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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퀘스트-159화 (159/160)

159화

<제국력 528년 3월>

[R급 드래곤의 키스가 발동합니다.]

+ + +

딱.

"아악, 왜 때려요?"

"손님 왔다, 이 녀석아."

사장의 말에 아픈 뒤통수를 만지며 앞으로 보았따. 자주 보는 고등학생이 눈앞에 서 있었다.

"얘가 무슨 손님이에요!"

"유일한 단골이다, 이 자식아! 똑바로 안 하면 잘라 버린다?"

"네! 알겠습니다!"

짐짓 놀란 척을 하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장의 협박은 여러번 들었고, 그게 빈 말이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해줘야 했다. 이런 걸 원하는 거 같으니까, 을인 내가 알아서 갖다 바쳐야지.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네."

늘 듣던 단답형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뭔가 출근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사장의 뒤통수 치기 보다도 더.

여고생은 자리에 앉았고, 나는 빠르게 커피를 내려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여기 커피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고생이 살짝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수확은 있었다.

화악.

금방 빨개져 버린 여고생의 얼굴은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 + +

"그럼 저, ...저랑 사귀지 않으실래요?"

오늘에서야 이름을 알게 된 여고생, 전예지양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했다. 듣긴 들은 것 같은데, 그게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뜻이 맞는 건가?

잠깐의 침묵이 예지양과 나 사이를 맴돌았다. 예지양은 그게 어색했는지,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빨갛게 한 채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좀 전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던 건 다 거짓말인 것 같았다.

아무튼, 그 부끄러워하는 모습에서 난 얼마 전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웃으니까 얼굴을 붉히던 그녀의 얼굴을.

"...수능 끝나고, 됐지?"

"네?"

"수능부터 쳐. 그럼 대답해 줄게."

"..."

내 말을 완곡한 거절로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정정해줄 필요가 있었다.

"긍정적으로 대답할 생각이니까, 수능 잘 쳐."

"네? 아... 네!"

환하게 웃으며 꾸벅 하고 허리를 90도로 숙이는데, 그게 참 귀엽고, 또 사랑스러웠다.

...사실, 예뻐서 사귀는 거다.

+ + +

예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조금 늦었지만, 너무 더워서 천천히 걸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데 땀 냄새를 풍길 순 없으니까. 메시지로 천천히 와도 된다고 했으니... 나는 말 그대로를 믿을 것이다. 그녀는 솔직한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정말 걷기만 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날씨다. 하지만 그런데도 뛰는 사람은 뛰게 마련이었다. 내 뒤에서 뛰어오다가, 이제 막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사람도 그랬다. 본능적으로 스캔해 본 결과 뛰어난 몸매와 외모의 소유자임을 알았다. 숨소리도 왠지 색기가 가득하다 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외모였다.

거기까진 문제없었다. 길 가다가 사람 구경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꺄아아악!

쿠당탕탕!

색기 넘치는 외모의 소유자가 대판 넘어졌다. 학교는 공사 중이었으니 예견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괜찮으세요?"

다가가서 손을 내민 이유는 뭘까? 난 예지가 있는데, 난 예지가 있는데... 쓰러진 그녀가 너무 예뻤고, 또 애처로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머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진짜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부끄러울 것이다. 꽈당! 도 아니고 쿠당탕탕! 하며 넘어졌으니까.

"저기요, 진짜 괜찮으세요?"

"흐아아아앙!"

갑자기, 그녀가 내 다리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 걸렸다.

+ + +

"...오빠, 언니 만나고 왔죠?"

"응? 아닌데?"

사실 누나를 만났다. 좀 전에 오다가 마주쳤다. 마주친 후 가볍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예지가 내게 뿔을 내듯 별일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앞서 말했지만, 예지의 질투가 요즘 매우 심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누나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 이해는 간다. 누나는 아름다운 분이니까. 그래도 내겐 예지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나?

"...냄새가 언니 향순데요?"

"응? 에이, 설마. 네가 어떻게 누나 향수 냄새까지 알아? 오늘 뭐 뿌리고 나온 지도 모르면서."

"으이구 이 바보야! 네가 만났으면, 나도 만났을 가능성을 생각해야지! 좀 전에 만났다! 만났다고! 너, 또 거짓말했지! 언니 만났다고 누가 뭐래? 왜 거짓말이야 거짓말은!"

"...예, 예지야... 여, 여기 밖이..."

"내가 거짓말 하지 말랬지!"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요즘 그녀는 거짓말에 민감했다. 내 사소한 거짓말에도 화를 버럭버럭 냈다.

"진짜로? 진짜 잘못했어?"

"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예지랑 안 사귀는 건데... 가 아니라, 그녀에겐 사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누나와 나 사이를 견제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의 가정 상황이 별로 안 좋았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외도를 하셨고, 지금 별거 중이셨다. 그녀가 거짓말에 학을 뗄 만도 했다.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수군수군 거렸지만... 뭐, 이 정도야...

"...진짜, 진짜죠?"

"미안..."

눈물을 글썽이는 예지를 폭하고 안았다. 오늘따라 그녀가 참 작았다. 그녀의 부모님이 미웠다. 이렇게 작은 애에게 왜 상처를 주시는지...

+ + +

"야 강민!"

멀리서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생김새가 조금 변했고, 옷이 날개처럼 분위기를 바꾸었지만, 어릴 때의 특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찬아!"

와락.

그는 나에게 달려와 안겼고, 나도 콱 안음으로써 화답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옛날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너무 반가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보자고 할 것을...

"야, 축하한다. 20년 만에 연락해서 한다는 소리가 결혼식이라니... 암튼 축하해."

"고맙다. 제수씨는?"

"제수씨? 형수님이라고 해야지! 형수님께서는 지금 산후조리 중이시다. 다음에 한 번 시간 내지."

"형수님은 무슨. 그래, 알았어. 안부 전해드려."

"그나저나 제수씨는 어떻게 생기셨대?"

"어허, 형수님이라고 해야지..."

"어쭈?"

"눈 부라리면 어쩔 건데? 여기 결혼식장이거든?"

"기사 한 번 나보지. 결혼식에 괴한 난입, 내연녀로 추정!"

우리는 서로 싸울 듯 쳐다보다가, 잠시 뒤에 미친 듯이 웃었다. 너무 즐거웠다.

"대기실에 있긴 한데, 혼자 가기는 좀 그렇지? 여기 사진이라도 봐."

"그래, 사진이라도... 와아."

사진이 솔직히 잘 나왔다. 마치 예지를 처음 만났던 때 같았다. 지금 예지는 나이가 좀 들어서 이렇지는 않았다. 그래도 예쁘지만.

"예쁘지?"

"너, 횡재했구나? 어디서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이게 다 어릴 때 너 같은 찌질이랑 논 걸 하늘이 보상해 주시는 거 아니겠니."

"...너, 진짜 결혼식 끝나면 보자."

"그래, 꼭 보자. 그때 제수씨도 함께."

"크큭, 그래, 욕 봐라. 난 들어가 있으마."

"어!"

+ + +

"쌍둥이 입니다."

"네? 쌍둥이요?"

"네. 축하드립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나와 예지는 서로를 쳐다봤다. 놀란 표정이었다. 나도 아마 놀란 표정이었었을 것이다. 기뻤지만, 걱정이 앞섰다. 병원을 나오면서부터 집에 올 때까지, 우리는 그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어쩌죠?"

"...그러게...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되나..."

솔직히 둘이 살기도 빠듯했다. 아이가 생긴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쌍둥이라니... 기쁘긴 했다, 기쁘긴 했는데... 후우...

딸깍.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갑자기 너무 미안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불경기에 아기는 분명 큰 짐이지만, 이렇게 무거울 줄이야.

"...안 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표정과 목소리의 2연타를 맞고 있자니 짜증이 확 일었다. 무심코 짜증을 뱉어내려다가, 또 멈췄다. 다행이었다. 여기서 짜증을 내는 건 최악이었으니까, 그보다 여기서는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건 기쁜 일이니까.

"...응, 가야지!"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냈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나 돌아볼 정도로 크게 냈다. 예지도 놀란 모양이다.

"...뭐예요? 갑자기?"

"그 표정, 예쁘다."

화악.

...오랜만이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게... 그러고 보면 내가 너무 말을 아낀 것 같기도 하다. 예쁘다, 사랑한다... 예전에는 매일 해줬는데...

"사랑해, 여보."

"가, 갑자기 왜 이래요?"

"그야, 쌍둥이 낳아 줄 거잖아? 어느 남편이 그런 아내를 사랑스러워하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왜 이렇게 태도가 바뀌었는데요."

예지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응? 잘 생각해보니까 너무 좋잖아. 자식이 둘이나 생긴다는데. 뭐, 돈 드는 거야 어떻게 되겠지. 내가 좀 더 열심히 할게. 나 능력 있는 거 잘 알잖아?"

"...게을러서 문제죠."

"그래, 맞아! 그 부분을 어떻게 해보자. 이제 아빠가 되었으니까, 나도 바뀔지 몰라."

"흥, 해가 서쪽에서 떠도 안 믿어요."

그녀의 말에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예전에도 똑같은 말을 똑같은 포즈로 내게 했었다.

"너 예전에도 그 말 한 적 있는 거 기억나?"

"네? 내가 언제요?"

"왜, 우리 막 만나기 시작했을 때, 내가 그랬잖아. 우리 결혼 할 거라고..."

"아..."

그녀도 기억난 모양이다.

"그 때 네가 그랬어. 뭘 벌써 결혼이냐고. 해가 서쪽에서 떠도 안 믿는다고..."

"...그런데 결혼했네요?"

"응,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내 말은 다 맞으니까. 하하하하."

"...알았어요. 믿을 테니까, 주변에 소음공해는 그만 만들고 올라가요."

"네, 마님!"

"꺄악!"

공주님 안기로 그녀를 들고 집으로 올라갔다. 그날 밤 허리가 아파 끙끙댔지만, 그녀가 즐거워 해줬으니... 본전은 뽑은 셈이다.

+ + +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몸을 흔들었다. 부인이었다.

"여보, 두리 전화 왔어요."

"응? 두리?"

"네, 두리요!"

멍한 상태에서 전화를 넘겨받았다.

"아버지! 건강하십니까! 저 두립니다!"

"...조용히 말해도 돼. 나 아직 보청기 안 낀다."

"하하하하. 뭘 또. 제가 이렇게 난 건 다 아버지 때문이 아닙니까. 그냥 즐겁게 들으세요."

두리도 이제 40인데... 아직도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참, 내가 아들 하나는 잘 키웠지. 에너지 넘치고 좋잖아?

"다른 사람한테 말할 때는 좀 낮춰. 뒤에서 흉본다."

"하하하. 그 소리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네요. 어머니께서도 안 하시는 잔소리는 아버지께서 하시다니."

"...나이 들면 남녀가 바뀐다잖니."

"어이구, 벌써 그런 나이가 되신 겁니까? 이거 제가 더 열심히 벌어야 겠는데요?"

"아서라. 네 누님이면 충분하다."

"하긴, 누나가 좀 잘 벌죠. 아버지가 저보다 용돈 더 많이 받으실 걸요? 제 와이프는 진짜 짠순이라서..."

"짠순이가 좋아. 네 엄마도 얼마나 짠순... 으윽!"

짠순이란 소리에 발끈했나 보다. 부인이 내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었다.

"여전히 금술이 좋으시네요. 부럽습니다. 아버지."

"...남자는 힘이야. 그럼 다 돼...으윽!"

부인이 또 옆구리를 찔렀다. 이번엔 말로도 공격했다.

"당신!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요!"

"두리가 무슨 애야! 40이 넘었어!"

"그래도 애예요!"

"...아, 아버지?"

귀에서 약간 떨어진 전화기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도 살짝 열 받았거든?

"두리가 애면, 당신은 뭔데? 아직 중학생이야? 어이구 잘 나셨어요. 70먹은 중학생 여기 있네요! 동네방네 광고나 하고 다닐까?"

"여봇!"

"그렇게 목소리 높여봐야, 하나도 안 무서워. 좀 있다가 밤에 나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려면, 지금 목소리 낮춰야 할 걸?"

"여봇!"

"어이구, 애 다 듣겠다. 두리야, 잘 들리지?"

"네... 하하하."

평화로운 오후였다.

+ + +

"아버지! 제 말 들리세요?"

"아버지!"

딸과 아들이 보인다. 말하고 싶다, 들린다고.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이 떨어진다고 해도, 소리도 안날 것 같았다. 누워 있어 보이진 않지만, 내 상태를 알았다. 온몸에 뭔가를 주렁주렁 매고 있겠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도 있어요!"

손자와 손녀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대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몸이 쇠약해진 게 느껴진다. 마지막은 좀 편하게 가고 싶었는데, 역시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버지!"

눈이 절로 감긴다. 감긴 눈꺼풀에 먼저 간 부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당신, 오래 기다렸어. 이제 내가 가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 + +

딱.

"아악, 왜 때려요?"

"손님 왔다, 이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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