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91화 (191/425)

사상최악의 사고 (1)

코미케가 끝나고 다음날 아침.

바닥이 울리는 소리와 여자애들의 수다 소리에 잠을 깼다.

눈을 뜨자마자 익숙하지 않은 천장과 실내. 그리고 미묘하게 다른 실내공기.

그제야, 이곳이 일본의 스미레 집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4일째인데도 눈을 뜰 때마다 낯설기만 하다.

시간을 보니 벌써 8시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늦잠을 자버렸네.

내가 잠을 자는 곳은 작업실의 빈 공간.

스미레 부모님이 안방을 양보하긴 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나저나, 원래는 오늘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스미레 말로는 내일이 오봉(お益)이란다. 오봉은 일본의 명절로 조상의 영을 기리는 날,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추석에 해당하는 날쯤으로 이해 하면 된다.

아, 그러고 보니 여름 코미케가 오봉기간에 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뭐, 어쨌거나 그 때문에 공항엔 사람들이 분주하다나 뭐라나.

공항, 특히 일본의 국내선의 경우엔 사람들이 미어터진단다.

내가 알기론 일본의 경우, 국내 이동을 할 땐 비행기보다는 열차와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고 들었는데, 지금 시절은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이 기간이 끝나고 난 뒤로 결정하고 항공편도 그렇게 미리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계획보다 조금 더 일본에 머무르게 되었다.

"오빠 이제 일어났어?"

뻐근한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문을 열고 나가자 마침 문밖에 있던 경희가 날보며 말한다.

"어. 어제 화실 책들을 좀 보느라 늦게 잤더니."

"어휴, 여기 와서까지 뭘 그렇게 책을 뒤적거려? 적당히 좀 하지."

"알았다. 알았어.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 좀 하지마라."

"헤헤."

그렇게 헤벌쭉하며 웃고는 다시 말했다.

"아침준비 다 되어가니까, 얼른 씻어. 그 눈곱도 좀 떼고."

"그래?"

눈곱을 떼는 시늉을 하자, 화들짝 놀라더니 내 등을 떠민다.

"내려가서 빨리 씻어 지저분한 짓 하지 말고, 여긴 우리 집 아니니까, 행동도 좀 단정히 하고."

"아, 거. 진짜 잔소리는."

"얼른!"

"알았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계단을 내려가자 스미레의 아버지가 거실에 앉아 신문을 펼쳐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 눈이 서로 마주치자 인사를 했다.

"이제, 일어나셨군요.

"아, 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네. 그런데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날씨가 흐려서 그런가?"

"늦게까지 책 좀 보느라고요."

"아."

창밖으로 보니 날씨가 좀 흐리긴 하다.

어제도 그렇게 비가 오더니, 오늘도 여전히 날씨가 우중충하다.

"그럼 씻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그리고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멍한 정신을 추스르며 세수를 하고 나가자 스미레가 수건을 가져다준다.

"고마워"

"식사 다 준비되었어요."

"어. 그래."

얼른 정신을 차린 후 아침을 간단하게 먹었다.

그리고는 곧장 스미레의 집을 나섰다.

오늘은 스미레도 원고 때문에 바쁜 상황이라 우리 셋만 나왔다.

날씨가 우중충한 관계로 곧장 근처 슈퍼로 가서 우산을 세 개 사서는 거리로 나선다.

"오늘은 어디 갈 거야?"

"뭐, 도쿄 시내나 돌아보자. 새로 나온 만화도 좀 확인하고, 비디오 타이틀도 좀 살펴보고."

"맛있는 것도 먹을 거지? 전에 먹었던 거 뭐시냐, 크림 잔뜩 들어있는 거."

"뭐, 그러자."

"앗싸!"

경희가 특유의 원투펀치를 날리며 좋아한다.

그런데 그때 우리 쪽으로 하얀색의 승합차 한 대가 다가와서는 멈춰 섰다.

"……?"

그런데 운전석과 조수석 문이 동시에 열리고 의외의 인물들이 내린다.

바로 니시다와 키도였다.

"어? 두 사람 여긴 어쩐 일이에요?"

둘이 앙숙처럼 보이던데 이렇게 사이좋게 차를 타고 온 게 신기하게 보여서 물었다.

"젠장, 어쩔 수 없었다."

"왜?"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서는 네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온 거야."

그렇게 말하며 니시다를 힐끔 노려본다.

"아."

"그런데 이거 봉고처럼 생겼네?"

경희의 말에 니시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봉고가 뭡니까?"

"한국 차요. 이거 비슷하게 생긴 거."

"아, 그렇군요. 이건 토요타의 하이에이 스라는 7인용 왜건입니다. 그런데 같이 있던 고토 선생님은요?"

"아, 스미레는 원고 때문에 좀 바빠서 우리만 나왔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일단 차에 타세요."

"어디로 갈 겁니까?"

내 질문에 그가 피식 웃었다.

"저희 집으로 안내 하겠습니다."

"젠장, 우리 집으로 가자니까."

"이미 이분들은 선생님 댁에 몇 번 가셨다면서요."

"그게 뭐 어때서?"

"이번엔 저희 집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키도 선생님 댁은 이제 질리셨을 테니까."

그 말에 키도가 눈을 부라리며 버럭 했다.

"뭐? 질려? 고작 몇 번 간걸로 질리기는 뭘 질려?"

"아무튼 저희 집으로 가시죠."

"젠장, 내 말 무시하는 거냐!"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 집에 가실 거죠?"

니시다가 키도를 외면하고는 곧장 쌍둥이에게 묻자 경희랑 선희가 동시에 대답했다.

"네!"

"네!"

그 모습에 키도가 다시 버럭 했다.

"이런 배신자들!"

"아잉, 키도 오빠."

경희가 키도 앞에서 아양까지 떨고 나서야 표정이 좀 누그러진다.

아무튼 대충 결정이 되자 곧바로 니시다의 승합차를 탔다. 이번에도 키도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니시다 옆자리인 조수석에 탔다.

그러자 니시다가 키도를 보며 인상을 쓰며 말했다.

"거, 어지간하면 뒷자리로 가시죠."

"아까 오면서도 말했잖아. 앞자리 안 앉으면 멀미한다고."

"정말, 평소 차를 많이 모신다면서."

"앞자리니까, 괜찮다고."

"네, 네. 알겠습니다."

한숨을 푹 쉰 니시다가 곧장 승합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계속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은 앞자리에서 계속 투닥거렸다.

"돈도 많으면서 차는 좀 좋을 걸로 사지."

"키도 선생님 차도 별로 고급스럽진 않던데."

"그래도 원 박스 카는 좀 그렇지."

"박스가 몇 개든 상관없잖습니까?"

그때 두 사람 사이에 경희가 머리를 불쑥 밀어 넣으며 끼어들었다.

"그만 싸우시고, 음악이라도 좀 틀어주세요."

"아, 네."

니시다가 곧장 카세트를 꽂아 넣는다.

그리고 음악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전방만 주시하고 있다.

아, 이제야 좀 조용하니까 좋네.

음악도 처음 일본에 왔을 때 들었던 시티팝 종류의 음악이다.

뭐랄까, 느긋하면서도 휴가와 어울리는 듯한 음악.

경희는 음악이 마음에 드는지 머리를 까닥거리며 창밖을 바라본다.

이젠 쌍둥이들도 일본이 익숙해졌는지 도시를 보며 놀라지는 않는다. 아무튼 그렇게 몇 곡의 음악이 흐르는 동안 달리던 승합차가 어느새 주택가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커다란 집 앞에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니시다의 말에 모두 차에서 내리자 곧장 차고 안으로 들어간다. 얼핏 열린 차고 문을 통해 보니, 차가 네 대정도 보인다.

스포츠카, 일반세단, 그리고 지프차와 승합차.

각자 쓰임새에 맞게 종류별로 구입해둔 모양이다.

하긴, 니시다 정도의 인기 만화가라면 이정도야 뭐, 아무것도 아닐 테지..

그나저나 집이 진짜 크다.

우리화실 규모의 서너 배는 가뿐히 넘어갈 것 같다.

여긴 도쿄인근이라 집값도 무지 비쌀텐데.

지금이 85년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가격이 아마도 후덜덜하겠지.

물론 내가 알기론 90년쯤이 부동산가 격의 절정이지 싶은데.

이런 잡생각에 빠져 집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자, 들어가시죠."

차고에서 나온 니시다가 대문을 열며 우리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중년의 여자가 우리를 맞이한다.

누군가 했더니, 가정부아줌마란다.

"간식을 준비해 뒀습니다."

"잘하셨어요."

우리는 가정부아줌마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주택자체가 고급스럽기도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실내가 상당히 넓다.

이제까지 보던 일본식 주택과는 달리 서양식 저택의 느낌에 가깝다.

부엌 근처에 커다란 테이블이 보인다.

그리고 그곳엔 쌍둥이들이 좋아할만한 케이크 종류와 빵이 잔뜩 있다. 특히 경희가 그렇게나 다시 먹고 싶어 하던 파르페도.

"우와, 이거 집에서 다 만든 거예요?"

"아뇨, 몇 가지는 밖에서 사온 겁니다."

"일부러 저희 때문에."

"아니에요."

가정부아줌마가 부엌으로 가고나자 쌍둥이들은 곧장 테이블에 앉는다. 그리고는 니시다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본다.

"네,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

쌍둥이들이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파르페를 퍼먹기 시작한다.

"야, 너희들. 먹는 걸로 경쟁하지 마."

"경쟁 아니야. 이건 본능이지."

"본능은 개뿔."

"오빠도 먹어."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런걸 먹어?"

"밥 배랑, 빵 배는 따로야."

"그게 왜 따로야!"

그렇게 한국말로 우리가 떠들어대자 키도와 니시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아무튼 먹느라 바쁜 쌍둥이는 내버려두고 곧장 우리는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키도는 집안에 들어올 때부터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내내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형은 왜 그래?"

"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집이 불편하신가 보네요."

"자네만큼이야 하겠어?"

"하하하. 그러신가요?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가셔도 되는데."

"그러기 싫은데."

"……."

집안을 둘러보니 확실히 대단하다.

커다란 서재, 검은색의 으리으리한 피아노.

누가 연주 하냐고 물었더니 폼으로 가져다 놓은 거란다.

그 때문에 키도가 낄낄 거렸다.

"그럼 연주도 못하면서 가져다 놓은 거야?"

"내가 연주를 할 필요는 없죠. 가끔 아는 사람들 모일 때 연주자를 부르면 되니까."

"크음."

키도의 심기가 다시 불편해 보인다.

아무튼 이리저리 둘러보다 마지막엔 화실도 들어가 봤다.

화실 자체는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중앙 책상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이어진 여섯 개의 책상.

도구들은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어시가 6명이야?"

"아뇨. 평소엔 4명이고, 바쁠 땐 한두명 더 쓸데도 있으니까요."

"두개는 예비용이군."

"네"

그렇게 집안만 돌아보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쌍둥이들도 간식을 먹을 만큼 먹었는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집안을 둘러본다.

집안에 둔 수많은 만화책, 프라모델, 특히 전대물 관련 프라모델이 상당히 많다.

커다란 방 하나가 완전히 이걸로만 가득 차 있을 정도니까.

유리 장식장 까지 만들어 전시해두니 대형 프라모델 가게처럼 보이기도 한다.

"와, 신기하다. 커다란 장난감 백화점같아."

경희가 감탄해하고, 선희도 프라모델들을 하나하나를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쳐다 본다.

그런데 그 사이에 에스퍼 존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각종 우주선들은 장식장 하나를 따로 차지하며 전시되어 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며 구경하고, 이야기하고, 먹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난 뒤 식탁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그때 가정부아줌마가 놀란 표정으로 식탁 근처에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뉴스 좀 보세요."

그리고는 식탁 앞쪽에 있는 TV를 켠다.

그리고는 채널을 돌리자 갑자기 뉴스속보라는 글자가 보인다.

[JAL 123편 군마 현 부근 추락으로 추정500여명의 탑승 전원 생존여부 불투명.]

갑자기 뉴스에서 여객기가 추락했다는 속보를 보내고 있었다.

재작년에도 한국 KAL기가 소련상공에서 격추되는 사건으로 떠들썩했는데.

그때 가정부아줌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어머니께서 타신 비행기랑 이름이 같지 않아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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