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29화 (29/425)
  • 특급 소방수 (5)

    그 이후로 한참동안 구상했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전체적인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박상식이 흥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야, 축구가 이렇게 재밌는 건지 정말 몰랐다. 국가대표 경기는 가끔 봤지만, 그거야 이기는 게 중요했지, 별로 내용엔 신경 쓴 일이 없었는데. 네 이야기 속에선 그 장면, 장면이 그야말로 영화 같다. 아니, 영화로도 축구를 이렇게 표현하기는 힘들 거야.”

    나도 솔직히 내가 만들고 있지만, 이렇게 재밌는 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경기규칙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수준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너 상당히 많이 알고 있네? 축구 관계자를 만나 조사라도 미리 한 거냐?”

    “뭐?”

    “그렇잖아. 경기장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감독들 사이에서 일어난 신경전, 거기다 학교의 특성이 어쩌고 하는 거 말이야.”

    어?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네.

    내가 축구만화를 오지게 많이 본 것도 사실이고,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디테일한 것까지 알고 있었나?

    아니, 그보다 시대도 잘 맞추어져 있다.

    당시 중고등학교 운동부에 대한 이야기도 생각이상의 디테일이다.

    으음, 무슨 일이지?

    흥에 겨워 신나게 말하고 생각해보니 이상한 게 많다.

    어째 혼란스럽다.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과거로 오면서 지식에도 변화가 조금 있었거나, 아니면······, 역시 그 고양이 녀석 때문인가?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 결국 그 녀석이 원인이 아닐까?

    “그런데 말이야. 경기의 내용 길이 말인데······.”

    박상식이 턱을 긁적이며 묘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때서야 나도 정신이 번쩍 든다.

    “그게 왜?”

    “이거 경기가 너무 박진감 있어서, 경기가 너무 짧으니까, 좀 아쉽다는 말이지.”

    “뭐, 어쩔 수 없지. 처음부터 10권 안에서 마무리 할 생각으로 구상한 거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박상식은 여전히 아쉽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결국 납득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난 반대로 방금 박상식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경기가 너무 짧다고 느꼈다는 부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때문에 다시 고민에 빠진다.

    박상식은 이런 내 모습 때문에 잠시 말을 멈추고 날 지켜만 보았다. 평소에도 가끔 이렇게 생각에 잠기면 그는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아무 말 없이 그냥 보기만 한다.

    아무튼 경기의 내용을 디테일하게 진행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만약 박상식의 말대로 경기의 내용을 늘이게 된다면 10권 안에 넣을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적이다.

    초반 도입부 배경설명이 되는 이야기와 축구와의 인연, 그리고 경기 한번이면 끝나버릴 것이다.

    어떡하지?

    하지만 그 생각에 대한 결정은 의외로 쉽게 내렸다.

    “그럼, 형 말대로 경기부분을 늘리자.”

    내 말에 박상식이 화들짝 놀랐다.

    “어? 정말로? 그럼 뒷얘기는?”

    “과감하게 삭제.”

    “그래도 돼?”

    “뭐, 중요한건 이야기의 분량이 아니라 재미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10권이나 되는 분량으로 그렇게 끝내버리면 좀 그렇지 않나?”

    박상식의 걱정은 당연한 거다.

    대본소용 만화 중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경기만 줄곧 나오며 끝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하지만, 대본소를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이런 만화는 충분히 많이 있다.

    이 시절엔 드물지만 앞으로는 이런 스포츠만화가 득세할 것이기도 하고.

    81년부터 86년까지 연재한, 아, 그러니까 지금 한참 연재중인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터치’도 야구가 소재이긴 하지만 실제론 연애물이다. 그럼에도 야구장면은 생각보다 길게 나온다.

    아, 그러고 보니 터치가 나오면서 그동안 열혈스타일의 스포츠물이 득세하던 판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긴 했지.

    그런 사실 따위야 지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그냥 여운을 주고 끝내도 괜찮지 뭐.”

    “10권이라는 기준이 애매하긴 하네.”

    “그래도 얼마 전에 비하면 양반이지. 그땐 서너 권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으니까.”

    “그건 그래.”

    “일본에선 인기 스포츠만화의 경우 초 장편으로 연재되는 경우가 많아서 경기가 길게 나오는 것이 문제는 아니지.”

    “일본만화에서는 그게 흔해?”

    “그래. 거기다 그쪽은 연재잖아. 경기 하나로 몇 달을 보내는 건 흔한 일이야.”

    “몇 달? 하긴, 보물성에 연재중인 축구만화도 재미있는 건 한 경기가 보통 서너 달은 기본이니까.”

    “그쪽은 주간지가 그렇다고, 월간지로 스포츠 만화 그리면 경기하나에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

    그 말에 박상식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는다.

    “만화 보다가 세월 다가겠네. 몇 경기 보면 그냥 늙어버리겠다.”

    사실, 앞으로 일본에서는 그런 만화들이 종종 나온다.

    굳이 스포츠가 아니더라도 죽을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인기 만화들이 말이다.

    “그런데 요즘 일본에서 인기 있는 축구 만화는 혹시 알고 있냐?”

    “보자, 지금은······, 역시 원탑은 캡틴 츠바사지.”

    역시 1983년이라는 기준을 염두에 두고 떠올려야하는 건 좀 귀찮긴 하다.

    “원탑?”

    “아, 뭐 제일 인기 있는 작품. 아무튼 그게 캡틴 츠바사라고.”

    “캡틴 츠바사? 그게 지금 일본 최고의 축구만화라는 거구나. 그런데 그런 건 또 어떻게 아는 거냐?”

    그가 궁금한 눈빛을 보내지만,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냥 웃고 넘길 뿐이었다.

    “아무튼 이런 식이면 100페이지짜리 책 10권이라도 그리 어렵지는 않겠다. 축구 쪽은 나도 콘티가 어려워서 다른 만화를 좀 참고 해야 되겠어.”

    박상식이 의욕에 넘치는지 히죽거리며 말한다.

    “그나저나, 난 무지하게 재미있는데, 전 선생님이 뭐라고 하실지 모르겠다.”

    나도 그건 걱정이 되긴 한다. 그래도 뭐 상관없다.

    “뭐, 안되면 손 털면 되는 거고.”

    내 말에 박상식도 피식 웃었다.

    “하긴, 우리야. 뭐. B팀에 남아도 되는 거니까.”

    난 B팀에 남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물론, A팀이 최종목적지도 아니다.

    어느 순간 스토리작가라는 일의 매력에 빠진 이상 이렇게 한 사람의 작가와만 세월만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동안 별 생각 없이 그냥 돈이 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이젠 나름 포부가 생긴 것이다. 물론, 좀 뜬금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

    드디어 전상길이 부탁한 3일째가 되었다.

    하지만 정확히 만날 장소와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다.

    아침을 먹자마자 아래층 박상식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째 이 인간 상태가 좀 이상하다.

    박상식은 도대체 밤새 뭘 한 건지 눈이 퀭해 있다.

    바닥에 널려있는 만화책들과 노트들을 보니 알만하다.

    “뭐야? 콘티 작업하느라 한숨도 못 잔거야?”

    “한 시간 좀 넘게 자긴 했지.”

    “그럼 안 잔거네.”

    “아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가 봐도 박상식의 모습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어이구 미련하기는. 적당히 하라고.”

    “아, 뭐. 욕심이 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욕심이라니.”

    “으응. 그게 장면이 너무 멋진 게 많아서 대충 콘티를 만들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이래저래 수정을 하다보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어.”

    “뭔데?”

    “6권 분량밖에 작업하지 못했다.”

    퀭한 눈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잊어버렸어? 완성하지 않아도 되는 거?”

    “뭐?”

    “처음부터 선생님이 요구한 건 대략적인 스토리정도가 전부였어. 그것을 그냥 콘티로 작업해보자는 의미지. 그걸 다 완성시키자는 뜻은 아니었어.”

    “······아, 그런가?”

    그제야 전상길이 했던 말을 떠올렸는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우’라고 중얼거리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아이고, 이런 미련한 사람.”

    “뭐, 어쩔 수 없지. 사실, 그러거나 내가 열정에 못 이겨 이 짓을 한 것도 있으니까.”

    하기야, 박상식의 기질이라면 그렇겠지.

    아무튼 그도 지금 상황이 웃긴지 피식거린다.

    *

    오후가 되자 전상길에게서 연락이 왔다.

    “뭐래?”

    박상식이 전화를 끊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오후 4시, 전에 만났던 그 다방에서 만나잖다.”

    역시 이번에도 화실 밖이구나.

    시간을 보니 조금 여유가 있다.

    “그래? 그럼 나 옷 갈아입고 나올게.”

    “어.”

    잠시 후, 같이 집을 나섰다.

    그리고 3시 40분에 다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일부러 늦게 오는 것도 별로 좋은 건 아니라 일부러 조금 일찍 갔다.

    박상식이 제법 긴장이 되는지 오른다리를 달달 떨어댄다.

    “그만해. 복 나간다.”

    “아, 미안.”

    자신의 두 손으로 달달거리는 다리를 콱 붙든다.

    그런데 다리 떠는 걸 멈추더니 이번엔 쉴 새 없이 입술을 핥아댄다.

    괜히 더 정신만 사납다. 그냥 놔두는 게 나을 것 같다.

    4시 10분쯤 되자 다방 전상길이 다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주변을 살짝 둘러보더니 우리를 발견하고는 살짝 손을 들어 올리고는 웃으며 다가온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그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평상시처럼 그가 쌍화차를 주문하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를 바라본다.

    “그거야?”

    “아, 네. 여기요.”

    박상식이 서류봉투를 들어 건네자 그가 받아들고는 안에 있던 노트를 꺼낸다.

    모두 세권의 노트.

    “어? 왜 이리 많어?”

    그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1’이라고 적혀있는 첫 번째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가 첫 장을 넘기더니 멈칫하더니 머리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콘티로 만든 거야?”

    “네.”

    “그냥 스토리만 써와도 되는데······.”

    뭔가 살짝 아쉽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애초에 콘티 따위는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곧 별로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노트의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콘티 방식이다 보니 그림은 대충 보며 대사를 확인하는 지 넘기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그래도 제법 콘티가 잘 만들어졌네. 간단하지만 그림도 그런대로 괜찮고.”

    그래도 대충이긴 하지만 그림에 대해 짧은 감상평정도는 던진다.

    크로키 식 그림이긴 하지만, 박상식도 과거엔 문하생 출신이었고, 나름 만화가를 목표로 했었던 만큼 기본 실력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콘티의 완성도가 높아 생각보다 몰입도가 높을 것이다.

    아무튼 고개를 가끔씩 끄덕이며 별다른 표정 없이 콘티를 넘겨가던 그의 표정이 바뀐 건 금방이었다.

    “······.”

    무슨 장면을 본 것일까.

    눈이 살짝 가늘어진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앉아있던 자세를 바꾸었다.

    소파에 기대어 느긋하게 넘기고 있던 그의 몸이 앞으로 쏠린 것이다.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인다.

    “후우.”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콘티에 열중에 들어갔다.

    얼핏 보면 만화방에 들어와 만화책에 몰두하는 아저씨 같은 느낌이다.

    어느 순간 첫 번째 노트를 내려두고, 두 번째 노트를 집어 든다. 그리고 그것도 그리 오래지 않아 세 번째 노트까지.

    바쁘게 콘티를 넘어가던 그의 순이 어느 순간 멈칫했다.

    넘어간 분량을 보니, 대충 작업이 끝난 지점이었다.

    그가 노트를 잠시 바라보다 곧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어느새 다 피워버린 담배를 비벼 끄더니 다시 새로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후우.”

    전상길이 미간에 힘을 주며 묘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본다.

    “이거, 물건인데?”

    그 말에 박상식이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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