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반과 2반 사이-12화 (13/67)

[12화]

“집엘 같이 가자고? 왜?”

태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무슨 핑곗거리라도 찾는 표정으로 구구절절 설명했다.

“니가 나 기다리다가 다친 거니까 내가 책임진다고.”

“근데 왜 기억 찾을 때까지만 책임져?”

“그건…….”

태영의 돌발 질문에 당황한 모양인지 녀석이 말끝을 흐렸다. 태영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녀석은 괜히 태영의 시선을 피하며 버럭 했다.

“싫음 말고!”

“아냐아냐. 누가 싫댔어? 걍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는데…… 그렇게 해 주면 고마워. 사실 니가 걔들 너무 심하게 두들겨 패서 언젠간 나 찾아와서 응징하진 않을까 싶었거든. 근데 너 왜 그렇게까지 막 무섭게 그런 거야?”

“난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원랜 안 그랬잖아. 부당한 일도 주먹보단 말로 해결하는 편이었는데.”

“기억 없어.”

녀석이 딱 잘라 말하곤 뒤를 돌아 길을 걸었다. 태영이 쭐레쭐레 따라갔다.

“어디 가?”

“집.”

“벌써? 사진은? 사진 찾아서 가야지.”

“니가 찾아서 내일 제출해. 그래야 벌점 안 먹는다며.”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녀석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태영은 후다닥 녀석의 뒤를 쫓아갔다. 그게 거슬렸는지 녀석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왜 따라와?”

“그게…… 이 말을 안 한 것 같아서.”

“뭐.”

“아깐 고마웠다고.”

쑥스러워서 이제야 감사 인사를 내뱉은 태영은 머뭇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배고프지 않아?”

“밥 사 달라고?”

“야, 나도 양심은 있거든? 나 도와준 사람한테 얻어먹으려고 막 빌붙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럼 뭐.”

“내가 사 준다고. 나 돈 많아!”

태영이 지갑을 들고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태영을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서둘러 대답했다.

“됐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이 근처에 떡볶이 맛집 있는데 거기 양이 무지 많아서 혼자는 못 먹거든.”

“남기면 되잖아.”

“아깝잖아.”

“그럼 다른 친구들 불러서 먹어. 저기 있네. 니 절친.”

녀석이 턱끝으로 길 건너를 가리켰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긴 태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아가 지친 얼굴로 학원 차에 올라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나도 수아랑 같이 먹었음 좋겠다. 쟤 점심도 안 먹었단 말이야. 배고플 텐데 또 공부하러 가다니…….”

떠나는 학원 차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던 태영은 어쩐지 녀석이 조용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녀석 역시 수아가 떠난 자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엄청 애틋한 눈빛으로.

저 눈빛은 뭐지? 처음 보는 눈빛인데…….

태영은 살짝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고, 지금은 연애 보류 상태라지만 내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의 그것도 내 절친을 저렇게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짜증 나! 열받아!

“야, 보류.”

갑자기 녀석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녀석과 눈이 딱 마주친 태영은 화들짝 놀랐다.

“어? 왜?”

“너 진짜 내 여친이야? 진짜 우리 어제 사귀기로 한 거 맞냐고.”

태영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녀석을 흘겨봤다.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야?”

“그냥 이상해서 그래. 차라리 권수아랑 사귀는 거라면 믿겠다. 걔가 오히려 이상형에 가깝…….”

“뭐?”

태영은 충격받은 얼굴로 녀석을 쳐다봤다. 갑자기 매서운 눈초리가 제게로 오자 녀석은 흠칫 놀랐다.

“너 지금 그게 여자 친구 앞에서 할 소리야?”

“여자 친구라니. 나 기억 돌아올 때까지 우리 관계는 보류라니까.”

“아무리 보류여도 그렇지 너무하잖아. 어쨌든 넌 내 남자 친군데.”

“고작 하루 사귄 거 가지고 유난은. 밥도 한번 같이 못 먹은 주제에. 차라리 그냥 차 버리는 건 어때? 내가 차여 줄게.”

“그렇겐 절대 못 해!”

“대체 왜? 보니까 너 나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야?”

이 눈치 빠른 녀석.

태영은 자신의 꿍꿍이가 들킬까 봐 괜히 손톱을 물어뜯었다. 만약 이 녀석이 내가 너튜브 출연을 위해 이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날엔…….

“꿍꿍이라니 그런 거 없거든? 난 순수하게 니가 기억을 찾았음 좋겠다는 마음으로 돕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우리 어제 사귀기로 한 거 맞아. 데이트도 하기로 했는데 니가 말도 없이 약속 장소에 안 나왔단 말이야.”

“흠…….”

뭔가 고민스러운 얼굴로 턱을 매만지던 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녀석의 눈치를 흘끔 보던 태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너 이상형이 수아처럼 청순하고 뭐 공부도 잘하고 그런 스타일이야? 그런 건 기억이 나?”

“그랬던 거 같다는 거지. 본능.”

“아…… 근데 왜 나랑 사귄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나도 궁금해 뒤지겠다. 지금 제일 궁금한 게 그거라고. 하필 니가 왜 유일반 여친이냐고.”

정말 억울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녀석은 어이없어했다.

반면 녀석의 말에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은 태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동그란 눈동자엔 어느새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너 왜 그래? 우냐?”

“아니야. 배고파서 그래.”

태영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눈에 차오른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사실 오늘, 아니 어제 데이트 바람맞은 후부터 너무 힘들었다. 난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인 건지. 어쩐지 너무 쉽게 유일반이 사귀어 준다고 하고, 또 너무 쉽게 너튜브 촬영도 같이 나가 준다고 하고, 모든 게 다 너무 순조롭게 흘러간다 했더니. 이거 다 신이 계획한 게 분명해. 나한테 오늘 같은 불행을 주려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냐구요. 왜! 왜!

풀이 팍 죽은 태영을 옆에서 지켜보던 녀석은 괜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다 안 해도 되는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지금은 아니야.”

녀석은 작게 웅얼거렸다.

“지금은 귀여운 게 더 좋다고.”

하필 지금 신을 원망하느라 딴생각에 빠져 있던 태영은 옆에서 녀석이 하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 미안, 나 못 들었어.”

“못 들었음 됐어. 가자.”

“어딜?”

“배고프다며. 떡볶이 가게 어느 쪽이야? 저쪽?”

녀석이 턱끝으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언제 우울했었냐는 듯 태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랑 같이 떡볶이 먹어 주는 거야?”

“어느 쪽이냐고. 빨리 안 말하면 확, 나 집에 그냥 간다?”

“아아. 아냐아냐. 그쪽 맞아. 저쪽 골목에 있어.”

태영의 말에 녀석이 먼저 앞장섰다. 다리가 길어선지 녀석의 걸음은 꽤 빨랐다. 태영은 녀석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이 웬일이래? 아깐 죽어도 같이 안 먹을 것처럼 굴더니.

혹시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나? 아님 또 뭐 시켜 먹으려고?

태영은 앞으로 직진하는 녀석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이렇게 따뜻한 봄날, 참 이상하게도 녀석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어디 아픈가?”

태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우와. 맛있겠다!”

테이블 위에 떡볶이가 등장하자 태영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 때문에 녀석이 피식 웃었다.

“점심을 그렇게 많이 먹고도 이게 넘어가?”

“떡볶이 배는 따로 있거든요?”

“그래, 많이 먹어라. 추가할 거 있음 추가하고.”

“아냐. 다른 거 추가하면 비싸. 이걸로 충분해.”

“그래? 내가 사려고 했는데.”

“사장님! 여기 모둠 튀김이랑 당면 사리 추가해 주시고 앗, 주먹밥도 주세요!”

녀석이 어이없게 쳐다보자 태영이 배시시 웃었다.

“잘 먹을게.”

“남기기만 해 봐. 너 죽을 줄 알아.”

“그럴 일은 절대 없어. 걱정 노노. 자, 그럼 나 시작한다.”

태영은 곧장 젓가락을 들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렇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떡볶이를 먹는 태영을 마치 재밌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듯 쳐다보던 녀석이 대뜸 물었다.

“그거 버릇이야?”

“뭐가?”

“먹을 때 ‘흐으응흥흥’ 이상한 소리 내는 거.”

“야, 내가 언제 ‘흐으응흥흥’ 이랬냐? ‘흐으으흥흥흥으으’ 이랬지.”

“그거나 그거나. 그냥 조용히 좀 먹으면 안 되냐?”

“이렇게 먹어야 더 맛있거든?”

태영은 일부러 더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며 먹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젓가락질을 멈추고 녀석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근데 너 좀 이상해.”

“넌 많이 이상해.”

“우씨. 암튼 너 갑자기 나한테 왜 잘해 줘? 막 사진도 찍어 주고, 소독약도 사다 주고, 떡볶이도 같이 먹어 주고.”

“그래서 불만이야?”

“불만 정도까진 아니지만 좀 불안하긴 하지. 그러니까 말해 봐. 너 왜 그래?”

“심심해서.”

“뭐?”

“말할 상대가 너밖에 없거든.”

“근데 왜 부모님한테도 말 안 했어? 이 엄청난 사실을…….”

“부모님 없어.”

녀석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바로 태영이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너희 아버지 엄청 부자라고…….”

“지금 한국에 없다고.”

“엄마는?”

“엄만 진짜 없어.”

앗, 괜한 걸 물었다. 태영은 자책하며 당장 무슨 말을 이어 나가야 할지 난감하단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먼저 정적을 깨고 말문을 연 건 녀석이었다.

“프리무스 그 동아리 엄마가 창설한 거야. 꽤 오래전에.”

“너희 엄마도 명원고 출신이셔?”

“어.”

“아……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한 거구나? 엄마가 만든 동아리 지키려고. 너 진짜 밤낮없이 엄청 엄청 열심히 로봇만 만들었거든. 그러니까 세계 대회에서 상도 탔지. 근데 엄마 얘긴 기억이 나?”

“이 학교 입학하기 전까진 다 기억나.”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 그럼 입학 전에 나 만났던 것도 기억나? 왜 있잖아, 수영장에서…….”

“미끄러져서 물에 빠진 멍청이? 단발머리, 체중은 육십 이상!”

“아니거든? 그, 그땐 물에 젖어서 무거웠던 거라고!”

“암튼 내가 니 생명의 은인이네?”

“대박…….”

“왜?”

“얼마 전엔 전혀 모르는 눈치였거든. 근데 기억을 잃었는데 그날은 기억이 난다고? 뭔가 이상하지 않아?”

태영은 사고 회로가 엉킨 것만 같았다. 마찬가지로 녀석도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뭔가 불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사이 엉킨 사고를 겨우 풀어낸 태영이 화난 얼굴로 녀석을 쳐다봤다.

“너 유일반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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