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공장 (6)
며칠 후, 이야기가 모두 마무리 되었다.
스토리 노트에 상황이랑 구체적인 이야기를 모두 써 두었고, 대략적으로 10권 분량정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5권이 될지 10권이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는 콘티작업이 끝나야 알 수 있다.
원래라면 박상식이 직접 콘티작업을 하려고 했었는데, B팀의 리더인 추양구가 그것을 거부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그 쪽은 그냥 스토리에만 전념해주시면 좋겠는데.”
박상식도 전혀 예상 못한 상황이라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
“······그래도 대충 정도는.”
“괜찮아요. 이런 작업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아, 네.”
어쨌거나 덕분에 콘티작업 시간은 아낄 수 있었다.
“일이 줄어들었으니까, 좋은 일이잖아.”
“그건 그런데, 어쩐지 좀 그래.”
“뭐가?”
“뭐랄까, 내 손을 거치지 않으니까, 너랑 대화할 때의 그 느낌이 살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런 것까지야 바랄 수 있나. 거기다 저 양반들 방식이라는데 어쩔 수 없는 거지.”
“그야 그렇지, 그리고 어쩌면 더 좋은 느낌으로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원래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으니까.”
그래도 좀 아쉬운 모양이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우리는 필요한 만큼의 스토리만 써주면 된다. 그 다음은 전적으로 추양구, 아니 B팀 전체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추양구가 노트 속에 있는 이야기를 천천히 살폈다. 한참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노트를 살피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노트를 든 채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박상식이 내게 말했다.
“······어디 가는 거지?”
“글쎄?”
설마 저걸 들고 화장실에 간 건 아니겠지.
그런데 잠시 후 B팀 화실에 누군가 들어와서는 이리저리 두리번 거린다.
B팀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그런데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두 분 위층으로 올라오시래요.”
“위층이면 A팀 화실 말입니까?”
“네.”
박상식이 자신과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 둘 다요?”
“네. 두 분다.”
곧바로 그를 따라 위층 A팀 작업실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눈에 들어온 화실 풍경은 확실히 A팀과는 느낌이 다르다.
전체적으로 화실이 밝고, 무엇보다 일단 작업용 책상도 더 고급이다.
우리가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창가 쪽 자리에서 전상길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불렀다.
“어, 이쪽이야.”
그쪽으로 다가가자 그의 책상 근처 의자에 추양구가 앉아있다. 어딜 가는가 했더니 이곳에 온 모양이다.
“이야, 이번 이야기 너무 재밌더라. 전에 봤던 이야기도 괜찮게 수정되었고, 뒷이야기도 엄청 흥미로웠어. 결말부분도 짜릿하고, 시원하고 통쾌해. 이번에 나온 거 완전 물건이던데.”
전상길이 아주 만족했는지 평소보다 요란한 몸짓으로 칭찬을 한다.
재미있다는 건 솔직히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었지만, 반응을 보니 내 예상보다는 더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역시 당시의 트렌드를 따르길 잘했다싶다.
하지만 난 표정을 관리하며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말이야. 갑자기 올라오라고 한건, 자네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야.”
전상길의 말에 이번엔 박상식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이거 한 20권 정도로 만들고 싶은데, 중간에 이야기를 조금 더 늘려주면 안되겠어?”
“20권요?”
박상식이 놀라 되묻자 전상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20권. 양구, 이 친구가 이거 너무 짧게 끝내면 아깝다는 거야. 물론 내 생각도 같아. 30프로 정도만 더 늘리면 어떻게 20권 정도는 될 것 같다는 데. 어때, 가능하지?”
박상식이 나를 돌아본다.
에피소드야 이미 탄력을 받은 상태라 어렵지는 않다. 골치 아픈 말썽에 휘말려 공사가 진행되지 않는 건설현장 에피소드 정도를 추가해도 되는 거고, 거기다 권수 늘어나면 우리도 당연히 좋은 거다.
난 문제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가능해요.”
그렇게 말하며 묘한 표정으로 전상길을 바라본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걸까. 전상길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20권 분량의 돈은 지급해야지. 나도 기본적인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야. 완성하면 전에 줬던, 돈 선불 80만원을 제외하고 현금으로 바로 지불하지.”
20권의 분량이면 500만원이다.
전에 받은 돈을 제외해도 420만원, 각자 210만원씩이다.
곁에 있던 박상식의 숨을 삼킨다.
속으로 받을 금액을 계산했던 모양이다.
“얼마나 걸리겠어?”
“뭐, 빠르면 이삼일, 늦어도 닷새정도면 될 겁니다.”
내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전상길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이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좋아, 그럼 부탁해.”
“네. 그럼 우린 가볼게요.”
“그래. 열심히 써 줘.”
전상길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A팀 작업실을 나가다 멈칫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서다.
눈을 살짝 돌려 그곳을 보니 누군가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다.
살벌한 눈빛,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다.
뭐지, 저놈은?
하지만 노려본다고 싸울 수는 없는 일이라 곁에 있던 박상식을 툭 건드렸다.
“왜?”
“저기.”
“······?”
박상식이 내가 가리킨 방향을 힐끔 보고 나서는 곧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A팀 작업실 문을 닫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 A팀 스토리작가 같은데?”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자리에 그림이 없고, 책만 있잖아. 아마 스토리작가가 아닐까 싶어서.”
그 짧은 시간에 그런 것까지 확인한 모양이다.
“그런데 왜 우릴 노려봐?”
“위기감이지 뭐. 지 밥그릇 뺏길까봐 저러는 거야.”
그제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무래도 자신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렇게 노려보는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저런 사람 때문에 일부러 못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무시해, 그냥.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스트레스 받아서 이 짓도 못해.”
“별로, 신경 안 써. 그냥 왜 저러나 싶어서.”
“그래. 잘 생각했어.”
*
사흘 후.
A팀 작업실 안에 있는 전상길의 개인 사무실로 들어와 있었다.
전상길의 요청대로 30%정도 내용을 추가해 완성했고, 그것을 추양구와 전상길이 번갈아가며 확인했다.
전상길은 내용이 만족스러운지 연신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좋아, 추가된 내용도 재밌고, 신선해. 이 정도면 박용성의 기업만화 부럽지 않겠어.”
아, 그러니까 신경 쓰고 있던 사람이 박용성이었구나.
이 사람도 참 대단한 게 자신보다 몇 단계는 위, 아니 아직은 까마득한 위치에 있는 박용성을 신경 쓰고 있었다니.
하긴, 무기력한 것보다는 이런 야심이 백배 낫긴 하지.
“그리고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책상 쪽으로 가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비밀서랍을 연다.
그러더니 묵직한 현금다발 두 개를 꺼내서는 우리 앞에 툭 내려놓는다.
척 봐도 만만치 않은 액수의 만 원짜리 다발.
“세어 봐.”
박상식과 내가 돈을 집어 들었다.
박상식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천천히 돈을 세어보니 225만원이다.
둘이 합치면 450만원.
원래 약속한 돈은 420만원 아니었나?
내 표정을 본 건지 전상길이 웃으며 대답한다.
“30만원 더 넣었다.”
“아, 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상식과 내가 감사인사를 하자 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뭘, 그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
전상길의 화실이 있는 건물을 나오는 동안 박상식은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지금 저 인간 정신이 온통 자신의 가방 속에 있는 거금에 가 있을 거다.
나도 지금 점퍼 품속에 있는 묵직한 돈다발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갑자기 도로 쪽으로 다가가던 박상식이 손을 흔들며 택시를 부른다.
“어? 택시 타려고?”
“당연하지. 이런 거액을 가지고 버스 타려니까 불안해서 안 되겠다.”
“하긴.”
내가 살던 시절로 정확히 환산하긴 힘들지만 대충 10배라고 하면 2천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아니, 솔직히 225만원이라는 돈도 작게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박상식 덕분에 나도 얼떨결에 초록색 포니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호사를 누렸다.
택시에서 내린 후 집으로 향하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먼저 가.”
“왜?”
“생각난 게 있어서. 뭐 좀 사려고.”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나 지금 이 거 때문에 계속 소변 마려워서 안 되겠다.”
그렇게 말하더니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해 바삐 걸어간다.
난 바로 근처 철물점으로 향했다.
*
집으로 들어가니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신다.
늦게 퇴근하는 날 위해 따로 밥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어. 이제오니?”
“네.”
그런데 엄마가 내 손에 들려진 물건을 보고는 깜짝 놀라신다.
“어머, 그거 뭐니?”
“아, 이거. 경희가 말한 연탄온수기요.”
“그거 비싸지 않던?”
“얼마 안 해요.”
곧바로 난 설치를 시작했다.
사실, 설치랄 것도 없다. 그냥 파란 통은 연탄아궁이 곁에 두고 뚜껑만 교체하면 되니까.
곧바로 통에 물을 잔뜩 부어둔다.
이렇게 해 두면 물이 천천히 데워지는 그런 방식인 모양이다.
그런데 부엌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는지 경희가 방문을 열고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어? 연탄온수기 사왔어?”
“어.”
“이제 우리 따듯한 물 쓸 수 있는 거구나.”
“그래.”
“아싸싸!”
경희가 흥분으로 소리친다.
잠시 후, 엄마가 식사준비를 마치고 밥상을 준비하자 내가 그것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경희도 어느새 다락으로 올라간 모양이다.
둘 다 요즘은 매일 입시공부 하느라 바쁜지 잠자는 시간 외엔 거의 다락방에 처박혀 지낸다.
듣기론 쌍둥이 성적이면 인문계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데,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매일같이 열심이다.
그때 방문이 열린다.
누나가 퇴근하고 들어온다.
피곤한 얼굴이면서도 평소와 달리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다녀왔어. 엄마. 어, 윤환이구나.”
“진희야, 윤환이가 물 데우는 거 사왔다. 부엌에 있는데 봤니?”
“정말?”
누나가 부엌을 기웃하더니, 곧 방으로 들어와서는 날 보며 좋아라한다.
“연탄온수기네.”
“경희가 윤환이에게 졸랐지 뭐니.”
“어차피 나도 필요했었으니까. 아니, 그보다.”
내가 밥상을 슬쩍 옆으로 밀쳐두었다.
“두 사람 다 잠시만.”
내가 방바닥을 탁탁 두드리자 그 말에 엄마랑 누나의 표정에 호기심이 인다.
누나가 방에 앉자, 난 점퍼를 뒤적거려 두 사람 앞에다 두툼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니?”
“열어보세요.”
엄마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봉투를 열어보고는 흠칫 놀란다. 그리고는 봉투 속에 든 것을 꺼내며 경악했다.
물론 곁에 있던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니 이 많은 돈은?”
“오늘 스토리 완성한 돈을 받았어. 총 450만원 받아서 상식이 형이랑 반 나눴지. 그래서 225만원.”
그 말에 엄마가 할 말을 잇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러더니 서둘러 돈을 봉투 속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너무 큰돈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이, 이게 정말 무슨 일 이래니. 심장이 떨려 죽겠다.”
“저기 엄마.”
“으, 으응?”
“이제 엄마 일 그만하셔.”
“······.”
“이제 엄마 돈 벌지 말고 집에서 지내. 맨날 몸 아프다고 그렇게 끙끙 앓지 말고. 병원에도 좀 가보고.”
“······.”
“그리고 누나.”
갑자기 시선을 누나에게 돌리자 화들짝 놀란다.
“······으응?”
“누나도 이제 일 그만하고, 검정고시라도 봐라.”
내 말에 누나가 크게 당황한다.
“······갑자기 검정고시는 왜?”
“누나 이제 겨우 23살이잖아. 이제부터라도 다시 공부시작해서 대학 가.”
“뭐?”
“누나도 아버지랑 나 때문에 학교 포기했으니까, 이제라도 원래의 인생을 찾으라고. 집은 이제 내가 다 책임 질 테니까.”
“······.”
순간 누나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 이런 순간이 제일 난감하다.
난 서둘러 다시 엄마를 돌아봤다. 그런데 엄마 표정도 심상치 않다.
도망가고 싶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당탕!
다락문이 버럭 열리며 쌍둥이들이 우당탕 쏟아져 나왔다.
“엄마얏!”
“꺄악!”
두 녀석들이 바닥에 널브러지자 엄마가 버럭 소리쳤다.
“얘들이 진짜,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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