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을 무시하지 마 (5)
미치코가 가져온 잡지들의 가장 마지막 부분, 작가 후기를 보며 아직 제대로 실감할 수 없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만화가부터 이름이 별로 없는 만화가까지 그들 대부분이 삼사라와 써니를 응원하고 있었다.
특히 자신들의 만화에서 가장 유명한 명대사를 응용한 글 때문에 뭔가 알 수 없는 흥분이 밀려왔다.
[힘내세요! 파이팅입니다!]
[평소에도 잘 보고 있습니다. 국적 따윈 상관없잖아요!]
[새하얗게 불태우는 것만이 우리들의 사명! 삼사라 최고! 다크 프린세스 최고!]
마치 내가 살던 시절에 응원 댓글처럼, 이 시대엔 자신의 후기로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
어? 팔에도 닭살이.
어쨌든 이렇게 많은 만화가들에게 응원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며칠 전에 토리야마 아키라에게서 응원의 전화가 왔을 때도 꿈인가 생신가하는 기분이 들긴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사이즈가 완전히 다르다.
나처럼 이렇게 많은 만화가들에게 응원 글을 받아본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감격에 겨워하는 그때 쌍둥이들이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경희가 물었다.
“지금 그거 무슨 얘긴데?”
미치코와 나의 대화를 듣고서 호기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경희의 질문에 내 앞의 있던 미치코가 입을 열었다.
“만화가 선생님들의 후기요. 응원 글.”
“응원 글요?”
“두 분 선생님들도 보세요. 자, 여기.”
미치코가 테이블에 놓인 잡지들을 쌍둥이들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두 녀석이 바로 마지막 페이지를 펼친다. 그리고는 그곳에 적힌 내용들을 읽기 시작했다.
읽은 동안 쌍둥이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물론 경희는 격하게, 선희는 좀 미지근하다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건 글을 읽던 쌍둥이들 중 경희가 먼저 반응했다.
“와, 이렇게 많은 만화가들이 정말로 우리 오빠랑 선희를 이렇게 응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요. 그리고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미치코의 말에 경희의 눈을 크게 떴다.
“더 있어요?”
“뭐, 정확한 건 저도 잘 모르긴 하지만, 공항에서 팔고 있던 만화잡지가 이것들뿐이라 서요. 그래서 더 확인을 하지 못하긴 했는데, 아마도 더 있을 거예요.”
그때 박소미가 어지간히도 궁금했는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들고는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우리에게도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경희가 책자를 들고는 살랑살랑 흔들며 대답했다.
“여기, 만화가들이 쓰는 후기 있잖아요. 여기에 만화가들이 힘내라며 삼사라 응원하는 글을 썼어요. 그것도 잔뜩.”
“정말요?”
“네.”
그 말을 들은 어시들도 작업을 멈추고 자기들끼리 서로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저도 좀 보면 안돼요?”
“저도요.”
어시들이 손을 번쩍 들어가며 말한다.
“당연히 되죠. 자, 여기요.”
미치코가 남은 책 한권을 박소미에게 건넸다.
그러자 박소미를 중심으로 어시들이 모여든다. 그런데 곧 표정이 묘해진다.
궁금해서 모여들긴 했지만, 이 친구들이야 일본어를 모르니까, 당연한 반응이다.
“아, 진짜. 이럴 땐 일본어를 모르는 게 아쉽네.”
구자희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곧이어 박소미가 실버 쪽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실버오빠. 여기 좀 해석해 줘요.”
그렇게 말하며 작업 중인 실버에게 잡지를 들고 우르르 몰려간다.
경희와 선희가 잡지에 푹 빠진 모습으로 있으니 부탁하기가 좀 뭐했던 모양이다.
미치코 역시도 이들에게 설명해줄 능력은 없고. 그래도 정미자를 담당하면서 간단한 대화는 가능한 모양이지만.
아무튼 갑자기 몰려든 어시들 때문에 실버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런 표정과는 달리 번역은 제대로 해준다.
몇 개를 읽어가다 곧 실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팬으로서 열심히 해주시면······, 하트, 하트, 감사······. 더는 못하겠군.”
결국 안 되겠다는 듯 책을 밀어내자 박소미가 실버를 붙들고 늘어졌다.
“제발 오빠.”
“시끄럿! 그냥 가지고 가. 방해되니까.”
버럭 하자 화들짝 놀란 어시들이 실버에게서 물러났다.
“아, 깜짝이야! 오빠는 진짜!”
“미자 언니에게 다 이를까보다.”
“······!”
박소미의 말에 실버가 움찔하고 놀랐다.
* * *
키도의 화실.
“이럴 수가!”
키도가 놀란 얼굴이 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잡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키도의 자리 앞에 서 있는 니시다가 말했다.
“저도 놀랬습니다. 설마, 타 잡지사의 만화가들까지 이 일에 이렇게 나서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이런 후기를 남긴 잡지는 이거 하나가 아니랍니다.”
그 말에 키도가 놀란 표정으로 잡지에서 시선을 떼고는 니시다를 쳐다봤다.
“그럼······, 이런 게 더 있다고?”
“그런 모양이에요. 제가 본 것만 해도 네 권인데, 듣기론 대충 6개 이상의 잡지에서 나선 모양이더라고요.”
“진짜?”
“네.”
키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들이 만화가들인데, 이렇게 조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제가 여기 만화가 몇 명과 알고 지내서 들은 얘긴데요, 토리야마 아키라 선생이 나선 모양입니다.”
그 말에 키도가 깜짝 놀랐다.
“뭐? 정말? 닥터슬럼프의 그 만화가?”
“네. 지금은 드래곤볼을 그리고 있죠.”
“하지만 이상하잖아. 토리야마 선생은 평소 사람들과 연락 잘 안한다고 들었는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담당인 토리시마 씨의 도움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다른 작가들과 교류가 없다고는 해도 이 분의 영향력이 상당히 크니까요.”
키도가 납득이 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흐음. 하긴, 토리시마 그 양반이라면 상당히 마당발이니까······. 그리고 이번 사건이 만화가들에게도 꽤 많이 알려졌으니······.”
키도가 교류중인 만화가들 대부분도 이번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 대충 분위기는 알고 있었다.
그들도 실제론 자신이 보고 있는 잡지의 후기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물론 그들 역시도 삼사라의 팬들이어서 처음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지만, 결국 한국인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역시 만화는 국적이 아니라 실력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니까.
다른 분야역시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나저나 말이지······. 다른 잡지의 만화가들까지 이렇게 나서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는 건 좀 한심한 것 같기는 한데 말이야.”
키도의 말에 니시다가 피식 웃었다.
“전 이미 이번 후기에 글을 올렸어요.”
“뭐? 벌써?”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설마 키도 선생님은 후기에······.”
“크음.”
슬쩍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외면하자 니시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본다.
“키도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면서 너무하는군요.”
“······난 몰랐잖아!”
“······.”
“······왜 자꾸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야?”
“제 눈빛이 어떤데요?”
“지금 그거 경멸의 눈빛 아니야?”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상하네요, 아무 뜻도 없는데.”
슬슬 부하가 치민 키도가 인상을 와락 썼다.
“뭐야? 시비냐?!”
그때 화실에 니시다의 담당인 오오타케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기······. 어?!”
그러다가 화실 분위기에 깜짝 놀란 오오타케가 눈알을 데굴거린다. 그리고는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서둘러 니시다에게 다가가 그를 콱 붙들었다.
“니시다, 선생님!”
“······응? 아,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화실에 안 계시길래, 혹시나 하고 와본 거죠.”
“그래? 그나저나 일단 이건 놓고 얘기하지?”
“그 전에······. 지금 뭐하고 계시는 건데요?”
“뭐하긴, 그냥 만화가들 사이의 친분교류잖아.”
그 소리를 들은 키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콧방귀를 뀐다.
“친분교류? 시비 걸러 온 줄 알았는데?”
“친분교류가 맞죠.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말에 흥분한 건 키도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말을 들은 키도가 이번엔 오오타케 쪽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봐. 자네가 보기에도 이게 시비지 교류로 보여? 바쁜 사람한테 찾아와서는······.”
그 말에 오오타케가 머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키도 선생님. 일하시는데······.”
“자네가 왜 사과를 해?”
“선생님은 좀 가만히 좀 계세요!”
“······이 친구가 진짜.”
그 모습을 본 키도가 아주 마음에 쏙 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도 담당은 제대로 된 사람이군.”
“자네 담당은 나야, 나. 그런데 왜 키도 선생님 편을 들어?”
“제발 어린애 같은 말씀 좀 마세요.”
“뭐?”
“하하, 그래 맞아. 어린애같이 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며 키도가 웃는 사이 오오타케가 니시다를 데리고 화실을 빠져나간다.
“이 친구 왜 이렇게 힘이 세?”
“자자 빨리 가세요. 지금 원고도 밀리셨으면서.”
“알았으니까 그만 좀 밀어!”
“네, 네.”
그 모습을 보는 키도가 낄낄 웃었다.
“저 친구, 임자는 따로 있었구만.”
“선생님 저 왔습니다.”
그때 인사를 하며 화실에 들어온 사람은 담당인 테고시였다.
“어, 왔나?”
“네. 그런데 방금 니시다 선생님이랑 오오타케 씨가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원고 하기 싫어서 여기 피신한 걸 잡아간 거지.”
“네?”
그렇게 말하며 그들이 나간 방향을 돌아본다.
그러더니 곧 어깨를 으쓱하고는 키도 쪽을 돌아보고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런데 말이에요. 선생님,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알고 있어.”
“네? 정말요?”
“그래, 잡지 만화가들 후기에 남긴 글 말하는 거잖아. 모두 삼사라 응원한다고.”
“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응? 뭐야, 그거 아니었어?”
“다른 잡지 후기 내용이 뭔데요?”
정말 모르는 모양인지 눈을 크게 뜨며 호기심을 보이자 키도가 손을 휘적거렸다.
“그럼 그 얘긴 나중에 하고. 그래, 놀라운 일이 또 뭐가 있는데?”
“······저도 방금 말씀하신 게 궁금한데.”
“먼저 말해보라니까.”
“······네.”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가 다시 표정이 확 밝아진다.
“이번 앙케이트에서 삼사라가 7위를 했잖아요.”
“알고 있어. 그 덕에 내가 1위 했지.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야. 설마, 이걸 소식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오늘 아침에 영업부 쪽에서 들은 얘긴데요. 삼사라 단행본의 판매량이 다시 늘기 시작한 모양이라고 하더라고요. 몇 군데 서점에서는 1권부터 품절이라고 다시 보내달라는 연락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뭐야? 한국인이라는 거 밝혀진 뒤로 앙케이트 떨어졌다더니, 오히려 단행본 판매는 늘었다고?”
“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한국이나 대만 쪽 사람들이 대량으로 구매하는 모양이더라고요.”
“한국은 이해하겠는데, 대만은 왜?”
“지금 대만에서 삼사라가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모양이에요. 아직 번역판 라이선스가 판매된 것도 아닌데, 그쪽 마니아들 사이에서 꽤 입소문을 탄 모양입니다.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고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