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 소방수 (1) <1권 끝>
“아야.”
아침밥을 먹다, 발가락에 따끔거렸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발톱 한쪽 끝이 갈라져있다.
“아 씨, 아프네.”
묘하게 거슬리는 아픔에 살짝 투덜거리고는 손톱깎이를 찾았다.
하지만 방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엄마나 누나가 있었다면 째깍 찾아줬을 테지만.
음, 하다못해 휴대폰이라도 있는 시절이라면 물어볼 수나 있을 텐데.
그렇다고 사러가자니 멀어서 귀찮고.
다락방에 있으려나?
아, 그래도 다 큰 여자애들 방인데 괜히 물건 뒤지는 것 같아, 좀 그렇긴 하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기적거리다 발톱이 너무 신경 쓰여 ‘에라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고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쌍둥이들이 공부방으로 사용하는 둘만의 장소.
하지만 조그만 창문이 있고, 높이는 겨우 1미터 남짓, 폭은 양팔을 뻗으면 다일 듯 말 듯 한데다가 길이도 2미터쯤 되려나?
그리 크지 않은 이 공간에서 자그마한 밥상이 두 개 있다. 아마도 저것이 책상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좁은 공간을 두 녀석들이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째 마음이 짠하다.
그래도 여자애들이라 그런지 벽엔 유명 연예인 사진이 몇 장 붙어있고, 더불어······, 어? 만화네?
놀랍게도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상당히 붙어있다.
강인한 인상의 남자와 유려한 느낌의 여자 일러스트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제법 그럴듯하게 그려져 있다. 물론, 만화가들이 사용하는 펜이 아닌 볼펜으로 그려진 그림이긴 하지만, 펜처럼 선의 강약을 표현하기 위해 볼펜을 여러 겹으로 사용한 꼼꼼함도 보인다.
그보다 더 대단한건 바이크나 자동차의 세세한 디테일, 거기다 입체감을 위해 그림자, 잔선의 효과가 상당한 수준이다. 그래서 입체감이 놀라울 정도다.
물론 그런 세밀한 부분까지 베낀 거라면 나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누가 그린 그림일까?
설마 경희나 선희가 그린 그림을 아닐 테고, 대단한 그림실력을 가진 사람에게서 얻어온 그림일까?
문득 그림을 그린 장본인에 대한 궁금함이 생겼다.
뭐, 그래봐야 덕후로서의 단순한 호기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한두 명쯤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저녁에 쌍둥이들이 돌아왔을 때 경희에게 물어봤다.
“다락방 벽에 만화그림이 붙어있던데.”
“아, 진짜. 오빠 우리 방에 갔었어?”
“시끄럽고, 누가 그린 건지나 말해봐.”
나의 강압적인 태도에 ‘으익’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뱉더니 곧바로 머리를 끄덕인다.
“당연히 선희가 그렸지.”
“선희가?”
“응. 좋아하는 만화를 볼펜으로 그린 거야. 선희,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거 엄청 좋아했잖아. 몰라?”
“벽에 있는 그림 전부를 선희가 그렸다고?”
“그럼. 벽에 붙어 있는 거 말고도 걔 자리에 가보면 그림이 수백 장이야.”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수백 장이라니.
“어디서 그리는데.”
“당연히 집에서 그리지. 이상한 질문이네.”
“매일?”
“어.”
“친구 중에 만화방 집 딸내미라도 있냐? 집에 만화책이라고는 보물성 한권밖에 없는데.”
“가끔 정미 집에 가서 만화책을 보고 오긴 해.”
“······보고 온다고?”
“어.”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그냥 보고 온다고?
“빌려와서 그림을 보고 그리는 거 아니고?”
내 질문에 경희가 한숨을 푹 쉬더니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손바닥을 짝짝 거리며 잘 들으라는 듯 말한다.
“자, 귀를 잘 열고 들어봐요, 오라버니야. 정미 집에서 그냥 만화책을 보고 온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집에 와서 그걸 그린다고.”
“······?”
“아, 답답해.”
경희가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친다.
그때 선희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방으로 들어오더니 나와 경희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난 반사적으로 선희의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경희를 돌아본다.
“그림을 그냥 외워서 그린다는 거냐?”
“아이구야, 이제야 이해하셨네.”
“그게 정말이야?”
“······.”
잠시 멍해진 경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나를 툭 밀친다.
“비켜, 나 올라가서 옷 갈아입어야 돼. 답답한 오라비랑 대화하다 속 터져 죽겄어.”
그렇게 말하며 경희도 다락방으로 올라가려하자 내가 반사적으로 손을 콱 붙잡았다.
“옴마야! 왜 그래?”
“정말로 그림을 통째로 외운다고?”
“아고고고. 오빠 땜에 손목에 손자국 났잖아.”
“빨리 말해봐.”
“당연한 얘기를 자꾸 왜 물어? 선희 어릴 적부터 특기잖아. 모조리 외워버리는 거.”
“······?”
“그러니까 눈으로 본 건 그대로 그려내는 습성 말이야. 그래서 선희 성적이 수학 빼고는 거의 만점이잖아.”
“······.”
이거 어디선가 들었던 내용 같은데.
뭐였더라?
아, 맞다.
“서번트 증후군!”
“뭐?”
“혹시 서번트 증후군이냐?”
“어? 그게 뭔데?”
아, 선희가 자폐증이 있다고 하기엔 좀 그렇긴 하다.
말수가 적고, 약간 4차원적인 구석이 있긴 해도 평범한 아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진처럼 기억할 정도의 기억력은 서번트 증후군에서 많이 보이는 증상 같은 거라고 들었다. 물론 일반인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고.
그냥 서번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아무튼 특별한 능력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희는 이번 고입선발고사는 문제없어. 선생님들도 수업시간에 선희가 그림 그리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 안 쓰셔. 뭘 물어도 척척 다 대답하거든.”
“······.”
“선희는 좋겠다! 고입선발 따위 단번에 통과! 선희는 저엉말 좋겠다!”
“······.”
이거 집에 괴물이 살고 있었구나.
정말 저런 능력을 만화에만 응용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완전 사기캐인데.
아.
만화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시험을 코앞에 두고 꺼내기엔 부담스럽다.
그래 일단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한번 넌지시 물어나 보자.
한편으로는 이것만으로 절대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그림을 외우기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단순히 일러스트를 그리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거는 그거대로 취향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굳이 맞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건 본인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도 불행이 되기 때문이다.
*
며칠 뒤, B팀 작업실을 찾았다.
이번에도 전상길이 우리를 찾아서다.
그가 작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면 평소처럼 우리를 부를 것이다.
우리가 소파에서 기다리는 동안, B팀에서는 신작 ‘경영의 왕’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추양구는 우리가 넘긴 스토리를 기반으로 이미 콘티를 완성한 상태.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데생작업에 돌입하고 있었다.
데생이라고는 해도 거의 크로키 수준.
거기다 간략히 칸을 나누어 그곳에 대사용 말 칸을 만들고는 곧바로 옆 사람에게 넘긴다.
그러자 곧 데생맨들이 그것을 이어받아 연필로 데생을 시작한다. 확실히 이쪽 업계에서는 유명한 사람들이라더니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늘 대본소 만화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생각을 자주 해오고 있었지만, 지금 작업속도를 생각하면 그만한 퀄리티도 대단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공장 식 대본소 만화를 비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시절의 만화가들에게 선택의 길이 많이 없었다는 건 어쨌건 인정해야 할 일이었다.
아직 연재시장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거의 대부분의 시장이 대본소에 집중되어 있던 상황에서 그것을 무시하고 작가 정신을 발휘해 만화를 만들어 갈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에이, 이런 생각은 관두자.
지금은 그저 이 시장에 맞게 적응하는 것이 우선일 뿐이다.
슥슥슥
데생맨들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빈칸 속에 대략적인 음영과 말 칸만 있는 연필 그림위에 디테일한 데생이 입혀지고 다시 그것이 옆에 있는 인물 펜터치맨에게 넘겨진다.
얼굴을 그리고, 다시 다름 사람으로 넘겨져 이번엔 몸통그림이 그려진다.
그렇게 단계를 넘어가며 작업이 완성되어가는 일련의 모습이 공장의 숙련자들 모습 같다.
박상식과 내가 만든 이야기라 그런지, 그림으로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그때 위층에서 전령이 내려왔다.
늘 오던 직원이 찾아오다보니 박상식과 난 그를 전령이라 부르고 있었다.
아무튼 그 전령이 평소처럼 우리를 찾는다.
그리고 던지는 대사도 늘 한결같다.
“선생님이 찾으세요.”
한번에 20권 분량의 작업을 끝내는 바람에 두어 달 이상은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부른 걸까.
어쨌건 우리는 전령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A팀 작업실로 들어가자마자 전상길이 우리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든다.
“여, 반가운 친구들. 이리로 와, 어서.”
우리가 인사를 하며 그에게 다가갔더니, 자신의 곁에 앉아있는 사람을 소개시켜준다.
얼핏 보니 2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갸름한 스타일의 남자였다.
“자네들 ‘폭풍의 베이스’ 알지?”
그의 질문에 박상식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지금 한국에서 최고 인기 있는 스포츠만화 중 하나잖아요. 그런데 왜요?”
“여기 있는 이 친구가 그거 스토리작가야.”
“네? 진짜요?”
“······!”
박상식도 놀랐지만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폭풍의 베이스’는 지옥의 외인구단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엄청난 인기를 얻은 만화다.
당연히 나도 그 만화를 읽었고.
천재 야구선수 ‘하강철’이 미친 듯한 구속의 마구를 무기로 프로야구를 석권한다는 이야기인데, 당시 이 만화의 인기가 엄청났다고 하는 글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아무튼 우리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박상식과 내가 번갈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전상길이 남자를 가리키며 우리에게 말한다.
“지금 가장 잘나가는 스토리작가, 이름은 김인기. 이름 그대로 인기가 최고야.”
“아, 진짜. 이름 갖고 장난치지 말라니까.”
“킥킥. 나도 그러고 싶은데 순발력이 타고나서.”
“순발력은 무슨.”
나도 김인기라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얼굴이 알려진 사람은 아니라 정확한 얼굴은 몰랐지만, 그가 김주석의 작품인 ‘폭풍의 베이스’와 ‘숏 스텝’의 스토리를 썼다는 건 너무나 유명한 일이었다.
물론 숏 스텝 같은 경우엔 아직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김주석 식 처절한 만화의 대표 격인 두 작품의 스토리를 쓴 사람이다.
그나저나 처절한 작품에 비해 굉장히 인상이 밝다.
“너무 띄우지 마요. 완전히 혼자 만든 것도 아니고. 김 선생님이랑 같이 포장마차에서 이야기하다가 의기투합해서 만들어진 건데.”
“그래도 자네가 이야기를 만든 건 맞잖아.”
“김 선생님이 캐릭터를 잘 살린 것도 있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신을 낮춰? 평소답지 않게.”
그 말에 김인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곧 우리를 향해 돌아본다.
“아, 이번 작품 스토리 봤어요. 정말 대단하던데, 두 분 이서 며칠 만에 완성하셨다면서요?”
“저보다 이친구의 재능이 컸어요. 세세한 디테일의 이야기를 모두 짧은 시간에 완성한 것도 이 친구 덕분이에요.”
박상식이 웃으며 나에게 손짓하며 말한다. 그러자 김인기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상상력도 그렇지만, 속도가 정말 부러워요. 퀄리티도 좋고. 시작하신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전 2년 정도고, 이 친구는 앞전에 두 작품 같이 했던 게 처음이었어요. 굳이 따지면 한 달 쯤 넘었나?”
“와, 재능이 대단하네요.”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다 곧 김인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작업실에서 계속 대화를 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때문에 전상길이 김인기를 붙잡았다.
“다음에 우리 작품도 하나 써 줄 거지? 나도 김주석 만화가처럼 출세작 한번 내 보고 싶어.”
“왜 그러세요. 그거 운이 좋았다니까. 그리고 이것 좀 놓고.”
“짜식이 까탈스럽긴. 아무튼 언제 한번 술 한 잔 하자.”
“알았어요. 그리고 이분들이랑 밖에서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은데, 괜찮죠?”
그 말에 전상길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너 때문에 부른건데. 그리고 이 친구들 프리랜서야. 내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
아무 때나 부르는 주제에 뭔 소리인지.
“같이 나가서 커피나 마시면서 이야기 하시면 어때요?”
“저야, 영광이죠. 넌 어때?”
박상식이 나를 돌아보며 묻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괜찮아요.”
“좋아요. 그럼 같이 나갑시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전상길에게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간다.
박상식과 나는 김인기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A팀 사무실 문을 닫고 나가는데, 사무실 복도 끝 화장실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스토리작가? 존나 우스워서. 글자조금 끄적거려놓고 너무 많은 돈 받는 거 아니야?”
“이야기가 끝없이 나오겠어? 한두 개 쓰고 나면 이야기도 더 못쓴다더라. 저거 좋아보여도 한철 장사야. 너무 부러워할 거 없어. 전에 있던 스토리 쓰는 애 기억 안나? 딱 두 작품하고 쫓겨났잖아. 지금 걔, 일거리가 없어서 그냥 날건달생활 하고 있다더라.”
그 이야기를 들은 김인기와 박상식의 표정이 굳었다. 나 역시도 별로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화장실에 나오다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곧 자기들 스스로도 무안한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A팀 작업실로 후다닥 들어가 버린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김인기가 우리를 보며 쓰게 웃었다.
“지금 만화계에서 스토리작가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에요. 웃기는 일이죠.”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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