이 아닌 창문을 열어줬고, 백설기가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마룻바닥에 온통 녀석의 진흙 발자국에 생겨 난리법석을 떨었지.
······.
곧장 선희를 돌아봤다.
경희와 함께 수건을 챙겨들고 욕실 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인다.
“선희야.”
“······응?”
선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런 선희를 잠시 쳐다보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
곧 선희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곧장 실내를 빠져나갔다.
선희가 나가고 나자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에 이야기 속의 것이 다 있다.
그것을 이렇게 조합해서 만들었다니.
이거 뭐, 유주얼 서스펙트도 아니고.
선희 네가 카이저 소제냐?
뭔가 황당한 기분이다.
어쨌거나, 선희가 뭔가 의도를 가지고 만들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생각에 경희가 이불을 펴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