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우리 사귀기로 했어. 올해부터.”
크리스마스 때 멤버 그대로 다시 모인 신년회에서 사장은 발언은 충격적이어서, 듣는 모두가 놀랐다.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사장이 말하는 우리는 바리스타 누님이 포함된 거였다.
나도 물론 놀라긴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받는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아무런 낌새도 없이 사귀기로 하는 둘에게 놀랐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둘이 서로의 마음을 티냈다는 건 아니다. 나도 갑자기 이럴 줄을 몰랐으니까. 하지만 저번 퀘스트 속에서 둘은 결혼한 사이였다. 여기서도 그런 관계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건 당연했고, 그런 눈으로 보고 있자니 둘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카페 사장과 바리스타면 괜찮은 조합 아닌가? 그래서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 정도의 반응이 다였다.
“우와, 누가 먼저 고백한 거예요?”
“당연히 내가 했지. 나는 누구처럼 여자가 고백하게 두지 않는다고.”
아냐 누나의 질문에 사장은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그 말이 나를 지칭하는 건 듣지 않아도 뻔한 거라서, 아냐 누나의 다음 질문을 막고 싶었다.
“그 누구가 누구예요? 왠지 제가 아는 사람 같은데.”
“너도 잘 아는 사람이지. 저기 있잖아, 저기.”
나를 가리키는 사장의 손가락을 따라 앉아 있던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뭐야, 그랬어? 우리 동생 완전 소심한데?”
“동생은 그럴 것 같았지만, 진짜 그럴 줄이야.”
리오샤 형과 세료자 형은 은근히 웃었다.
“풋, 그 땐 웃겼지.”
바리스타 누님은 대놓고 웃었다.
“…….”
솔직히 말해서 내가 잘못한 게 없다. 예지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그게 사귀자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내 반응에 어디 남자답지 못한 건 없다. 그녀가 나를 좋아해서 사귀자고 말한 게 도대체 무슨 잘못이냔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밀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마나 다행인건, 가장 활발하게 말하고 있는 아냐 누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내 얼굴을 잠깐 보더니 예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와, 예지야, 진짜 대단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어? 여자가 그런 말하기 힘들잖아. 거절당할 수도 있고.”
생긴 건 완전 외국인인데, 그 입에서 나오는 건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다. 늘 보면서도 잘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거야, 오빠를 놓치기 싫었으니까요. 가만히 내버려두면 누가 채갈 것만 같았거든요.”
“그건 좀 오버다. 저 게임에만 미쳐있는 녀석을 누가 데려가? 민이가 너 같은 애를 만나서 땡 잡은 거지.”
사장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말 예지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 당시, 아니 지금의 나도 객관적으로 볼 때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겉으로 보면 아까운 사람은 그녀가 확실하다.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따져보면……, 그래도 내가 빠진다. 그녀는 멋진 사람이다.
“아니에요. 사장님이 오빠를 잘 몰라서 그래요. 오빠가 얼마나 멋진데요.”
이러니 내가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도 단호하게 나를 지지하는 저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철철 흘러넘친다. 그건 나뿐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느낀 모양이다. 모두가 부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에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내 웃음에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듬뿍 들어가 있는지, 그들이 다들 인상을 찡그렸다. 더러워서 못 봐주겠다는 얼굴이다.
사장이 한 마디 했다.
“……내가 저 꼴을 보고 있으니까 갑자기 외로워지고 말았던 거지.”
“뭐예요. 그럼 제가 좋아서 사귀자는 게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당연히 우리 미영이가 좋아서 사귀는 거라고.”
“흠흠, 그 말 믿을게요.”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장 때문에 바리스타 누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나를 비롯한 좌중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우리도 저랬던 걸까? 예지를 슬쩍 쳐다보니 그녀도 나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녀의 뒤에서 내 얼굴을 보는 리오샤 형의 얼굴은 더 일그러져 있었다. 세료자 형이 그 얼굴을 대변해줬다.
“동생아, 다음엔 우리도 여자 친구를 데려오자꾸나.”
그러나 두 형제에게 여자 친구가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다들 한바탕 웃었다.
+ + +
카페의 바로 앞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를 데려다 주면서 조금 전에 떠올랐던 궁금증을 물었다.
“나한테 고백하던 그 날 말이야. 부끄럽지 않았어?”
“……?”
그녀가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눈을 했다. 좀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백을 하지 못하는 루이스를 생각하니, 질문이 나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부끄러웠죠. 그걸 말해야 알아요?”
“아니, 그거야 당연히 알지. 부끄러워하는 네가 얼마나 귀여웠는데…….”
그녀가 대답을 하고 나서야 그 때 일, 얼굴을 붉히고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떠올랐다는 건 비밀로 하자.
“그럼요?”
“어떻게 그걸 이겨내고 고백을 했는지 궁금해서.”
“……그것도 말해야 아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확하고 붉어지니까 대답이 어떤 건지는 바로 감이 왔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궁금증이 아니라, 놀려주고 싶어서, 아니, 행복해지고 싶어서 더 물었다.
“응, 말을 해야 알 것 같아.”
“……알았어요.”
그녀는 말을 잇기 전에 잠깐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서 말했다.
“부끄러운 것보다, 오빠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그랬어요. 좋아해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앞으로도 쭈욱 좋아해요.”
그 말에 내 입술이 귀에 걸리는 걸 막을 자는 없었다. 추워서 빨갛게 달아오른 건지,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건지 모르는 그녀의 이마에 쪽하고 입술을 대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듯했다.
“오빠는요?”
그러고 보니 실수다. 저런 멋진 고백을 들었는데, 입술 한 번으로 끝내려 하다니, 루이스가 한심한 걸 비판할 수준이 아닌가 보다, 나는.
“나도, 좋아해. 그 때……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너 보다 더 좋아할 걸?”
“그럴 리가 없어요. 제가 더 좋아해요.”
“아니야, 내가 더 좋아해.”
“흥, 오빠는 뻔히 보이거든요. 저보다 게임을 더 좋아하면서.”
“뭘, 나 요즘 게임 안 하는데?”
“그럼 소설을 더 좋아하겠죠.”
“아니야, 너 밖에 없다니까.”
“빈말이라도 기쁘지만, 이건 양보할 수 없어요. 제가 더 오빠를 좋아한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를 이어가면, 우리는 계속 골목을 걸었다.
사랑만이 부끄러움을 이길 수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론이다. 그럼 그 결론은 어떻게 루이스에게 적용시켜야 할까.
+ + +
두근두근.
루이스는 분명히 릴리를 좋아하고 있다. 그건 그녀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뛰는 심장만 봐도 확실하다. 그런데 그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어릴 때부터 투닥 거려온 그녀를 여자로 보기가 힘든 것 같다. 이미 여자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다. 내가 이제껏 보고 들어온 수많은 이야기가 내려준 결론은 그렇다. 소꿉친구가 연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걸 기다릴 수가 없다. 내 하루가 이곳의 하루라고 해도 기다리기 힘든 판인데, 퀘스트에 들어올 수 있는 건 8시간이 한계였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관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어떤 방법을 써도 잘 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쓴 방법은 릴리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경고였다.
‘야,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릴리를 채가면 어떻게 할래?’
‘그럴 리가, 저 마녀를 누가 데려간다는 말이야. 쟤는 평생 혼자 살 걸.’
‘그렇지 않아. 마을의 윌리엄도 릴리를 좋아하는 눈치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저기 앉은 알렉스나 오웬도 다 릴리한테 마음이 있는 게 뻔히 보이는 걸.’
내가 말하는 건 그의 관찰 결과를 기억에서 끄집어낸 거기 때문에 그도 부인하지 못했다. 그저 변명할 뿐이다. 문제라면 그의 생각을 다 읽고 있는 나에겐 그런 변명이 안통하다는 거다. 그는 평생가도 모르겠지만.
‘그냥 쟤를 잘 몰라서 그런 거야. 걔들도 쟤의 본 모습을 알면 다 도망갈 걸?’
그 뒤 계속 경고를 날렸지만, 그의 근거 없는 믿음, ‘릴리는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은 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방법은 접고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두 번째는 그의 사랑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자극을 주는 거였다. 그는 몰랐지만, 나는 릴리가 그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게 보였기 때문에 그 부분을 그가 알게 해주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오후 과업에 늘 참여하는 친구 하나를 붙잡고 물으면 됐다.
“내가 빠지면 내 일은 누가 해?”
“어라, 너 몰랐어? 릴리가 다 하잖아. 걔가 네 몫까지 다 해. 우리가 하는 일이 그리 많진 않지만 여자애가 다 하기 힘들 텐데, 우리가 도와준다고 해도 꼭 자기가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라.”
확신하진 못했지만, 역시나 내 예상대로였다. 아무리 천사 같은 아이들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농땡이를 피우는 루이스가 아직 평범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건 그 뒤에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그리고 그럴 사람은 아무리 봐도 릴리뿐이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두근두근두근
‘어때, 릴리가 좀 더 좋아졌어?’
‘…….’
좀 더 힘차게 뛰는 심장을 보니 그런 게 분명한데, 그의 반응은 없었다. 잠시 기다렸다. 그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걔가 왜 그런 일을 하는 거지? 날 좋아하나? 설마, 아니야. 그냥 내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지금쯤 나 때문에 더 화나 있지 않을까? 원하지도 않은 빚 때문에 쓸데없는 일을 해야 한다고. 거기에 내가 고백하면, 더 싫어하겠지?’
자신이 릴리를 좋아한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한 것 같은데, 거기에 갖다 붙이는 변명은 늘어 버렸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둘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둘은 같은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먼저 발견된 사람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관의 주의를 끌었던 루이스였고, 그 다음에 발견된 사람은 그 주변에서 작은 소리로 울고 있던 릴리였다. 그 말인즉, 루이스가 울지 않았다면 릴리는 그곳에서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는 거다.
둘은 이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전해 들었고, 미담으로 알려져 주변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 둘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둘 사이에 이런 인연이 있기 때문인 탓도 있다. 어렵게 시작한 두 사람이 잘 됐으면 하는 것.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습성이다.
이런 배경을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지극히 소심해진 남자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의 마음을 속속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이해가 안 갈 수가 없기도 했고.
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잘 대해줬다. 방긋방긋 웃는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덕분에 그는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 잘해주니까, 엄마나 누나가 있었다면 꼭 그랬을 것 같은 방식으로 챙겨주니까 좋아하게 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녀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목숨 빚을 갚으라 마라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 입장에서야 목숨 빚을 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관계에서 그녀가 일방적인 호의를 보인다면, 그게 어떤 이유, 즉 빚진 자로서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실제로 그런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게 다는 아니겠지만.
그래서 그는 예전의 관계, 그가 그녀를 구해주었던 그 사건이 없던 것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서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자신을 미워할 수 있도록. 그게 아니라면 ‘이젠 빚 따윈 없어.’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건 그런 식으로 접근할 게 아닌데, 그는 그렇게 접근했고, 심지어는 ‘원하지도 않은 빚’이라고까지 치부해 버리게 된 것이다.
이건 잘 된 일인지, 아닌 건지 분간이 잘 안 간다. 그 동안은 무의식적으로 행동해왔던 것들이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자마자 표면으로 드러났다. 이건 좋은 일이다. 고백을 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분명하다. 분명한데, 드러난 것들이 너무 파격적이다. ‘원하지도 않은 빚’이라니……, 생각이었기에 망정이니, 말로 나왔으면 대형 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앞으로도 그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으로 뭐가 되겠는가? 그녀를 어려워만 하다가 관계가 소원해질 가능성만 높아졌다.
복잡하다. 어린애가 왜 이리 재는 게 많은 건지. 얽힌 관계인 건 알겠지만, 그 시작이 어찌됐든 사랑이 싹튼 것만은 분명하고, 그 ‘빚’이라는 걸 앞으로 이용할 생각만 없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텐데……,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이상적이라고 해야 할지.
그나저나 이 방법도 통하지 않으면, 그거밖에 없나? 그건 좀 위험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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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 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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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똑같은 위의 세 문장은 복사 붙여넣기가 아닙니다. 제가 매일 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