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 소방수 (6)
박상식은 스스로도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던 전상길의 반응이 예상 이상이라 좀 많이 놀란 모양이다.
뭐, 사실은 나도 좀 그렇긴 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거 분량으로 치면 몇 권이야?”
“6권 조금 안될 겁니다.”
“6권이라······, 그렇게 몰입감이 좋았는데 벌써 절반이상을 봐버렸다는 거군. 흐음, 주인공의 과거사 이야기도 제법 흥미롭기는 한데 그보다는 경기가 월등히 재밌어. 어린 시절이지만 결코 어른 스포츠 못지않은 긴박함이나 화끈함도 좋고. 게다가······.”
전상길이 박상식을 바라본다.
“생각보다 콘티가 훌륭해. 구성이 좋아. 솔직히 좀 많이 놀랬다.”
“뭐, 뭘요. 이야기가 재미있으니까 저도 모르게 공을 좀 많이 들인 것뿐이에요.”
“그래. 이야기가 확실히 재미있어. A팀에서 만들었던 만화는 드라마가 주였는데, 스포츠경기만으로 이만한 재미를 줄 수 있다니, 새롭게 배운 것 같다. 어쨌거나 이만하면 꽤 장편으로 만들어도 될 것 같은데.”
담배를 한 모금 더 빨더니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다. 그리고는 다시 우리를 바라본다.
“이거 지금 가져가도 되지?”
“세 번째 노트는 아직 작업 중이니까, 그것만 빼고요.”
“나머지 이야기는 어때?”
“구상은 어느 정도 끝낸 상태라 콘티만 만들면 됩니다. 뒷내용 먼저 확인해야 하나요?”
“아니, 지금 진행자체로도 재미있으니까, 콘티가 완성되면 보도록 하지. 콘티 완성은 언제쯤 될 것 같은데?”
“뭐, 이틀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난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노트를 챙겨든다.
“돈은 콘티가 완성되는 대로 주지, 그리고 일단 권당 28만원씩 쳐줄게. 그리고 시장반응 봐서 좋으면 더 주고. 아, 그리고 그 2차 판권인가 뭔가 하는 계약서도 써주면 되는 거지?”
“네.”
내가 대답하자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쨌든 애썼다. 잘 해줬어.”
“네.”
“아.”
“그리고 이건 고생했으니까,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먹고.”
그렇게 말하며 다시 10만원을 꺼내주고는 쌍화차 가격도 계산한 뒤 밖으로 나간다.
나가는 전상길에게 인사한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박상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전상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잽싸게 전상길이 앉았던 자리로 가서 앉는다.
그리고 날 보며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재미있다는 건 알았지만, 솔직히 좀 불안했는데. 반응 보니까, 이거 기대이상이잖아.”
“그러게.”
나도 솔직히 저양반이 저렇게까지 흥분하며 좋아할 줄은 몰랐다.
이 시절 스포츠만화들이 사실 과장성이 심해, 만들어 놓고 나서도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
“내일 봐, 잘 가.”
“그래, 안녕!”
버스에서 내리고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헤어진 졌다. 그리고 경희가 선희와 함께 집으로 가며 아까 버스에서 못 다한 수다를 이어나갔다.
“······영미 가지고 있는 마이마이 장난 아니잖아. 오토리버스도 된다던데. 라디오도 엄청 잘 잡힌다더라. 우리 집에 있는 건 낡은데다가 안테나까지 부러져서 주파수 잡으려면, 어휴.”
“······.”
그런데 한참을 떠들던 경희가 뭔가를 발견했다.
“선희야 저기.”
경희가 한쪽에 있는 포장마차를 가리킨다.
어묵과 떡볶이, 만두를 파는 곳이다.
“우리 저거 먹자. 나 오늘 아침에 오빠한테 돈 받았지롱.”
그렇게 말하며 천 원짜리 두 장을 슬쩍 슬쩍 보여준다. 그러자 선희도 주머니에서 같은 액수의 돈을 꺼내 보여준다.
“칫, 그럼 그렇지. 나만 준거 아니었구만.”
그렇게 투덜거리더니 선희를 끌고 포장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아줌마, 오뎅 먹을 동안, 군만두 500원어치만 주세요.”
“알았어.”
경희가 어묵이 꽂혀있는 나무 작대기를 들어 올리자 입안으로 가져가 맛있게 배어 문다.
“오후후, 뜨거.”
경희가 호들갑을 떨어대며 머리를 위로 쳐들고는 맛있게 집어 먹는다.
선희도 방금 하나를 집어 먹기 시작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
“어?”
어디 갔나 했더니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먹다말고 거기서 뭐해?”
경희가 머리를 옆으로 쭉 빼서 살펴보니, 하얀색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인다.
선희는 하얀색의 고양이를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더니 자신이 먹던 어묵을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묵을 베어 물더니 맛나게 씹기 시작한다.
“왜, 그걸 고양이를 줘? 아깝게.”
“······얘가 먹고 싶다고 했어.”
“아, 그랬니?”
경희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선희의 저런 모습이야 평생을 보아왔으니 특별할 건 없다.
어린 시절부터 이상한 질문을 잔뜩 한다거나, 혹은 동물과 대화를 하는 등, 뭐 대부분 혼자 중얼거리는 것일 테지만.
어쨌건 선희에겐 하얀 고양이가 불쌍해보였나 보다.
그나저나 길고양이 치고는 깔끔한 털이다. 마치 사람 손에 잘 관리된 느낌이랄까. 어떻게 보면 일반 고양이와는 다른 고급스러운 느낌도 든다. 거기다 다른 고양이들처럼 사람을 크게 경계하지도 않는 것 같다.
선희가 쪼그려 앉은 채로 자신이 내민 어묵을 먹고 있는 고양이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얘, 나랑 친구가 되고 싶대.”
“오, 그래? 그럼 친구하면 되겠네.”
“그래.”
선희가 시선을 고양이에게 고정시킨 채로 머리를 끄덕인다.
“나비가 참 예쁘네.”
“이름은 백설기.”
“백설기? 아, 귀여운 이름이다. 하얀색이라 그렇게 지은거야?”
“응, 원래 이름은······, 포비 지노비어. 하지만 난 그냥 백설기가 좋아.”
“포비 지노비어?”
“응.”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계속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포비 지노비어라, 멋진 이름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녀의 상상 속에서 나온 이름일 것이다.
선희의 모습을 보던 경희의 표정이 씁쓸하다.
언제까지라도 자신이 이런 선희의 곁을 지켜줄 거라고 속으로 다짐한다.
냐아앙.
“만두? 알았어.”
선희가 만두 하나를 내밀자 고양이가 냅다 받아먹는다.
“야, 만두는 좀 참지. 이거 내가 사는 건데.”
“······.”
경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선희는 고양이에게 만두를 먹일 뿐이었다.
***
나머지 콘티가 모두 완성된 건 전상길과 약속했던 이틀 후였다.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했더니 화실로 가져오라는 모양이다.
“뭐야? 이젠 밖에서 안 만나나?”
“몰라, A팀으로 직접 가져오라는 걸 보니 괜찮은가 보네.”
“그러게. 별일이네.”
그냥 별 생각 없이 A팀 화실로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특유의 뿌연 담배연기가 실내에 가득하다.
진짜, 골초인간들. 이런 거 어떻게 안 되나?
반사적으로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작업 중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쏠린다.
그리고 얼핏 스토리작가가 있던 곳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응? 어디 갔나?
그런데 자리가 완전히 비어있다.
책상위에 있던 책이나 작업 중이던 노트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
아, 잘린 건가?
아니면 그만둔 건지도.
뭔가 씁쓸한 뒷맛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세계는 어차피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곳, 어설프게 남을 동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본인이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
그때 들어온 우리를 발견한 전상길이 작업을 중단하고 손을 끄덕이며 말했다.
“어, 어서와. 그래 완성한 건 가져왔지?”
“아, 네.”
박상식이 들고 온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안에서 노트 세권을 꺼내 그것을 전상길에게 내밀었다.
그의 자리 곁에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한사람은 이쪽 A팀 데생맨이고, 다른 한명은 B팀 대장인 추양구다.
이 사람 여기서 뭐하지? 한창 바쁠 시간 아닌가?
앞전에 넘겨준 B팀 스토리 작업이 벌써 끝났을 리는 없는데.
하지만 그냥 놀러왔을 수도 있으니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그런데 아까부터 화실 사람들이 계속 우리를 힐끔거린다.
특히 전상길의 곁에 있던 두 사람은 박상식이 건넨 노트에 관심이 많은지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어 있다.
“소파에 잠시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전상길의 말에 우리는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곧바로 여직원이 평소처럼 우리에게 커피를 가져다준다.
커피를 홀짝이며 넌지시 전상길의 자리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전상길은 박상식이 넘긴 콘티 노트를 어느새 펼쳐 열심히 읽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런 그의 곁에서 가만히 앉아 그를 봤다가 다시 우리 쪽을 번갈아 본다.
뭐지, 이분위기?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에 왔을 때와 상당히 다른 분위기다.
잠시 후 전상길이 첫 번째 콘티 노트를 내려놓자 곧바로 추양구가 그것을 집어 든다. 곁에 있던 데생맨도 추양구와 같이 노트를 쳐다본다.
왜 저러지?
그런데 두 사람이 평소 원고, 혹은 콘티를 대할 때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다.
이건, 마치······ 그냥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화책을 보고 있을 때와 비슷하달까.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그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사이 어느새 마지막 노트를 덮는다. 그러자 곁에 있던 두 사람이 잽싸게 그것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전상길이 입맛을 다시더니 곧 우리 쪽으로 다가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대뜸 말한다.
“너무 짧은데.”
뭔 소리지?
“10권 분량 맞는데요.”
내 말에 전상길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맞아. 10권이지. 그런데 너무 짧게 느껴져서 그래. 혹시 이거 속편은 계획 중인가?”
“아뇨. 임시라고 생각해서 거기까지만 만들었는데.”
사실은 속편에 대한 건 염두에 두고 있지만, 아닐 수도 있었으니 살짝 발을 뺀 것이다.
“뭐 이렇게 끝난다고?”
“네.”
“그건 안 되지. 이렇게 끝나버리면.”
그가 격하게 반응하더니 곧바로 자세를 바로하며 턱을 긁적거린다.
“중학생들 주제에 명문 고등학교 아이들과 맞먹는 게임이라······. 이건 이거대로 굉장한 마무리기는 하지만, 역시 속편이 안 나온다면 욕을 좀 먹을 것 같은데.”
“누구한테요?”
“누구긴, 독자들이지.”
“그런가요?”
“내 생각엔 그래. 그리고 박상식.”
“네.”
박상식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자네 콘티가 상당히 느낌이 좋아. 이제부턴 콘티까지 맡아줬으면 좋겠어.”
“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부탁이 있는데.”
아직 정신없이 콘티노트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잠시 돌아보더니 입에 담배를 새롭게 물며 불을 붙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속편이 나와야 할 작품이야. 이거 속편 꼭 좀 만들어 줘.”
“속편······이라면 계속 만들라는 건가요?”
“그래. 지금 경영의 왕으로 바쁜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꼭 좀 부탁하자. 이걸로 A팀 앞으로 들어갈 만화를 만들고 싶거든.”
그 말에 박상식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A팀이랑 B팀 모든 스토리를 하라고요?”
박상식의 물음에 전상길이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두 팀 다 말이야. 계속 하라는 건 아니고, 조만간 새로운 스토리작가를 데려올 거니까, 그때까지만 이라도. 어때?”
그 말에 박상식이 나를 돌아본다.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곧 박상식에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원고료는······.”
“아, 그건 섭섭하지 않게 해줄게. 전에도 말했지만 반응이 좋으면 더 추가해서 주고. 그리고 오늘 완성된 원고료는 조금 있다가 받아가도록 해. 아, 그거, 계약서 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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