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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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온 거냐고는 안 물으시네요.”

짜증 섞인 물음에 발칙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고 물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박경은, 이 여자는 영국 출장 동행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왜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그저 무슨 꿍꿍이인지가 궁금했을 뿐. 아니, 따지고 보면 그조차도 궁금한 건 아니었다.

경우에 맞지 않은 방문에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곤란한 일을 만들어 볼까, 생각이 든 정도였다.

“나원정 사모님 심부름 왔어요.”

“심부름이라……. 서울에서 런던까지 말입니까?”

“네, 회장님과 부회장님께 각각 전해야 하는 물건이 있어서요.”

경은이 손에 들린 자그마한 가방을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은호가 고개를 까딱하고는 서늘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일 봅시다.”

손에 들린 게 뭐든 관심조차 두지 않은 그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경은의 발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지금…….”

까만 스틸레토 힐에 걸려 문이 닫히지 않자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경은을 향했다.

“챙겨 드려야 해요.”

자신만만하게 은호를 마주 본 경은이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약이거든요.”

하지만 이내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그녀를 마주한 까만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띠고 번뜩였기 때문이다. 한껏 주눅 든 경은이 천천히 발을 물렸다.

그러자 은호의 입술이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내일이라고 했습니다.”

서늘한 한마디를 남긴 은호가 문을 다시 닫으려 했다. 이번에는 발 대신, 날카로운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부회장님 그거 아세요?”

차은호가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한마디가 말이다.

“강현욱 고문님과 지해주 본부장님의 관계요.”

입매를 삐딱하게 비튼 경은이 코트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사진 한 장을 은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은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룸에서 차 한잔 주시면, 전부 이야기해 드릴게요.”

* * *

“팔은 괜찮아?”

병원 옥상, 해주에게 커피를 건넨 현욱이 그녀의 팔을 가리켰다. 그러자 말간 미소를 지은 해주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인대가 늘어났대요.”

현욱의 뒤에서 지수가 말을 보탰다.

그러자 미간을 좁힌 현욱이 지수에게도 커피 한잔을 건넸다.

“잘 마실게요, 선배.”

커피잔을 받아 든 지수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해주의 맞은편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주와 지수에게 차례로 커피를 건넨 현욱이 제 커피를 들고 해주의 곁에 자리했다.

“깜짝 놀랐어. 회사로 갔는데 입원했다고 그래서.”

“많이 다친 건 아니에요.”

고운 눈웃음을 만든 해주가 제 왼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괜찮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데도 쉽게 걱정을 놓지 않은 현욱이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면회 금지인데, 이렇게 나와도 괜찮아?”

“사실은 안 되는데…… 그래도 지금은 기획서 검증이 더 중요하니까요.”

얼마 전에 완성된 미래 전략 기획서의 시뮬레이션을 현욱에게 부탁했었다.

현욱은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자 최고의 금융 경제 전문가로, 윤규의 신임을 얻어 창성의 사외 이사 겸 경영 고문직도 겸하고 있었다.

“시뮬레이션 결과 어땠어요?”

“꽤 괜찮았어.”

칭찬에 인색한 현욱의 입에서 꽤 괜찮았다는 말이 나오자 해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너희 둘 작품이야?”

기분이 좋기는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지해주 작품이죠.”

지수가 한 것이라곤 해주의 기획안을 살짝 다듬은 것 정도? 모두 해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얘가 차은호 부회장님이 디딜 십 년 치 걸음을 미리 준비하겠다며, 요 몇 달 잠도 제대로 안 자고 만든 거라니까요?”

그러니 과로로 입원을 하지. 뒷말을 작게 이은 지수가 혀를 끌끌 찼다.

지수의 말에 현욱의 시선이 커피를 마시는 해주에게 머물렀다.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얼굴이 많이 상한 것도 같다. 현욱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얼핏 스쳤다.

“부회장님은 좋겠네. 너 같은 아내가 있어서.”

커피를 홀짝이던 해주가 시선을 들어 현욱을 바라보았다.

생각하기에 따라 현욱의 말의 의미가 달리 해석될 수 있지만, 생각을 확장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래전 일을 생각하면 절대 확장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합격이란 뜻이죠?”

단순히 업무 차원으로 범위를 좁힌 해주가 방긋 미소 지었다.

“내가 합격, 불합격을 따질 자격이나 있어?”

“그래도 고문님이시잖아요. 이쪽 전문가이기도 하고.”

“그래, 합격이야. 그 기획서대로 된다면 창성은 앞으로 10년,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독보적인 금융사가 될 거야.”

애매한 칭찬이 아니라 확실히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지자 해주의 뺨이 흥분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장에라도 은호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싶지만, 영국은 밤이 깊었으니 참아야 한다.

“선배가 합격이라고 해 주니 안심이에요. 그럼 은호 씨가 영국에서 돌아오는 대로 바로 시뮬레이션 결과를…….”

“매번 그렇게 남편 일에만 매달리고, 넌 어쩔 셈인 거야?”

신이 나서 떠드는 해주의 말을 현욱이 막아섰다.

“네?”

“유학 말이야. 왜 아직도 양 교수님에게 대답을 안 드리니?”

“아― 컬럼비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양승태 교수님, 네 대답 기다린다고 목 빠지셔.”

은호 때문에 머리와 마음이 몹시도 소란스러워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는 해주를 바라보며 현욱이 미간을 좁혔다.

“아직 결정 못 했어?”

“네.”

어색하게 웃은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네 남편 때문에?”

“당연하죠.”

지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얘가 지 남편 두고 그 먼 곳까지 갈 마음이 선뜻 들겠어요?”

당연한 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 지수의 대답에는 힐난이 섞여 있었다.

“말로만 이혼한다 어쩐다 그러지. 아주 둘이 죽고 못 산다니까요? 아직도 신혼이에요. 뜨거워서 델 지경이야. 아주.”

지수의 말에 현욱의 한쪽 눈썹이 기이하게 휘었다.

“이혼……이라니?”

그때 마침 지수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수신자를 확인한 지수가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시어머니.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그러고는 당장에 옥상을 떠났다.

당연하다는 듯 현욱의 시선이 해주에게로 향했다.

“무슨 소리야? 이혼이라니.”

지수처럼 정상적인 결혼을 한 부부라면 농담처럼 흘릴 수 있는 말이다. 경영전략본부 2팀장은 매일 아침 인사로 ‘오늘은 꼭 이혼할 거야.’를 외치니까.

문제는 해주가 지극히 비정상적인 결혼을 했고, 현욱이 대충의 내막을 알고 있다는 데 있었다.

“너 괜찮아?”

“그럼요.”

현욱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한 해주가 어느새 다 마신 커피 컵을 구기듯 거머쥐었다.

“차은호 부회장님과 다른 문제 있는 건 아니고?”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현욱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해주가 조용히 대답했다.

“무슨 문제가 있구나?”

“아니라니까요? 문제 있을 게 뭐가 있겠어요.”

문득 현욱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내가 널 몰라?”

그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자 해주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만 가세요, 선배.”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

“원래는 면회 금지인데, 이렇게 손님 만난 거 알면 주치의 선생님에게 혼나요.”

자리에서 일어난 해주가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컵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양 교수님에게는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전해 주세요. 결정하는 대로 연락드린다고요.”

아직은 마음조차 정하지 못했다. 아니, 지금 해주가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일은 컬럼비아 장학생 건이 아니었다. 일단은 은호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해주야.”

싸늘한 얼굴로 돌아서는 해주를 현욱이 붙들었다.

“네 남편 때문에 네 꿈 포기할 생각은 하지 마.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포기해.”

현욱에게 잡힌 제 손목을 무심하게 바라본 해주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떨쳐 냈다.

“네, 알겠어요. 고민해 볼게요.”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거야, 인마. 너 컬럼비아 장학생 되려고 몇 년을 공들였는지 생각해 봐. 네 결혼도 결국은…….”

“제가 알아서…….”

해주의 담갈색 눈동자에 그림자가 졌다.

“할 거예요.”

마치 은호의 검은 눈동자처럼 결이 몹시도 시리고 차가웠다.

“안녕히 가세요, 선배.”

눈동자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 해주가 출입문 쪽으로 사라졌다.

* * *

사흘이 더 지났다.

입원한 지 닷새째, 은호에게서는 전화 한 통이 없다.

갑갑함을 견디지 못한 해주가 병실 안을 서성이다 문을 열었다.

“아잇, 깜짝이야.”

막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지수와 부닥쳐 해주가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런 해주를 멀뚱히 바라본 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어딜 가려고? 필요한 거 있어?”

필요한 거? 있지. 많지.

“내 전화기 어딨니?”

“전화기? 내가 가지고 있지?”

“차은호, 전화 온 거 없어?”

“안…… 왔는데?”

대답하면서도 지수가 몹시도 쭈뼛거렸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너, 내가 전하라는 말 전했니? 전화 좀 하라고?”

“응.”

눈치를 살피던 지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해주의 입술을 가르고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결국 넌 은호 씨와 통화를 한다는 이야기네? 나만 쏙 빼고?”

해주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전화기 줘.”

“안 돼!”

당황한 얼굴로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돼?”

“그, 그게 그러니까 말이야. 해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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