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건 사람목숨 (1)
“축하드립니다.”
- 아, 감사합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서도 지로의 쑥스러운 느낌이 전해진다.
솔직히 그동안 지로가 엄청 고생했다는 건 분명했으니, 어쩌면 승진도 당연한 일이다.
“담당은 그대로 하시는 거죠?”
- 네. 그렇습니다. 만약 담당이 바뀐다는 거였으면 승진도 의미는 없으니까요.
“그럼 앞으로 더 바빠지는 거 아니에요?”
- 하하. 아뇨. 팀원들 몇 명이 제 일을 분담해서 할 겁니다. 이젠 편집부 차원에서도 선생님의 작품에 좀 더 많은 인원이 붙어야한다고 결정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승진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게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어요. 그동안 그만큼 고생하셨으니까.”
- 감사합니다.
그렇게 덕담을 주고받은 뒤, 연재 이야기로 넘어갔다.
- 머신건 잭의 이야기가 초반부터 시원, 시원하다는 게 대부분 팬 엽서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벌써부터 세 명의 캐릭터들의 인기싸움이 범상치 않습니다. 다음호에 발표될 캐릭터 순위의 1위는 조크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몽, 세 번째가 잭이구요.
제목은 머신건 잭인데, 인기는 조크와 몽의 인기가 더 높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목을 ‘황야의 3인방’이라고 지을 걸 그랬나.
어쨌거나, 나도 스토리를 만들어가며 가장 활동적인 캐릭터가 조크라는 걸 느꼈으니까.
기본적으로 이대봉을 기반으로 만들어서인지 수다스럽지만, 그만큼 기계로 이뤄진 운송수단의 운전 능력만큼은 타고나서 위기의 순간마다 멋지게 탈출하는 능력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상 깊게 남았을 것이다.
몽이야 뭐, 특유의 귀염성으로 인기를 끌었을 것이고.
물론, 기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능력도 한몫했겠지만.
그러고 보니 캐릭터가 알아서 진행한다는 걸 요즘 들어 많이 느끼고 있다.
예전엔 스토리에 중심을 둔 콘티를 만들었다면, 요즘엔 캐릭터에 더 신경 쓰고 있다. 그리고 상황은 그냥 던져주면 캐릭터들이 알아서 진행시키는 그런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그게 또 재미있는 요소다.
만들다보면 나조차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로 발전하는 경우도 꽤 있다.
그 덕분인지 만드는 재미도 쏠쏠한 편이다.
- 그런데 이번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데저트캐슬의 여자두목인 카일리의 인기도 상당하네요. 3위인 잭과 몇 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여자지만 상당한 카리스마가 있는 캐릭터라 인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사실, 이 캐릭터가 가장 마음에 들기도 하고요.
카일리는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마을 데저트캐슬의 여자리더다.
늘 그들 마을을 노리는 오토바이 집단 ‘울프스’와 수년째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울프스는 사막의 무법자들로 인근을 지나는 사람들을 습격하는 무리들이지만, 카일 리가 있는 데저트캐슬에 공격하는 것은 늘 실패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주인공 일행이 조라탱을 타고 사막을 지나다 데저트캐슬에 식량을 조달하던 차량들이 울프스의 습격을 받는 상황에서 그들을 도와주게 되면서 인연이 생기게 된다.
카일리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에 등장하는 카리스마 캐릭터들을 섞어 만든 캐릭터로 강인한 성품으로 리더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외모역시 상당히 아름다운 캐릭터다.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선희에게 여러 가지 주문을 해서 상당히 공을 들린 캐릭터였다.
아무튼 그렇게 그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에 있었다.
- 카일리는 여자지만 남자 이상의 배포와 강단이 있는 여자라 남자 팬들은 물론 여자들에게도 상당한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팬들이 카일리를 그려 보내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아마 이번 에피소드가 길어진다면 잭의 인기를 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머신건 잭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 하하, 그래도 잭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니까 정말로 그렇게 하시면 곤란하죠.
“아무튼 팬들이 보냈다는 그림도 좀 보내주세요.”
- 네. 안 그래도 따로 포장중입니다.
그렇게 잡담을 주고받은 뒤 전화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때 류타니가 화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선생님, 야외 화장실 청소 끝냈습니다.”
어찌나 요란하게 청소했는지 머리까지 다 헝클어져 있다. 화장실에서 몬스터와 싸우기라도 했나?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류타니에 물었다.
“그걸 네가 왜 해?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같이 할 텐데.”
내 말에 류타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제가 뭐, 여기서 하는 것도 없고, 그런 거라도 해야죠.”
“네가 하는 게 왜 없어? 원고 뒤처리 작업도 하잖아.”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게요.”
지나치게 부지런한 녀석이다.
그런데다가 요즘엔 한국어 공부에도 열심이다.
스토리 공부에, 화실 청소, 그리고 원고 뒤처리까지 화실에서 가장 바쁘다.
아무튼 녀석은 애완견처럼 실실 웃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마치, ‘저 칭찬해주세요.’라는 표정으로.
그런 녀석을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제 저녁에 쓴 거 있어?”
“네임이요?”
“그래.”
류타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럼, 한 번 봐 주시겠어요?”
“가져와 봐.”
“넵.”
그렇게 대답한 류타니가 화실 한쪽에 새롭게 마련된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노트를 한권 가져와서는 내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그것을 받아든 내가 노트를 펼쳤다.
삼사라월드 첫 호에 실렸던 나가의 속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첫 호에 실렸던 건 단편이었고, 그것을 장편 화 시킨 게 내용이다.
이곳에서 생활하기 전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며칠 동안 내 도움으로 내용을 상당히 수정해 다시 콘티를 만들고 있었다.
역시나 그림엔 재능이 부족한 탓인지, 여전히 극악이다.
하지만, 스토리에 대한 이해력은 그 짧은 시간동안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나가의 라이벌인 가루다의 등장 부분이 재밌네. 단편에서는 잠시 언급만 했던 부분을 잘 표현했어.”
“그, 그렇습니까?”
“이대로 쭉 이 느낌을 잃지 말고 만들어. 괜찮은 작화가와 만나면 꼭 제대로 연재하자.”
“삼사라월드 말고요?”
“삼사라월드는 실험적인 잡지야. 단행본으로 되는 건 당연히 완성된 원고에 한해서고. 이런 콘티만 만들어진 건 단행본으로 나올 수 없어. 나온다고 해도 극히 일부의 사람만 살 거고.”
“그래도 상관은 없어요.”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돈 문제가 계속 걸리면 작품 활동을 꾸준히 못해. 나중에 금전적으로 힘들어진다고 다시 부모님께 의존할 생각 아니면.”
그 말에 류타니가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저도 이제 다 컸으니까요.”
그때 화실로 선희가 들어왔다.
요즘엔 시험이 코앞에 있다고 수업은 일찍 마치는 모양이다. 물론 입시공부를 위해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하는 애들도 있고, 선희처럼 일찍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단다.
경희는 학교에 남아서 공부중인데, 듣기론 올 초부터 시작된 논술고사도 준비해야 한다며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있다.
한국의 입시 정책이 수도 없이 바뀌고 있으니, 수험생들만 고생이다.
아무튼, 선희가 화실에 들어오자마자 류타니가 서둘러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안녕.”
당연하다는 듯 편안하게 인사를 한 선희가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앉는다.
류타니는 처음 이곳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 선희와 경희에게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 만난 경희에게도 똑같이 불렀다. 그때는 우연찮게 선희가 없을 때라 쌍둥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렇게 부른 거였는데, 화실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일부러 숨기고 그의 반응을 지켜봤다.
그런데 두 애들이 성격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타니가 혼란을 느꼈다.
‘써니 선생님은 어쩐지······ 두 가지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보여요.’
그런 류타니의 말에 어시들이 한참을 웃은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선희와 경희가 같이 화실에 온 일이 있었고, 그 때문에 쌍둥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일 때문에 한참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두 사람에게 그냥 아가씨라고 부른 것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경희는 처음에 그것 때문에 신경 쓰인다며 류타니에게 그냥 ‘누나로 불러’라고 했지만, 막무가내다.
선희야 뭐로 부르던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선희가 자리에 앉아마자 류타니는 서둘러 부엌으로 가서는 오렌지주스를 가져나온다. 그리고는 선희의 책상위에 주스가 든 컵을 놓는다.
“드세요. 아가씨.”
“고마워.”
선희가 주스를 마시자 그 모습을 보던 류타니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른 어시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도와드릴 건 없어요?”
바쁠 땐 어설픈 한국어로 묻지 않는다. 어시들 대부분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나 외부에 나가서 물건을 사올 때는 나름 적극적으로 한국어를 사용한다.
“이거 뒤처리 부탁해.”
“네.”
김기철이 내민 원고를 받아 자신의 자리로 가서 열심히 지우개질을 하며, 먹칠도 한다. 시간 날 때마다 성준희에게 스크린톤 사용하는 법도 배우긴 하지만 아직 실전 원고에 사용할 실력이 되지 않아서 쪼가리 톤으로 연습을 하고 있다.
물론 스토리작가가 목표겠지만, 만화에 대한 건 전반적으로 다 배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때 이대봉이 화실에 들어왔다.
“나 왔어. 류타니도 잘 있었어?”
그 말에 류타니가 이대봉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얼굴 보니까 이제 좀 적응한 모양이네. 음식은 맞아?”
“네. 괜찮습니다. 김치도 입에 맞고요.”
“오, 그래? 먹는 건 금방 적응하는 것 같네.”
류타니가 화실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이후로 자주 찾아오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실버가 괴롭히지 않을까 싶어서겠지.
실버도 그런 걸 느꼈는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너는 요즘 왜 이렇게 자주와?”
“남이야 자주오든 말든 신경 끊으시지.”
“쟤 때문이냐?”
“신경 끊으시라니까.”
그렇게 툭 쏘아주고는 내게 다가왔다.
“윤환이는 요즘 어때?”
“뭐가?”
“머신건 잭 말이야. 엄청 재밌던데, 스토리가 술술 풀리는 거야?”
“술술 풀리는 게 어디 있어? 그만큼 고민하고 있는데.”
“너야 뭐 그렇게 얘기하지만, 옆에서 보기엔 너무 쉽게 풀어가는 것 같아서.”
솔직히 고민을 많이 한다고는 하지만, 스토리 자체는 잘 풀리고 있는 편이다. 확실히 예전의 나와는 다른 머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일이 익숙해져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 방면으로 재능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 맞다. 오다가 그 사람 만났다.”
“누구?”
“저기 그 사람 있잖아. 백무정.”
“백무정?”
들어 본 것 같기는 한데, 갑자기 떠오르지는 않는다.
“너는 모르겠구나. 대본소에서 주로 활동하는 만화간데, 요즘 뉴소년에서 연재하는 만화가 있는데······, 제목이 뭐였더라? 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백무정, 백무정.
누구지?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백무정이 누군지 떠오른 것이다.
“투쟁!”
“아, 그래 맞아 투쟁. 어? 너도 알고 있었네? 역시 만화 쪽 지식은 대단하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이대봉이 웃었다.
백무정.
80년대 초중반에 활동한 만화가인데, 이대봉의 말대로 대본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만화가다.
꽤나 재능이 있었고, 뉴소년에 투쟁이라는 복싱 만화를 연재중이다.
그림은 상당히 디테일하고 연출이 좋지만, 연재중인 곳이 월간지고 대본소 만화도 크게 성공하지 못해서 사는 게 빠듯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런 그를 근처에서 봤다니, 인근에 살고 있었나?
“아무튼 요 앞에 있는 뒷산에 올라간다는 모양이더라.”
“산에?”
“응. 예전엔 산타는 게 취미였는데, 오랜만에 올라가는 중이래.”
“그래?”
그렇게 무심하게 대답했다가 곧 멈칫했다.
백무정에 대한 더 상세한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백무정 1986년 가을.
산행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
“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왜 그래?”
“어느 방향으로 올라갔어?”
“누구? 백무정?”
“그래. 어느 방향이냐고.”
“네가 가끔 간다는 그쪽 길이야. 길성 아파트 뒤쪽 길.”
그 말에 내가 이대봉을 다그쳤다.
“대봉이 형, 나랑 같이 가자.”
“뭐?”
이대봉이 황당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