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8화 (48/425)
  • 뜻밖의 기회 (6)

    지로가 먼저 그들을 보고는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그 모습에 다가오던 남자도 웃으며 말한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군요. 날도 추운데.”

    “아뇨, 괜찮습니다. 일단 같이 들어가시죠.”

    “네.”

    지로는 세 사람을 호텔의 5층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예약해둔 창가 자리 쪽으로 갔다.

    쌍둥이 여자애중 한명은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들어오는 내내 실내를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서도 곧장 시내풍경을 내려다보며 정신을 판다.

    “와. 시내가 잘 보여.”

    별달리 높은 층도 아닌데, 요란스럽다.

    하지만 다른 쪽, 그리니까 오늘의 주인공 여자애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아마도 이쪽이 만화를 그렸던 소녀인 모양이었다.

    지로가 쌍둥이들의 오빠인 남자에게 물었다.

    “콘티 작업은 마무리하셨습니까?”

    “아, 네. 선희야.”

    남자의 말에 여자애가 느긋한 동작으로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든 지로가 곧바로 그곳에서 조심스럽게 종이들을 꺼냈다.

    콘티, 일본식으로 말하면 네임이다.

    그런데 콘티치고는 너무 정밀해 보인다.

    “콘티가 아니라 데생 원고 같군요.”

    “네. 맞습니다. 펜선만 입히면 완성이 되는······.”

    “아, 그렇군요.”

    지로가 그림을 확인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인상적인 데생이라는 생각 때문에.

    연필로 그린 그림임에도 그 세세함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여기에 능숙한 펜 터치가 입혀지면 꽤나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다.

    일단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 그림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연출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덕분인지 약간은 어색한 부분이 보인다. 하지만, 그에 반해 캐릭터의 인체 데생은 상당히 뛰어나다.

    요즘 일본에서 유행중인 극화풍의 만화들과 비교해도 비율이 좋다. 물론 전에 완성했던 원고와 데생을 보면서 느끼는 건 확실히 그림이 어둡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면 북두의 권 같은 분위기지만, 선은 깔끔하다.

    어두우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가미된 독특한 느낌이다.

    거기다 데생임에도 배경의 디테일이 높다.

    일반적으로 배경에 강한 만화가들의 특징처럼 빽빽하고 섬세한 타입이라기보다는 마치 그 장소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린 느낌이다.

    그러니까 배경 전체를 머릿속에 두고 그린 것 같다는 거다.

    ‘아키라를 그린 오토모 선생의 그림 같네. 그나저나 한국에도 이런 스타일의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있다니.’

    사실 한국만화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그저, 일본만화를 불법으로 가져다 베껴 그린 만화가 많다는 것 말고는.

    그래서 은근히 한국만화에 대해 얕보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이 아이가 그린 그림은 최근 일본만화계에서도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아키라’의 만화가 오토모 카츠히로처럼 놀라운 구성을 보여준다.

    그림자체로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느낌인데도 오토모의 연출처럼 배경을 모두 이해하고 그린 것 같아 실제로 그 장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사실적이다.

    이만한 배경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공간지각능력이 상당히 뛰어나야만 가능한 걸로 알고 있다. 특히나 여자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자신이 그날 본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것으로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어쨌건 그림만 놓고 보면 현역작가들의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것만은 확실하다.

    지로는 원고너머로 슬쩍 여자애를 바라봤다.

    별다른 표정이 없다.

    아니 오히려 무료해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여자애를 보며 어떻게 저런 여자애가 이런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것인지 놀랍기만 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본다.

    여유가 넘친다.

    보통은 편집자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긴장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은 마치 놀러 나온 사람들처럼 보일정도다.

    따라왔다는 쌍둥이 여자애는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신기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데생원고를 확인했다.

    일단은 내용은 미뤄두고 그림만 확인하는데 마지막 부분에 상상도 못했던 것이 등장했다.

    “······좀비?”

    갑자기 등장하는 좀비 그리고 주인공이 그것들을 마주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내용일까?

    그도 좀비영화나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실제로도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의 밤’을 여러 번 보았을 정도로 팬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직 일본의 경우엔 좀비물이 그렇게 인기가 있는 장르는 아니다. 한국도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좀비물이라니.

    지로는 의아해하면서도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처음부터 다시 원고를 살핀다.

    이번에는 이야기를 확실히 파악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읽기 시작했다.

    한글로 된 원고를 보는 게 약간은 어색하지만 곧 적응을 하고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다.

    ***

    “와, 호텔이라 다르긴 다르다.”

    경희가 레스토랑을 둘러보며 감탄하고 있는 사이 편집자는 선희의 실제 원고의 디테일한 데생과 다름없는 콘티를 살피고 있었다.

    처음엔 그림을 살피는지 장면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살펴보는 것 같더니, 이번엔 처음부터 이야기를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곁에 앉아있는 선희를 보니, 뭔가 무료한 듯 심심한 모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니 당연한 일이다.

    “만화책이라도 봐.”

    “그래도 돼?”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희가 자신의 가방을 열더니 만화책을 꺼낸다.

    평소에도 늘 보던 ‘동몽’이다.

    그렇게 수도 없이 봤으면서도 지겹지 않은 모양인지 또 몰입해 보고 있다.

    최근엔 일본어 공부도 열심히 했는지, 언제부턴가 원어 그 자체로 읽은데 불편함이 없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사줬던 일본어회화 책을 몽땅 외워버린 모양인지, 읽고 쓰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다만 발음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한참동안 원고에 빠져 있던 편집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묘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이거, 20페이지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군요.”

    “네. 단편은 콘티로만 작업했습니다.”

    “아, 그런가요? 혹시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가방을 뒤적거려 단편작업을 한 노트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일본인은 내게 노트를 받자마자 곧바로 읽어가기 시작한다.

    잠시 후 모두 다 읽은 뒤 머리를 들고는 내게 말했다.

    “여운이 남는 단편이군요. 방금 본 데생을 기반으로 예상해보면 상당히 괜찮은 느낌인데요. 그럼 이 단편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겠군요.”

    “아닙니다. 단편으로는 계획한 스토리를 표현하기엔 부족해서, 단편과는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만든 겁니다.”

    단편은 어디까지나 출판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만들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아, 역시 작업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겠군요. 하긴, 이만한 퀄리티의 네임을 갑작스럽게 완성하려해도 꽤나 시간이 걸렸겠는데.”

    “뒷부분 이야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네?”

    일본인 편집자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이며 날 바라본다.

    내가 노트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살짝 놀란 눈을 하더니 곧 노트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동안 노트를 읽어나갔다.

    그 사이 직원이 돈가스를 가지고 왔다.

    테이블 위에 돈가스가 놓이자 경희와 선희는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이럴 땐 정말 나라도 두 녀석들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음식을 대할 때의 모습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호텔에서 돈가스라니, 뭔가 수수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경희와 선희는 생전처음 먹어보는 고급요리라 그런지 한입, 한입 눈을 감고 씹으며 맛을 음미한다.

    특히나 경희는 한입 씹을 때마다 온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한다.

    저렇게나 맛있을까.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감동하며 날 바라본다.

    “역시 따라오길 잘했어. 나 빼놓고 이런 걸 먹었으면 난 평생 한이 맺혔을 거야.”

    “뭘 한 씩이나.”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박한다.

    “아니야, 이정도면 분명 죽을 때 눈물 흘리며 오빠랑 선희 욕까지 할 걸?”

    “그건 심하네.”

    선희도 내말에 동감하는지 돈가스 조각을 씹으며 머리를 끄덕인다.

    “오빠는 이거 먹어봤어?”

    “당연히 수도 없이······.”

    말을 하고는 아차 싶어 멈칫했는데 경희가 빠르게 씹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아하하, 말도 안 돼. 이런 고급요리를 어떻게 수도 없이 먹어? 안 그래?”

    하지만 선희는 말없이 고기만 오물거리면 집중하고 있다. 마치 한순간도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경희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곧 시선을 거두고는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그나저나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이 이런 기분이구나. 호텔 레스토랑에서 멋진 식사라니. 언젠가는 매일 돈가스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먹을 수는 있는데, 엄청 질려버릴걸?”

    “질릴 정도로 먹을 수 있다니, 그만큼 행복한 게 어디 있어?”“음식이 질리는데 행복하겠냐?”

    “돈가스라면 행복할 거야.”

    “아닐걸?”

    내가 뭐라 하건 경희는 마치 구두쇠가 천장에 달린 굴비를 바라보듯 돈가스 한 점 먹고, 창밖을 한번 감상하고 다시 한 점 먹는 것을 반복한다.

    그 사이 편집자는 노트를 다 읽었는지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조용히 덮는다.

    그런 그가 한동안 말없이 노트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굉장한 이야기군요. 그림도 놀랐지만, 이야기 쪽은 솔직히 정말 충격입니다. 하루가 반복된다는 이야기라니 너무 기발하군요.”

    “타임루프 장르에요. 외국에서는 특별하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가요? 저는 익숙하지 않은데. 물론 비슷한 소설은 읽어본 것 같지만 이런 식으로 하루가 계속 반복되는 건 본적이 없어요. 거기다 좀비이야기와 겹치니 정말 흥미진진하네요. 세상이 좀비로 인해 망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영원과도 같은 하루를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라니.”

    뭐, 사실 원작이 일본의 라이트 노벨인 ‘All You Need Is Kill’의 헐리웃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설정과 비슷하니 나로서는 좀 흔한 클리셰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봐야 앞으로 꽤나 먼 미래에나 등장할 내용이긴 하지만.

    어쨌건 일본인 편집자는 흥분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떡하든 이 만화가 저희 소년지에 반드시 실리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일본 편집자가 내게 손을 내밀자 그것을 맞잡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주세요.”

    그런데 그때 경희가 나를 쿡 찌른다.

    “왜?”

    “저기······.”

    경희가 일본인 편집자의 눈치를 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 그릇 더 시켜도 돼?”

    그러자 선희도 눈을 반짝이며 ‘나도’라고 작게 말한다.

    그 모습을 본 편집자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 몇 그릇이든 마음껏 드세요.”

    그의 말에 곧 경희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와, 일본아저씨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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