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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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포시즌스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파티. 파티에 참석한 은호의 빛나는 모습이 영국의 한 일간지에 실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기사에서 파생된 또 다른 기사가 한국 일간지의 경제면을 장식했다.

영국 측 기사는 이러했다.

<미래, 아시아 경제를 움직일 동양의 검은 보석. CS뱅크 차은호.>

그럴듯한 제목 아래 그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기사가 실렸다. 그의 학력이나 성과는 물론이고 빛나는 외모와 흠잡을 데 없는 매너까지.

문제는 그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한 장에 있었다. ‘동양의 보석인 차은호가 그의 아내와 댄스를 즐기는 모습’이라는 설명과 함께 은회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춤을 추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은 이내 국내 언론사를 통해 새로운 기사로 재탄생되었다.

<창성금융그룹 차은호 신임 부회장의 부적절한 일탈>

제목 또한 가관이었다.

“이깟 기사를 숨기려고 전화기를 건네지 않은 거야?”

해주의 목소리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게…… 아니라, 너 신경 쓸까 봐 그런 거지.”

난감함에 그저 손톱 끝만 물어뜯던 지수가 처량하게 답했다.

“스트레스 수치가 높다는데, 이런 걸로 네가 더 힘들게 되면…… 너무 속상하잖아.”

“그 여자인 거지? 박경은.”

해주는 원정의 생일날 평창동에서 마주친 여자를 떠올렸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느껴졌던 섬뜩한 여자.

생일 만찬이 열리는 내내 그녀와 은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이상한 여자.

“응, 회사에 알아보니까 원래 영국 출장 멤버는 아니었는데, 무슨 일인지 이틀 늦게 출발했다더라고.”

그래, 그랬겠지. 그래야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겠지. 그래야 좀 더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겠지.

기사를 끝까지 읽은 해주가 제 팔에 달린 링거 바늘을 뜯어냈다.

“해주야!”

피가 뚝뚝 흐르자 지수가 기함하며 소리쳤다.

“그걸 왜 빼. 너…….”

“퇴원할 거야.”

옷장에서 가방을 꺼낸 해주가 환자복을 벗었다.

“아직 퇴원하면 안 돼. 이틀은 더 있어야 한단 말이야.”

“퇴원해!”

말리는 지수를 뿌리친 해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도대체 날 여기 가둬 두는 이유가 뭐니? 어머니에게서 날 지키려고? 아니면 이딴 기사에게서 날 고립시키려고?”

목소리 끝이 떨리고, 눈시울이 홧홧해져 갔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 해주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지수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야 당연히 널 지키려고.”

“웃기지 말라 그래.”

결국 해주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생각해 보라더니…….”

뒷말을 잇지 못한 해주가 입술을 꾹 닫은 채 옷을 갈아입었다.

“박진우 이사님 찾아서 나 퇴원했다고 해.”

그러고는 당장에 병실을 나섰다.

웃기는 일이다.

계약서대로라면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그저 계약서의 품위 유지 조항을 지키지 못한 은호를 나무라면 되지, 이렇게 눈물 흘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눈물이 흐르는 걸까.

“차은호 때문이잖아.”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해주가 당장에 택시에 올라탔다.

이혼해 달라는 그녀의 요구에 앞으로 남자 대 여자로 지내보자고 한 차은호. 그녀를 유혹할 테니, 그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라던 차은호. 남자와 여자가 되어 아이를 만들자던 차은호.

“그래 놓고선…….”

눈물을 닦아 낸 해주가 당장에 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을 걸어도 차은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 * *

집으로 돌아온 해주는 곧장 제 침실로 들어갔다.

풀썩, 침대에 엎드려서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은호는 그녀에게 마음을 정하라고 숙제를 냈다. 그를 남자로 받아들일지 어떨지. 이혼은 다음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착실하게 그의 숙제를 풀고 있었다. 지해주에게 있어서 차은호 외에 누가 남자일까. 지독하게도 남자고, 유일하게 남자인 은호를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허탈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런 숙제를 낸 은호는 그 여자와 영국에서 파티를 즐겼다. 분명 미소를 담은 눈빛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만 보여 주던 그런 미소를 말이다.

“도대체 뭐가 진심이야?”

정리는커녕, 더욱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좌절을 느끼던 참이다.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전화가 요란한 진동음을 울렸다.

“차은호?”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린 해주가 얼른 발신자를 확인했다.

<평창동 어머니>

순간, 가슴 가운데가 욱신거리고 머릿속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머뭇거리던 해주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퇴원했다며?

그 어떤 안부 인사도 없이 곧장 퇴원 여부를 확인했다.

-보기에 말짱하다는데 무슨 입원을 그렇게 길게 했니? 다른 데가 안 좋은 거 아니야?

“…….”

-혹시 꾀병이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건강검진 결과 면역력이 너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수화기 너머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쯧, 그렇게 몸이 약해서야.

짧게 혀를 찬 원정이 해주를 나무랐다.

그러더니 잠시 말을 멈추고서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너 설마…… 몸이 약해서 애가 안 들어서는 걸 피임이니 뭐니, 핑계 삼은 거니?

당황한 나머지 답을 찾지 못한 해주는 그저 입술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원정의 모진 말이 던져졌다.

-네가 애를 못 가지니까 은호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거 아니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결국 스캔들도 그녀 탓이지.

속에 품은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자 내뱉는 숨결이 거칠게 떨렸다.

해주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것일까. 원정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상냥해졌다.

-해주야, 아무리 은호가 널 아낀다고 해도 남녀 간의 사랑이 평생 그렇게 뜨거운 건 아니야.

해주를 애지중지 아껴 줄 때의 목소리와 말투이다. 그녀를 끔찍이도 아끼던 시어머니의 모습이다.

-아이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게 부부란 말이야.

그런데 어째선지 소름이 돋았다.

-내일 김 기사 보낼 테니 준비하고 있어. 외숙모 병원에 같이 가자꾸나.

결국, 결론은 이거지.

울먹이듯 한숨을 내쉰 해주가 원정을 불렀다.

“어머니.”

하지만 그녀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원정이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

이미 비어 있는 수화기 너머로 원정을 간절히 찾은 해주가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더는 들고 있을 힘도 없었다.

입술을 가르고 기이하게 뒤틀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입을 틀어막은 해주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간신히 눈물을 멈춘 해주가 1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전체를 관리하는 김 주사, 부엌일과 청소를 맡은 미선 씨, 둘 중 누가 원정의 첩자일까. 그녀의 퇴원 소식을 원정에게 알리고, 보기에는 말짱하다는 말을 전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계단에 서서 두 사람의 일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본 해주가 결심을 굳혔다.

“김 주사님? 미선 씨? 잠깐만 봐요.”

그녀의 부름에 하던 일을 멈춘 두 사람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서로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조심스럽기만 하다.

“휴가를 드릴게요.”

갑작스러운 말에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바로 짐 싸서, 나가세요.”

“사모님 갑자기…….”

“유급 휴가예요.”

둘 중 누구인지는 모른다. 둘 다일 수도 있고, 하나일 수도 있겠지. 누가 되었든, 그녀가 휴가를 주는 이유를 알 것이다. 작년 이맘때 은호가 썼던 방법이니까.

“일주일 시간 드릴 테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돌아오세요.”

사용인 다섯이 둘이 된 이유. 너무나 잘 알 거잖아.

“같은 일이 반복되면, 다음은 휴가가 아니게 될 겁니다.”

“사모님.”

미선이 안절부절못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가세요.”

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해주는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당장.”

* * *

이젠 은호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포기했다. 그저 침대에 누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기댈 뿐이다.

“시간아 멈추어 다오.”

어디서 주워들은 오래된 옛 노래를 흥얼거렸다. 부디 시간이 멈추어서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때였다.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차은호는 아니겠지.”

아직도 은호를 기다리는 제가 우스워 픽― 웃음을 흘린 해주가 비척대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든 해주는 발신자를 보고서 몸을 발딱 일으켰다.

<최미정 선생님>

현욱의 엄마이자 그녀의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한날한시에 부모 모두를 잃은, 갈 곳 없던 그녀에게 방 한 칸을 내주었던 천사. 은호와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의 뒤를 봐주었던 은인.

마땅히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손끝이 대번에 떨려 왔다. 갈수록 차가워지는 손끝을 느끼며 해주가 전화를 받았다.

-너 괜찮니?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잔잔하다.

-기사 봤어.

“오보예요, 선생님.”

해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뒷말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현욱이가 많이 걱정하더라.

예상했던 대로다.

“괜한 걱정이에요. 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

“선생님.”

수화기 너머에서 얕은 숨소리만 들려주고 있는 미정에게 다시 한번 진심을 전했다.

“아시잖아요. 저 선배에게 아무 마음도 없는 거.”

-그래, 항상 현욱이가 문제였지.

다시금 고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때문에 내 아들이 힘들어하고, 결혼도 안 하고 저렇게 사는 거. 엄마로서 정말 힘들어, 해주야.

“선생님.”

결국 해주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때 저 거둬 주신 거…… 정말로 감사드려요. 평생 잊지 못할 은혜예요.”

입 안에 자갈이라도 욱여넣은 듯 목구멍까지 빠듯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런 비난 받을 이유, 없다고 생각해요.”

눈물이 차올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선배와는 거리 유지 잘하고 있어요. 선생님 말씀처럼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고요.”

차라리 밀어내라고 말해 주면 좋으련만.

“앞으로도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어요.”

눈물을 삼킨 해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대신 딱 거기까지예요.”

그때였다.

우악스러운 힘이 그녀의 손에서 전화기를 빼앗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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