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7화 (47/425)

뜻밖의 기회 (5)

“그래?”

“좀비 때문에 세상이 멸망한다······라, 그걸 막기 위해 매일 시간이 반복된다는 설정 너무 참신해.”

“타임루프물이라고 시간 속에 갇힌 이야기는 외국에 몇 가지 있어.”

물론 본격적으로 타임루프물이 인기를 얻는 건 몇 년 후다.

거기다 만화라는 장르에선 굉장히 신선한 건 사실이고. 지금의 일본에 먹히려면 이정도의 이야기는 만들어야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거 진짜 충격이야. 같은 시간대를 계속 반복하며 상황을 고칠 때까지 이어진다는 거. 이거 일본에 보낸다는 그 콘티 내용이지?”

“어.”

“역시, 일본에 도전하는 거라 힘 좀 제대로 줬네. 이제까지 네가 쓰던 이야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야. 넌 정말······.”

무슨 괴물을 보는 듯 날 바라본다.

그러더니 곧 표정이 묘해진다.

“그런데······, 이런 흔하지 않은 좀비이야기로 괜찮겠어?”

“형이 보기엔 어떤데?”

“솔직히 난 이런 공포, 멸망 같은 소재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이건 신선한 느낌도 있어서 그런가, 굉장히 재밌네.”

“재밌으면 된 거야.”

“하기야, 재미가 가장 중요하지.”

수긍한다는 듯 박상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보다 이 이야기들을 좀 정리하는 거 어렵네, 도와줄 거지?”

“알았어. 정리라면 뭐.”

그리고는 박상식의 도움을 받아 이야기를 정리해 나갔다.

두 가지 파트로 이야기를 만들어봤다.

첫 번째는 단편으로 여운이 조금 남는 느낌으로, 두 번째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아무래도 단편만을 원할 경우, 첫 번째로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고, 만약 연재 방식을 원하게 되면 그것에 맞는 이야기로 말이다.

전체적인 큰 줄기의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정해놓고, 몇 편 정도의 이야기만을 작업해 보았다.

어느 정도 콘티가 작업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 다시 그것을 선희에게 전달했다.

선희는 이야기를 다 읽어보고는 눈을 빛낸다.

“마음에 들어, 재밌어. 그런데 좀비가 뭐야?”

“살아있는 시체. 음, 이쪽 관련된 책자들이 좀 있으면 좋겠는데, 별로 구할게 없네.”

“대충 설명 좀.”

선희에게 좀비에 대한 설명을 나름 디테일하게 했다. 조금은 리얼한 느낌으로 설명했는데도 별로 눈 깜짝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내 설명을 한참 듣고 나서 몇 가지 스케치를 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음, 이건 그냥 귀신같은 느낌이고. 시체가 살아있다는 그런 느낌으로. 움직임은 이렇게.”

좀비 특유의 움직임과 괴성을 내며 흉내를 내자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본다.

아, 이거. 뭔가 무지 쪽팔리다.

“이정도면 알겠지?”

“조금만 더.”

“아, 알았어.”

기이한 움직임과 괴성을 한 번 더 지른다.

그런 모습을 여전히 뚫어지게 바라본다.

역시 이 짓은 계속 못하겠다.

“됐지?”

“한번······.”

“안 돼!”

“······알았어.”

저 녀석, 어째 실망하는 눈치네.

설마, 날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선희가 곧 그림을 다시 한 장 더 그려 보인다.

제법 끔찍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너무 리얼해서 섬뜩할 정도다.

내가 살던 시절이라면, 나쁘지 않은데, 이 시절엔 좀 위화감이 있을 것 같다.

“너무 진짜 같아서, 사람들이 무서워하겠다. 조금은 만화답게.”

다시 그림을 그려 내게 보여준다.

이번엔 적당히 공포스러우면서도 리얼해 보인다.

“오, 이정도면 꽤 괜찮아 보이네.”

괜찮아 보인다고는 해도 지금 한국의 기준으로 보면 받아들이기 힘든 리얼함이다.

그나마 일본이면 이정도의 만화가 받아들여질 것이다.

1984년이라고 해도 일본의 소년지는 굉장히 개방적일 정도로 폭력이나 성적묘사가 가능한 시기였다. 오히려 이 시기가 2018년보다 더 개방적인 부분도 있었으니까.

퇴마물의 효시격인 ‘공작왕’이 1986년부터 연재되어 엄청나게 인기도 있었으니까.

다만, 준성인지인 ‘영점프’에 연재되긴 했지만.

“대략, 그런 그림으로 그린다 생각하고 데생 시작하면 되겠다.”

“알았어.”

대략적인 콘티를 선희에게 넘겨주자, 원고에 데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아직 경험이 부족한 탓에 캐릭터가 불안정하다. 그렇다면 다른 것으로 약점을 보완하면 된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만화를 보아왔던 나이다.

나름 어린 시절 만화를 그리기도 했었고, 구성이나 연출에 대해서도 꽤나 많이 파고들었었다.

최소한 80년대 초반의 일본만화 정도 이상의 연출력은 만들어낼 자신이 있다. 비록 그림실력이 부족하지만, 그건 선희가 해결할 문제다.

나는 감독이 되었다는 기분으로 선희에게 장면, 장면을 설명하면서 연출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일본만화는 우리와 보는 방향이 반대야. 그러니까 만화를 보는 동선에 따라 캐릭터가 움직여야 해. 이 장면에서는 이 쪽 방향을 보니까, 다음 장면에서는 이렇게,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또 이렇게.”

종이 위에 연필로 시선처리 방향까지 일일이 알려주었다.

그러자 선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려준 대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본적이 없는 수준의 연출이다 보니 쉽지 않은 모양인지 꽤나 고전하는 모습이다.

“아니, 그게 아니지. 이 장면은 아까와는 달라. 아키라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잖아. 자 봐.”

그렇게 말하며 아키라 만화책을 꺼내 선희가 그린 장면과 비슷한 장면을 찾아 비교해준다.

사실, 한때 아키라는 한국의 많은 만화가들이 교과서처럼 사용하던 만화다. 나 역시도 그 때문에 그림에 빠져 있던 시절 아키라를 수도 없이 보고 또 본적이 있다.

그러다보니 몇 장면은 아예 눈에 선 할 정도였다.

아무튼 그것과 비교를 해주자 선희가 곧 이해가 되었는지 그림을 모두 지우고 다시 그려나간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매달렸더니 이젠 내가 좀이 쑤신다.

단순히 지시만 하는 나도 이 정돈데 선희는 내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몇 시간 동안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아이, 천부적인 그림 재능 뒤에 이런 독함이 숨어있었구나.

“조금 쉬었다 하자.”

난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내려가 벌러덩 누워버렸다.

한참 뒤 다시 올라갔는데, 그때도 선희는 내가 말했던 장면을 몇 번이나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며 결국 내가 말한 느낌에 가장 근접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얜 애초에 지루함이나 힘들다는 고통이 없는 건가?

누운 채로 그런 선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다. 대단해.”

***

“흥, 해야지.”

“흥.”

“입으로만 하지 말고, 코에 힘을 주고, 흥!”

“흥!”

“옳지.”

성준희가 어린 아이의 흐르는 콧물을 닦아준다. 그리고 아이 볼을 양손으로 감싸고는 부비적거린다.

“아이고, 우리 이쁜 준모.”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뽀뽀를 하며 웃는다.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어? 갈색머리 언니!”

“······?”

깜짝 놀란 성준희가 쭈그리고 앉은 채 돌아본다.

그리고는 자신을 부른 사람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란다.

“······어? 윤환이 동생······?”

“그래, 나 경희. 전에 봤잖아. 이쪽은 선희고. 우리가 똑같이 생겨서 구분하기 힘들지?”

입을 다물고 있다면 모를까, 저렇게 떠들어대면 당연히 구분하기가 쉽다.

아무튼 경희가 곧 성준희와 같이 있는 꼬마 남자아이를 보며 묘한 표정이 된다.

“······어, 저기······, 이 아이는.”

“동생이야. 늦둥이, 4살.”

“아.”

하마터면 아들이냐고 물어볼 뻔 했다. 얼핏 보면 정말 다정한 모자처럼 보이니까.

어쨌건 아들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낮엔 이렇게 동생을 돌봐야 하거든.”

“아유, 애가 언니랑 닮아서 그런지. 참 미남이네.”

아이가 낯을 가리는지 성준희의 다리에 딱 매달려 몸을 숨긴다. 그런 아이를 성준희가 안아 들고는 경희에게 말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여기 근처 외국 책방에.”

“외국 책방?”

“응. 오빠가 가르쳐준 장손데. 선희가 필요한 책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같이 왔지. 뭐 꼭 용돈을 받아서 하는 건 아니고.”

그러면서 헤헤 거리며 웃는다.

“그런데 언니 집 이 근처야?”

“응, 저기.”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 근처에 보이는 낡은 스레트 지붕의 단층건물이다.

“우리 집에 들렀다 갈래? 지금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도 돼?”

“그럼. 라면 끓여줄까?”

“아니, 내가 맛있는 거 사올게.”

“내가 사올게.”

“어, 그럴래?”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곧 혼자 근처 구멍가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선희의 뒷모습을 보던 경희가 곧 돌아서서 성준희가 안고 있는 아이를 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야?”

“준모야. 성준모.”

성준희가 경희에게 말하자 양손바닥을 탁탁 치더니 팔을 쫙 펼친다.

“자, 이 누나에게 안겨볼래?”

하지만 아이는 성준희에게 꼭 붙어 떨어지려하지 않는다.

“미안, 얘가 낯을 많이 가려서.”

“얘가 아직 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나이라서 그런 거지 뭐.”

“그래, 맞아.”

성준희가 맞장구를 치며 경희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한다.

녹이 잔뜩 끼어 삭아 들어가는 낡은 철 대문을 통과해 들어가자, 페인트칠도 제대로 되지 않은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단 두가구만 사는 형태의 집이다.

대문 근처에 있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간다.

“집이 누추하지?”

“뭐, 우리 집도 비슷한데 뭐.”

집안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사는 모습은 형편없다.

늘 자신이 빈민층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집은 한술 더 뜬다.

조그마한 방은 둘째 치고, 벽지도 반 이상이 떨어져 시멘트벽이 들어난 상태다.

TV는 켜지기나 할지 의문일 정도로 낡아있고,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다.

비싼 햄버거도 사준 일이 있어서, 잘사는 언니라고 생각했는데. 집 모습을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린 모양이다.

그때 먹은 햄버거가 너무 미안해진다.

“자 이쪽으로 와서 앉아. 여기가 제일 따뜻해.”

성준희가 바닥에 깔려 있는 인조 밍크 이불을 살짝 들어 그곳 바닥을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난 괜찮아. 언니랑 준모가 앉아. 그런데, 다른 가족은?”

“아, 엄마는 시내 식당에서 일하셔. 저녁이나 돼야 돌아오실 거야.”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는걸 보면, 묻기가 좀 그렇다.

경희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자자, 준모야. 미녀 누나에게 와 볼래? 자, 이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사탕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여전히 성준희에게 딱 붙어 있던 어린 아이가 곧 호기심을 보이더니 경희에게 다가온다.

“와아, 잡았다. 우리 준모.”

갑자기 경희가 아이를 덮쳐 안아들자 까르르 하며 좋아한다.

그렇게 아이와 친해지며 놀고 있는데 밖에서 선희가 들어온다.

문을 활짝 열어둔 상태라 금방 찾아 들어온 것이다.

그런 선희의 손에 커다란 봉지가 들려있다.

“이거.”

봉지 안에는 과자며, 라면, 그리고 호떡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와, 먹을 거 많이 생겼네. 준모야, 같이 먹자.”

경희가 봉지를 들고 아이에게 소리친다.

***

1월의 한파에 지로가 몸을 떨며 자리에서 팔짝팔짝 뛴다.

호텔 입구에 선채로 시간을 계속 확인한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제법 남았지만, 혹시라도 밖에서 추위에 떨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나와 있는 것이다.

호텔직원이 다가와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말을 하지만, 마음이 급한 그로서는 이게 차라리 속편하다.

“후우.”

입김을 뿜으며 사람들의 인파사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날 자신이 느꼈던 그것.

과연 즉흥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이상한 판단을 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보물을 찾은 것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림에 재능 있는 사람은 흔하다. 단지 짧은 단편정도라면 놀라운 수준의 만화를 보여주는 사람도 간혹 있다.

물론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은 한국이다.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재능 있는 여자아이를 만난 건 참 미묘한 감정이 들게 했다.

자신은 주간지의 편집자다.

주간지는 어쨌건 최소 일주일에 한번은 담당과 만화가가 만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시작 전부터 엄청난 난관만 잔뜩 보인다.

그럼에도 지금 이 설렘은 무엇일까?

마치,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그런 기회를 만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인파사이에서 익숙한 사람들이 보인다.

쌍둥이 여자애들과 남자.

세 남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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