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개의 퀘스트-158화 (158/160)

158화

[고정자인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어느새 나타난 로호프가 대신 해줬다. 이번에 온 그는 역시 분신체였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의 로호프가 버그 퇴치용 자동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본인이 직접 움직이는 캐릭터 같았다. 그리고 그 힘 역시 달랐다. 지금 내게 흡수된 약 100억의 영혼을 제외한 모든 영혼의 힘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환한 빛으로 가득 찼고, 주변 우주는 칠흑빛으로 바뀌었다. 이제 우주를 파괴해봐야, 영혼은 흡수되지 않게 된 것이다.

[반쪽 아키로가 잘 버틴다 했더니, 고정자라서 그랬던 거냐.]

고정자.

용어는 생소했지만, 뜻은 알아들었다.

고정자는 기억을 고정시키는 존재였다. 단 하나의 기억,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하나의 기억만큼은 잊지 않으려는 집념이 만들어낸, 집념의 화신이었다. 그 무자비한 집념은 세상의 흐름조차도 바꾸어서,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 때까지 그 육체가 무한 회귀를 하게 만든다. 즉, 고정자가 아키로가 되어 기억을 육체가 아닌 영혼으로 옮길 때까지,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이고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방어시스템을 얕봤군, 고정자의 자질을 각성시킬 수 있다니...]

고정자는 완벽한 고집쟁이에 이기주의자로, 거기에는 세상조차도 휘말린다. 그만큼 굉장히 특수한 자질이고, 로호프도 이제껏 자신을 제외한 고정자는 처음 본 거였다. 그의 표층 의식에서 흐르는 생각이 내게 마구 넘어와 온갖 정보를 전해 주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소용없다. 어차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아키로처럼 격리시키면 되지.]

그가 흡수한 차원 수십 개. 그 중에 아키로나 신이 있는 세계도 있었다. 그는 그럴 때마다 그 신을 흡수해서 자신 안에 가두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홀로 두었다. 자살 말고는 신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가두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가만히 두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영혼이 발전하겠지만, 밖에서 한창 활동 중인 로호프에 비해서 그 성장이 느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국 영원히 갇히게 되는 셈이다.

그게 지금 그가 나에게 하려는 일이었다. 나를 죽여 내 영혼과 연결된 다른 영혼들을 떨어뜨린 다음에, 어딘가로 격리시키는 것.

그는 지금 그런 마음을 먹었고, 수조 대의 영혼이 그 의지에 따라 움직여 나를 압박했다. 내가 가진 영혼은 고작해야 100억대. 힘 대 힘으로는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100개의 평행세계가 있었다. 그의 공격에 맞춰, 나는 모든 세계를 연결했다.

[가볼까?]

파지지직

번개의 신 베르트랑이 그의 성명절기인 라이트닝 소드를 사용했다. 번개는 사방에서 밀려들어오는 로호프의 공세 중 정면을 공격했다. 흰색 번개는 예저의 나처럼 그 공격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이거 이거, 대한한데?]

그래도 빈손으로 오진 않았다. 그는 약 100억 명의 영혼을 로호프에게서 끊어 내게 가져왔다.

화르르르륵.

왼쪽에서는 파란색 불사조가 로호프의 공격을 덮쳤다. 불사조는 부나방처럼 스러졌지만, 로호프의 일부가 타면서 연결이 끊어졌다. 주인을 잃은 영혼은 내게로 와 흡수당했다. 불꽃의 성자에서 불꽃의 신으로 격상된 파이레스의 불사조였다.

[나는 고작 이런 거지만!]

한 줄기 바람이 사방을 감싸며 전 방위에서 로호프의 공격을 방어했다. 너무 빨라서 칼날같이 날카로워진 바람은 로호프의 공격의 야금야금 갈아 먹으며 영혼을 끊어 내게 전달해줬다. 전령의 신이 된 요한의 힘이었다.

각각의 세계에서 나는 신이었다. 애초에 이 퀘스트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신이 된 자들이 경험한 삶의 일부를 내가 경험하며 성장하는 취지였다. 100명이면 많다고도, 적다고고 하기 힘들었다. 왜냐면 평행세계는 무한대니까.

좀 전까지는 이런 걸 알 수 없었다. 나랑 연결된 평행 세계의 인물들이래 봐야 그랜드 마스터가 한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100억의 영혼을 흡수하면서 내 영혼의 격이 강제로 확대되어 신급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잖아!][드래곤은 브레스를 쏴!][왼쪽을 쳐!][공간이동 해!][시간이 없다!][빨리!]

이 와중에 지휘하고 있는 건 전쟁의 신 테디오였다. 그는 모든 상황을 한 번에 파악하고선 로호프의 공격을 막고, 최선의 루트로 공격했다.

[이, 이건 뭐냐! 갑자기 어디서! 이 빌어먹을 것들이!!!]

그 밖에도 수많은 '나'가 제각각 로호프를 공격했다. 각각의 영혼이 품고 있는 힘은 평균 수억의 영혼이 함께하는 수준이었지만, 그 농도가 달랐다. 수억의 영혼 하나하나가 의지를 갖고 평행세계의 ‘나’를 따르고 있었다. 희생이 믿을 수 없는 힘을 내는 것과 비슷한 이유인 걸까. 같은 마음이 된 그들이 내는 힘은 로호프가 조작하여 만드는 힘과는 그 질이 달랐다.

그렇군, 저게 진짜 신의 힘인가.

[그래 봐야 이런 소꿉장난으로 나를 막을 수는 없다!]

로호프의 말처럼, 이건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저쪽은 조 단위였으니까. 이쪽에서 열심히 그의 영혼들을 빼앗아 오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이기려면, 영혼들의 힘을, 이제 천 억 정도 모인 영혼들의 힘을 끌어내야만 했다.

‘힘을 주십시오.’

눈을 감고 내 속으로 들어가, 내게 흡수된 영혼들에게 말했다.

‘...’

영혼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조금 전까지 기쁨과 쾌락으로 그들을 밀어붙여 힘으로 사용 중이었는데, 그걸 풀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주어진 어느 정도의 자유에 아직 멍하고 있었다.

‘힘을 주십시오. 여러분께서 힘을 주셔야 나갈 수 있습니다.’

‘나갈 수 있다고?’

‘거짓말이다!’

‘저 놈도 로호프랑 같은 게 틀림없어!’

‘너 스스로 죽겠다는 거냐?’

‘좀 전이 좋았는데, 다시 천국으로 보내 줘.’

‘그래도 로호프보단 네가 더 나은 것 같으니... 힘을 빌려줘 볼까?’

‘여러분, 밑져야 본전입니다! 강민을 밀어줍시다!’

‘싫은데?’

‘나는 할래.’

.

.

.

천억의 영혼들의 의견이 모아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 힘을 내어주겠다는 이도 있었지만,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에게는 개별로 설득했다. 내 안에 들어오면서 읽은 그의 기억을 바탕으로, 최선의 설득을 수십, 수백 번이고 반복해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안에 있는 영혼들의 뜻이 하나가 되었다.

‘진짜로 죽을 수 있겠는가?’

‘맹세합니다.’

‘믿어 보지.’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걸 끝으로 눈을 뜨자,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파아앗.

[됐군!]

[축하한다!]

[진짜 신이 됐어!]

[자네는... 희생의 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라니...]

온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 내 손과 발도 안 보일 지경이었다. 빛은 사방에서 밀려오던 로호프의 힘을 단번에 밀어냈다.

[그건 뭐냐!]

[너는 모르는 영혼의 힘이다!]

[내가 모르는 힘이라고? 큭, 아니지. 알 것 같아. 이 더러운 느낌은 너네들이 죽을 때랑 비슷하니까! 이 역겨운 것들!]

그가 의지를 토해내자, 다시 그의 세력, 검은 색이 온 세상을 덮었다.

역겨운 것들이라...

표층 의식에서 읽을 수 있는 기억에 따르면, 그는 고정자였다. 어떤 내용의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스스로를 고정시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스스로를 포기하는 ‘희생’이란 건 역겨운 거겠지. 혹은 다른 이와 교류하고 의견을 조율해 힘을 낸다는 것 역시 역겨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다른 영혼을 자신의 아래에 굴종시키는 방법으로만 힘을 늘려 왔는지도. 그 방법은 쉬운 방법이지만, 결국 한계가 존재했다.

[역겨운 것들이라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엔 네 놈은 고집이 너무 세서 상종하고 싶지 않아.]

파아아아앗!

흰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온 세상이 환한 빛으로 가득찼고, 어둠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로호프가 일격에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끝난 건 아니었다.

[...놀랍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검은색의 로호프, 이제 나에게 모든 영혼을 빼앗긴 그가 다시 나타났다. 이곳은 그의 안이었지만, 동시에 내 안이기도 했다. 나는 그 안에 있던 모든 영혼을 내 아래에 넣었고, 그의 일부도 내 안에 넣어 버렸으니까.

[그래도 표층 의식은 내 것이고, 나는 여전히 신이다. 내 안에서 이렇게 압도적인 위치를 잡아봐야, 여긴 내 영혼의 중추 정도에 불과해. 결국 넌 내 아래에 있는 거다. 밖에 영향을 끼칠지 말지는 언제나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

그의 말대로, 싸움은 이겼지만 내가 실제적으로 가져온 건 없었다. 단 한가지, 그와 나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것 빼고.

[하지만, 이제 내가 스스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내 말에 그의 표정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게 틀림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미쳤구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는가?]

[모든 기억을 잃겠지.]

[웃기는 소리, 네가 이제껏 쌓아왔던 영혼의 경험이 사라지고, 너는 다시 영혼의 조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건 기억을 잃는 수준이 아니야. 지성이 사라지는 거라고.]

그걸 안 건 좀 전 내 안의 영혼들과 대화하던 도중이었다. 아키로에 오른 자도 한 명 흡수당해서,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

[그래도 한다.]

[그건 네가 고정자라고 해도 벗어날 수 없어!]

그것도 좀 전에 알았다. 고정자가 회귀하는 건 아키로가 될 때까지지, 아키로가 된 후에도 회귀하는 건 아니었다. 내 판정은 애매했다. 시스템이 만들어준 아키로니까. 거기에 나는 원래부터 고정자가 아니라, 시스템이 각성 시킨 것이기 때문에 고정하고자 하는 기억, 시점이 없었다. 이번에 죽으면, 그의 말대로 내 영혼은 조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 흡수된 영혼들은 원래대로 세상에 풀리겠지. 그럼 그들은 원래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삶과 죽음을 반복할 것이다. 내 죽음으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건 로호프와 나, 둘뿐이다..

[그래도 상관없어.]

내 굳건한 의지에 그가 애원했다.

[안 돼. 하지 마. 네 세계에 피해는 입히지 않을게. 나는 여기서 사라질 수 없어.]

그와 나의 경계는 모호해졌지만, 그의 심중을 읽을 수는 없었다. 고정자 출신인 그는 나처럼 정신 방어가 투철했다. 표층 의식은 절대로 그렇게 하겠다고 눈물이고 콧물이고 다 질질 짰지만, 그 아래의 검은 속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는 내가 바뀌지 않자, 화를 냈다.

[나는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빌어먹을 창조주를 찾아서, 그녀를 되살려야 한단 말이다!]

그 화의 한 켠 에서, 한 여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그 여성을 잊지 않기 위해 고정자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걸 보면,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유하기 위해서 영혼을 검게 물들이는 걸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다.

[젠장! 넌 뭐냐! 넌 뭐냐고! 제발, 너도 나처럼 영겁의 시간동안 추억만 곱씹으며 살아 보면 이해할 거야. 내가 왜, 왜 이러고 있는지를! 그러니까, 제발!]

그의 영혼에서 검은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 안에는 그가 이제껏 품어왔던 슬픔과 분노,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온통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나의 빛을 찾기 위해 계속 헤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영겁의 시간 흐른다면, 나도 저리 될지도 모르지.

[미안하지만...]

하지만 어둠은 모든 걸 덮으며, 모든 걸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흔들리지 않는 기억, 하나의 기둥이 있기에 넉넉해져서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이 소중한 거라고. 그래서 기억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래서 평행 세계가 나눠지는 거고...]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순간이라니! 나는 영원을 살아가는데, 순간이 소중하다고!]

그는 사기당한 사람처럼 내게 울분을 토해냈다. 실제로 그가 몰랐던 건 아닐 것이다. 그저 외면하고 있었을 뿐.

[우린 영원을 살아가겠지만, 그건 영원 동안 기쁘기 위해서는 아니잖아? 영원동안 잊지 않기 위해서지...]

[그런...]

[해 아래에 반복되는 것은 없어.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기로 결단한 거잖아? 그리고 그 기억과 함께 그 다음은 가져가고 싶었던 거고.]

[아니야, 난 그런 게 아니었어!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제발!]

모르겠다. 실제 그가 어떤 마음으로 고정자가 되었고, 이제까지 살아왔는지. 하지만 이제 그가 쉴 때가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 우리 같이 쉬자.]

[안 돼!]

나는 내 영혼을 스스로 흐트러뜨렸고, 그 순간 흰 빛으로 가득한 세계가 조각조각 나기 시작했다.

쩍, 쩍, 크르르릉.

부서져 내리는 세계 속에서 마지막으로 예지를 떠올렸다.

안녕.

예지야.

화아아아악!

+ + +

2016년 10월 30일.

이날 구원자(Saviour) 강민은 스스로를 던져 세상을 구했다. 혼란이 가라앉은 뒤 한국 정부에서 이 날을 새로운 세계(New World)의 독립기념일로 지정했고, 시간이 흘러 2030년쯤에는 전 세계에서 동시에 기념하는 축제의 날이 되었다.

============================ 작품 후기 ============================

마지막이라고 허세를 좀 부려서 겉멋만 들게 쓴 거 같기도 하고.... 뭐, 마지막이니까요.

이제 에필로그 격인 2편을 쓰면 끝이네요!

빨리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덧. 아, 아냐와의 썸씽이 있었던 부분 대폭 수정했습니다.... 어색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읽어보니 영 아니다 싶어서... 최선을 다해 수정했습니다.... 어느 걸 더 괜찮다고 보실진 모르겠네요ㅠ 스토리 내용엔 크게 변화가 없습니다. '하지 않았다'는 것 빼고요. 수정한 부분은 102-108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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